88화
판교는 조용했다.
잘 나누어진 구획들. 깔끔하게 정돈된 건물들 위로 균열이 덧씌워져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균열이 나타나고 며칠이 지나면 도심 풍경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하는데, 연구 팀에서는 이쪽과 저쪽이 융화되는 과정일 거라고 짐작하고들 있었다.
호네쨩의 sns는 계속해서 갱신됐다. 지호는 그가 올린 피드 중에 이상한 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에에 호네쨩 지금 처음 보는 거 있어서 사진 올리는데 넘 무서운걸ㅠ_ㅠ 가까이 가기 싫어]
사진이 함께 올라왔다. 건물 한쪽 벽에 담쟁이 같은 것이 수북이 자라 있었는데 식물보다는 동물 같았다. 다음 피드에는 사진이 아니고 영상이 올라왔는데, 덩굴에 털이 자라 바람 부는 결대로 흔들리는 것이 기괴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게 상당히 넓은 구역 전체에 펼쳐진 광경이라는 점이었다.
[이게 균열 내부라는 걸까? 호네쨩 살구 시포ㅠㅠ]
심장이 뛰었다. 안 좋은 기분이 든다. 판교 균열과 수원 균열지의 차이가 얼마나 될까. 실제 거리와 차이가 없다면 있는 힘껏 날아온 지금 지호는 도플갱어와 퀸 패러사이트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내 여기저기서 제기되어 온 의문이 있었다. 임보현 헌터가 다친 몸으로 균열을 넘어갔을 때, 그는 상당히 크게 다친 상태였다. 균열 경계 저편의 풍경이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다친 몸으로 균열을 건너갈 수 있었을까?
균열과 균열 사이의 거리는 실제 거리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가정을 떠올리자 섬뜩해졌다. 지호는 균열에 진입한 즉시 방벽을 둘렀다.
언제 공격받은 건지 확실치 않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매 순간 방비를 확실히 하는 것밖에 없었다.
따로 지킬 사람이 없으니 방벽을 크게 치는 건 손해다. 지호는 방벽 사이즈를 최대한 줄이다가 몸에 두르는 형태까지 모양새를 바꾸었다. 원형 방벽보다 오히려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갑옷 형태에도 이점은 있다. 예를 들면,
“으억!”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공격에 지호는 약간 휘청였다. 누누이 생각하는데, 그가 하이브리드 계열이 아니었다면 진작 당했을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묵직한 공격에 연이은 공격까지. 신체 계열이 이놈들 기본 규격인가 싶을 정도였다.
등 뒤를 향해 무차별 에너지 화살 난사를 해 댄 지호는 바늘꽂이 신세가 되어 버린 괴물을 보며 안도했다.
과잉 대응이긴 했는데, 지호가 손쉬운 먹잇감일 거라 짐작하고 덤벼드는 괴물들을 역으로 잡아 내기에는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하러 들어온 거였다면 그랬단 이야기다.
차라리 공중에서 훑어볼까?
뭘 찾아야 하는지조차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지호는 감지계 파장을 뻗었다. 사람의 흔적은 적다. 괴물이 간간이 잡혔는데 개중에 아는 것들이 있어 배운 대로 대응하며 이동할 수 있었다.
‘마정석을 회수하면서 돌아다니면 잔소리 좀 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차 아래가 아니라 가로수 위로 올라가 몸을 감추고 거미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지호는 남동구 균열 생각을 했다. 그때도 신체 계열 능력은 발현했었을 테지만, 지호는 그 힘을 고작 물병 멀리 던지기 같은 데나 썼었다.
사람이 없는 판교 균열은 차라리 안심하고 움직이기 좋았다. 누구를 구하는 동안 위험한 괴물과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모르는 괴물이 나오면 몸을 숨기고, 아는 괴물이 나오면 상황을 봐서 사냥하거나 대응 방식대로 회피했다.
사람의 흔적이 없다.
판교 균열로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실은 균열 앞까지만 간다는 뜻이었을까? 김 반장과 이주원 각성자가 숨기고 있는 게 도대체 뭘까. 지호 본인은 왜 거기에서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을까.
균열의 형태와 크기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이쯤이 균열 중심부로구나 하고 짐작하게 되는 위치에 왔을 때였다.
감지 파장을 멀리까지 펼친 채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쪽이 좀 더 빠른 수색이 될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무수히 걸리던 괴물들의 느낌 이외의 것이 잡혔다.
살아 돌아다니는 괴물에서 느껴지는 건 기본적으로 이형 에너지이고, 이형 에너지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괴물들은 보통 순도 낮은 마정석처럼 감지되곤 했다.
이형 에너지 계열 능력이 없는, 순수한 신체 계열 괴물들은 오히려 구분이 어려웠다. 가끔 사람과 헷갈리기도 했기에 접근이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방금 지호의 감각에 걸린 건, 그러니까 ‘사람 형태’의 이형 에너지 능력자다.
각성자일까, 아니면 사람의 형태와 비슷한 괴물일까?
퀸 패러사이트의 숙주 중 하나가 사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 접근이 현명한 것인지 모르겠다. 지호는 병아리즈에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하고 위치 정보를 남겼다.
[최소민 : 저 10분이면 갈 수 있어요. 무모한 짓 말아요.]
[이지호 : 장애물이 많아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위치까지만 접근해 보려고요. 접촉은 안 할게요. 사람일지도 몰라요. 십 분 기다렸다 사라지면 어떻게 해요.]
[강하나 : 결국 확인해 보러 가까이 가겠다는?]
[이지호 : 조금만 더요.]
단톡방이 시끄러워졌다. 지호는 그들의 걱정과 염려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소민에게 경고했다.
[이지호 : 소민 씨 들어오기에는 좀 위험해요. 오면서 만난 괴물 수가 좀 많아요. 헌터들이 다 수원 균열로 파견되어서 이쪽 정리가 늦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습격당했었고, 괴물하고 몇 번 싸웠는데]
[장지윤 : 아니 몇 번을 싸워여? 무모한 짓 안 한다는 사람 다 죽음?]
[이지호 : 아는 것들하고만 상대했어요! 기록 남기느라 관찰 정도는 했는데, 모르는 개체들이 좀 있어요. 이런 것들이 나중에 헌터들에게 도움이 될 거고, 마정석도 좀 모으고…….]
지호는 세 사람 모두에게 혼이 났다. 애초에 균열 단독 진입부터 징계 사유다. 핸드폰을 두드리는 도중 누군가의 감지 파장이 지호의 파장과 겹쳐졌다.
이형 에너지들은 서로를 튕겨 내는 것에 반해 감지 파장은 같은 공간을 함께 훑을 수 있다. 지호는 그 주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우뚝 멈추었다.
뭔가가 있다. 괴물이라면 사냥감을 수색하는 것일 테고, 사람이라면 그 외의 것들을 확인하려는 거겠지.
오는 길에 괴물이 많았다. 그것들을 정리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헌터일 가능성은 적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감지계 능력과 이형 에너지 능력을 갖춘 뭔가가 있다.
지호는 비행을 멈추고 아래로 내려섰다. 생긴 지 이 주가 넘은 균열이라 주변 풍경이 점차 기괴하게 변해 가고 있었고, 건물 옥상엔 끈적한 뭔가가 얇게 펼쳐져 있어 발을 뗄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다.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는 개체들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제대로 찾았다. 균열 중심부에 헌터들이 모여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아직 채 구출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둘 다 아니었다.
본 적 있는 기계들이다. 구조대 방호복과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형 에너지가 감지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감지 파장에 걸렸으니 근처에 있겠지.
일반적인 균열 내부가 그러하듯 주변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지호는 큰 어려움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예상보다 세 배 이상 기사가 떴는데 아직도 정부 움직임은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위치를 잘못 잡았어. 강남을 노렸어야 했다니까. 그래야 나라 단위에서 움직인다고.”
“그으, 반응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 많은 사람이 전부 다…….”
“그럼 판교도 닫아야지.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잖아.”
“그런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쪽은 사람들 대피 거의 끝나서 큰 피해는 없을 거야. 단지 수원 쪽 사람들하고 연락되느냐가 문제고……. 그나저나 거리가 가까운가 봐? 바로 끊어져서 다들 행불 상태 될 줄 알았는데 이따금들 연결되는 걸 보면.”
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람 목숨이 장난인가. 밀려오는 분노에 번개처럼 몸을 일으킨 그는 두 사람 옆으로 지나가는 괴물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지 파장에 잡히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괴물은 그들을 먹이로 인식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지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그럴 수가 있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몸을 움츠리며 괴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으, 이거는 아무리 있어도 적응 안 돼요. 금방이라도 물어뜯으려고 할 것 같네.”
“알아 둬. 초기 균열엔 안 먹혀. 우리 균열 닫고 나서 이 생태계가 진짜 저쪽 상태랑 똑같이 변해 버리면 그때는 우리도 괴물 먹이가 되겠지.”
“아 제발 헌터들 동원 좀 했으면 좋겠어요. 무서워 죽겠네.”
지호는 더 참지 못했다.
숨어 있던 삼 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지호는 먼지구름을 요란하게 일으키며 착지했다. 급작스러운 충격에 상황 파악 못 하고 있던 수상한 두 사람은 오래 지나지 않아 지호를 발견했다.
“헌터?”
“단독 행동……. 그냥 각성자 같은데. 근데 헌터 전투복? 임시 헌터인가?”
그를 경계하거나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지 않는다. 게다가 헌터 계층 기본 구조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호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지금 균열을 닫는다고 했어?”
“어린애잖아.”
“당신네들이 수원에 그 짓을 한 범인이겠지?”
한 사람이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려 했기에 지호는 둘에게 힘을 쏘아 보냈다.
단단히 묶인 둘은 그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뒤집어쓰고 있는 방호복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떤 충동이었을까.
지호는 손짓으로 한 사람의 방호복 헬멧을 벗겼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반말을 찍찍 지껄이며 보현 흉내를 내려던 지호는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어, 그. 알 만큼 아실 나이인 분이 왜 이런 짓을 하고 그러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굴리거나 부라리고 찡그리는 등의 표정을 보면 대답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호는 자기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가하고 있던 염동력을 해제했다. 남의 입을 틀어막고 대답하라고 묻고 있었다니. 초짜나 할 법한 실수였다.
“흠, 이제 말할 수 있죠? 왜 이런 짓을 하죠?”
“애가 이런 위험한 데 오면 안 돼.”
시작부터 대화가 겉돌고 있었다. 지호는 팔짱을 꼈다.
“어른은 이런 짓 해도 되나 봐요?”
지호가 헬멧을 벗긴 쪽이 옆 사람보다 정보를 더 많이 말하던 사람이었다. 피로가 눈가 주름마다 고여 있는 듯한 심약한 인상의 중년 남성은 괴로운 듯 연신 몸을 떨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야.”
“헌경에 신고했어요. 곧 사람들이 올 거예요. 범인 붙잡고 사실을 토해 내게 하는 건 제가 할 일은 아니라서요.”
“다른 헌터들을 불렀단 말이냐?”
친구들 대화방에도 올렸고 헌경에는 이제 신고를 넣을 건데 어느 쪽이 더 빨리 올지 모르겠다. 아마 소민이 이동 능력자니 좀 더 빠를 터였다.
“대답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은데 문답에 별로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네요. 이걸 균열 밖에서 쓰면 균열이 열리고, 안에서 쓰면 닫히는 건가요?”
여전히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지호는 처음으로 보는 온전한 기기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지호가 봤던 것들은 대부분 부서져 있거나 지호 손으로 부쉈던 것들뿐이다. 유일하게 멀쩡했던 것은 찾자마자 연구 팀으로 인계했으니 관찰할 새가 있었을 리 없었다.
마정석 가루를 채우는 필터 같은 것이 겉으로도 관찰됐다. 꽉 차 있고, 반짝인다. 그밖에 지호가 알 수 있는 게 있을 턱이 없다. 지호는 그걸 사진으로 찍은 다음 보고를 올리며 한숨 쉬었다.
왜 하필 판교에서 이 사람들을 잡게 되었을까.
정말로, 김 반장과 이주원 각성자가 이들과 연관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복잡한 고민이 머리를 채우자 두통이 밀려왔다. 지호는 그 기계에서 손을 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염동력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것이 어떻게 봐도 일반인이다.
“왜 균열에 들어와서 이런 짓을 해요? 목숨이 위험하잖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얻으려는 게 뭐죠?”
“너는 몰라.”
“아니 말을 안 해 주니까 모르지!”
“균열 너머에 생존자들이 남아 있어. 그들에게서 계속 연락이 온다고. 구하러 가야 해.”
“아니 지금 당신네들 친구가 그 생존자들의 친구를 더 만들어 준 거 아녜요?”
“그 많은 사람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헌터들은 결국 파견될 거야. 그 애들을 구출할 수 있어.”
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호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약간 물러났다. 함께 잡혀 있던 사람이 빽 소리쳤다.
“헬멧 다시 씌워 줘요! 빨리!”
“어?”
“죽는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