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지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염동력 능력자를 추려 보니 그 수가 고작 넷이다. 지호만큼 능숙하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상과 하늘 양쪽에서 놈들의 시선을 끌 수만 있으면 성공이겠지. 오 팀장은 해당 발언을 받아들이며 팀을 재편성했다.
“너는 나랑 간다.”
주리는 지호를 똑바로 노려보며 지시했다. 팀장에게 요청하지도 않았지만, 오 팀장은 한숨과 함께 주리와 한 팀이던 방벽 담당을 다른 팀으로 돌렸다.
“하늘에서 진입하는 조는 놈들의 사거리를 제대로 확인한다. 다른 인질의 위치를 확인해.”
균열 저편만 아니라면 좋을 텐데. 오 팀장이 삼킨 말은 헌터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세 방향으로 흩어진다. 오십 미터 이상은 떨어지지 않아야 만약의 사태에 빠른 대응이 가능해, 다른 이들의 위치를 잘 파악하며 이동하는 게 중요했다.
[수원역 진입. 생존자 구출 중.]
짤막하게 뜬 메시지가 헌터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이 무자비한 놈들을 잡아 죽여야 하는 임무가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주리는 다른 헌터들보다 무거웠다. 지호는 너덧 명쯤 달고 나는 기분을 느끼며 집중했다.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살피던 주리가 반파된 아파트 단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뭐가 있군.”
아까 지호가 놈들에게 당할 뻔했던 위치 부근이다. 저 안쪽에도 자잘한 괴물들이 숨어 있었다. 정확히는 매복해 있는 느낌이었지만.
“저기까지 들어갔으면 위험했겠어요.”
“잡다한 것 다수보다 너 하나를 택했던 것 같고, 성공했으면 이러고 있지도 못했겠지. 네가 제정신이 아니며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올릴 거다. 일선에서 물러나.”
“그렇게는 못 해요.”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게 하지 마.”
지호는 말을 삼켰다. 지윤이 해 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니도 균열에서 가족을 잃었잖아요.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필사적인지 알잖아요. 남아 있는 사람들 구해야죠. 그러면서 우리도 다치면 안 돼요.”
“너만 아니면 무모한 사람 아무도 없었어.”
“저 아니었으면 그분들 당했어요. 언니도 알잖아요.”
주리는 나직하게 욕을 토하곤 대답하지 않았다. 오 팀장의 지시에 따라 다른 시간에 균열에 진입하기 위해 대기하면서, 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제가 엄청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 근신령 하나 지키자고 거기 있던 사람들 다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옳지 못해요.”
“이래서는 안 됐다고 느끼는 순간이 네 죽음 직전이 아니기만을 바라.”
주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호가 떨어졌다. 세 팀으로 재편성된 공격조가 다시 균열로 진입한다. 안쪽으로 던질 수 있는 것들을 다 던져 대던 괴물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지호는 괴물들에게 늘어진 선으로 퀸의 위치를 파악했다. 북쪽 숙지산 방면이다. 괴물 방어 설비가 잘된 아파트 단지가 있는 쪽.
불쑥 의문이 들었다. 균열 저편은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 균열 내부와 비슷하게, 그들 사는 곳에 괴물들의 생태계가 덧씌워진 모양 그대로일까?
헌터들을 따라 괴물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세 팀으로 나눈 건 잘한 선택이었다. 지호와 주리를 비롯해 하늘에서 나타난 쪽으로 그늘에만 숨어 있던 놈이 붙었다. 이 지능적인 놈들 상대로는 협공보다 일대일이 나았다.
지호는 좌측으로 주리를 휙 젖히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이유로 지호와 주리가 가장 땅에 가까운 위치였고, 괴물은 어김없이 둘을 타깃 삼았다.
“너무 낮은 것 같은데!”
“잘 막아 줘요!”
“이 미친!”
지호가 방벽을 펼 새도 없이 놈이 바닥에서 날아올랐다. 번개 같은 도약이었다. 그늘에서 튀어나올 때도 그랬었다. 주리는 놈을 걷어차 방향을 틀어 버리며 질겁했다.
“엿같이 튼튼해!”
고작 한 번 부딪쳤을 뿐이지만 지호나 주리나 절대 놈과 맞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속도를 발판 삼아 달려드는데 무게마저 어마어마했다. 어떻게 저 속도를 내지? 놈을 세 번 차 낸 주리가 통증을 호소했다.
“다리 부러진 것 같아.”
“제가 할까요?”
“엄살 좀 부렸어. 다물고 위로 올라가. 교대!”
지호가 위로 떠오르자 부근에서 대기하던 다음 염동력자가 불안한 얼굴로 내려왔다. 지호를 노려보던 괴물은 바닥을 팡팡 두드리더니 몸을 수그렸다. 지금요! 하고 외치기 무섭게 놈이 다음 팀과 충돌했다.
지호처럼 버틸 힘이 없었는지 그 염동력 능력자와 파트너는 균열 밖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괴물 쪽에서 헌터를 쳐 냈다. 방금과는 반대였다.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아 유유히 아래에 착지한 괴물은 어깨를 들썩였다. 즐거워 보였다.
“빌어먹을. 다른 놈들 상대가 안 되잖아.”
지호가 출력이 유달리 좋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헌터들이 이렇게까지 못 버틸 줄은 몰랐다. 나머지 셋이 한 번도 버티지 못하고 나동그라지자 주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다리 아픈데, 빌어먹을.”
“제가 한 번 막을게요.”
지호는 허공에 뜬 상태로 방벽을 두껍게 전개했다. 주리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대기하며 다리를 풀었다.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쪽에선 헌터들이 우세했고, 다른 쪽은 쫓기며 균열 경계로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아무튼, 당하는 사람은 없이 팽팽했다.
전조 없이 다시 공격이 몰아닥친다. 지호의 방벽에 날카로운 발톱을 꽂은 상태로 위까지 따라 올라온 괴물은 눈을 얇게 떴다.
반쯤 방벽을 파고든 발을 후려치고 공격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신체 계열 중에서도 상위 등급에 가까운 느낌이다. 날카롭게 세운 이형 에너지 창날 역시 거의 대미지가 없었다.
지호는 발톱 박힌 방벽 두께를 늘렸다. 놈이 팔을 휘두르자 주리가 즉각 대응하려 했고, 지호는 주리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차지 마요!”
“뭐? 아니, 잠깐. 왜 올라가! 야!”
지호는 위로 빠르게 솟아오르며 주리를 옆 팀으로 던졌다. 각기 한 사람씩 붙잡은 채로 떠 있던 헌터들이 소란을 피우며 주리를 붙잡았다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주리는 역시 다른 헌터들보다 많이 무거웠다.
괴물은 언어가 되지 못한 괴성을 내지르며 방벽에서 발톱을 빼내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지호는 방벽 형태를 바꿔 아예 놈의 발톱을 묶어 버렸다. 둥근 구 형태였던 이형 에너지 방벽이 수갑처럼 놈의 앞발을 속박했다. 뒷다리로 지호를 차려고 해도 디딜 곳이 없다. 놈이 버둥거림을 멈추지 않아 지호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위로. 더 위로.
균열은 돔형이기에 지호가 더 위로 올라가려면 수원역 방면으로 이동해야 했다.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는 놈이 없기를 바라며 지호는 최대한 경계에 가까이 붙은 채 비행했다. 왜애액, 하는 괴물의 비명이 아래 놈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반경 약 2km의 균열. 괴물뿐 아니라 지호의 얼굴도 희게 질렸다. 지호는 이렇게까지 높이 비행해 본 적이 없었다. 날 줄 모르는 괴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에 힘을 집중하자 구조대의 푸른 이형 에너지가 어렴풋하게 잡혔다. 방벽을 펼치고 있을 테니 눈에 잘 띌 터.
여기서 놈을 던지면 죽을까? 아니면 살아남아 저 생존자들을 공격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놈이 계속 버둥거리는 탓에 계속 붙들고 있다간 같이 죽을 판이었으므로 지호는 심호흡한 뒤 괴물을 고정하고 있던 이형 에너지 방벽을 없앴다. 짧은 시선의 교차. 괴물의 눈에 공포가 깃드는 것을 보며 지호는 팔을 옆으로 뻗었다.
손날을 따라 얇고 날카로운 에너지체가 형성된다. 더 얇게. 더 날카롭게.
그 형태는 칼날에 가깝다.
지호의 비행은 빨랐고, 손끝은 매서웠다. 놈의 거죽을 긋는데 느껴지는 저항이 어마어마하다. 신체 계열이구나. 지호는 본능적으로 놈의 상태를 파악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빠르고 강하고 무거웠던 거였다.
엉성한 에너지 칼날이 놈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 건 그게 떨어지고 있던 덕분이다. 놈보다 빠르게 내려가 아래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지호가 괴물의 몸과 목을 분리했다.
움직임 없이 추락하는 괴물을 보려 아래를 내려다본 지호는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온몸이 떨리고 힘겨웠으나 해냈다. 추락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했고, 떨어진 괴물의 시체는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모양새로 터져 버렸다. 구역질이 밀려와 고개를 돌린 지호는 멀지 않은 곳에 떠 있는 눈알을 발견했다.
지난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야 했다. 그때의 붉은 시선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방금 죽인 괴물도 그늘 속에 있을 때는 붉은 눈이었던 것 같은데, 염동력 팀에게 달려들 때는 그렇지 않았다.
본래 자리로 돌아온 지호는 당황했다. 분명 셋에서 둘로 줄여 놓았으니 어느 정도는 상대하기 편하리라 생각했던 탓이다. 그러나 헌터들은 지호가 떠나기 전보다 더 만신창이 된 모양새로 치료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죽은 사람은 없다. 다행이었다.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얼굴에 깃든 공포와 두려움이 지호를 불안하게 했다.
아래로 내려선 지호는 황급히 아는 얼굴부터 찾았다. 지호가 돌아오는 걸 보자마자 안도한 얼굴을 슬쩍 비추었던 오 팀장은 강철 같은 태도를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무사했구나. 혹시나 싶어 걱정했다. 잡아간 괴물은?”
“죽였어요. 낙차를 이용해서 공격했더니 그래도……. 어떻게 된 거예요?”
“유인에 실패했다. 퀸은 균열 너머로 들어가 버렸지. 소식을 전했으니 구조 팀이 슬슬 몸을 뺄 거다.”
“하지만 셋에서 둘로 줄었는데…….”
“합류하지 않았던 하나가 더 있었어. 완전히 인간형을 유지하고 있는 놈이었지. 너무 강했어.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고.”
오 팀장은 바닥에 흙먼지 섞인 침을 탁 뱉으며 팔을 내밀었다. 온통 쓸려 엉망이었다. 지호는 서둘러 그 부위를 치료하며 눈썹을 구겼다.
그 영상에 있던 놈일 것이다. 카메라를 껐던 괴물. 퀸의 수하이자 전투복마저 멀쩡하기까지 한 놈. 어쩌면 퀸과 함께 경계 너머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호는 구조 진척도를 확인했다. 다행히 수원역으로 대형 차량을 가지고 들어가 그 인원 전부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수원역 이외 지역은 여전히 위험 구역이다. 그래도 균열 중심부에서 사람을 빼냈으니 나머지는 점차적으로 구조하면…….
투웅. 균열 경계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모두 당황했다. 균열 안정기 후로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을 텐데. 구조 팀으로부터 무전이 울려 댔으나 방해 전파가 섞여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너덜너덜해진 헌터들은 서로 눈을 마주하며 불안한 심정을 나누었다.
경계가 다시 흔들린다. 그때, 저벅 저벅 발소리가 났다. 자신을 드러내려는지 일부러 내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호를 포함한 일부가 균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차림새다.
구형 전투복에 선글라스. 약간 지저분하긴 하지만 먼지 좀 툭툭 털어 내고 나면 멀쩡하게 균열을 걸어 나올 것 같은 모양새의 헌터.
이상하다. 정말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다. 큰 키에 체격 좋은 몸이 평범한 거리 걷듯이 균열 경계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목덜미 뒤편으로 이어진 퀸 패러사이트의 감염체뿐.
경계 코앞까지 다가온 그 헌터는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괴물일 텐데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가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선글라스로도 가리기 어려운 잘생김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디서 봤지? 지호 외에도 많은 헌터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들렸다.
균열 경계 지척까지 걸어와 멈춰 선 그가 입을 연 것과 동시에, 균열 경계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앉아서 쉬던 헌터 전원이 벌떡 일어났다. 균열 경계는 한 번 크게 흔들리더니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경계에 근접했던 퀸 패러사이트의 숙주는 한마디 할 새 없이 자취를 감췄다.
균열이 작아지고 있단 뜻이었다.
그 헌터가 뭐라고 말하려 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말하려 했던 건가 하는 사실까지 의문스럽다. 모습이 변하지 않아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까지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을 차치하고, 균열이 빠르게 줄어든다는 사실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퇴각! 퇴각해! 당장 균열에서 빠져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