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응?”
“치료 팀 장비 관련해서 각성자 연합에 종종 다녀오곤 했는데, 어쩌다 좀 친해졌거든요. 주원 오빠가 그러는데 균열에 휘말리면서 막내는 끝끝내 구조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두 분이 어찌어찌 탈출하고 나서 균열이 닫혔다고.”
주리가 들었다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지윤을 막았을 이야기다. 듣는 이가 없어 지윤은 지호 곁에 앉아 그의 상태를 살피며 안정제 성분을 약간 조절했다.
“손 좀 움직여 봐요. 주먹 쥐어 보고.”
“감각 다 멀쩡한데.”
“왼쪽 눈 깜빡여 봐요. 오른쪽 귓불 움직여 보고. 팔꿈치 핥아 보기.”
“아니 뭘 시키는 거예요?”
지윤은 까르륵 웃으며 치료기를 껐다. 다치지 않은 사람에게 낭비할 에너지는 없었고, 애당초 지호는 다친 상태까진 아니었으니까. 상태 점검이 끝나자 지윤은 지호의 팔다리 구속구를 풀어 주었다.
“우선은 앉아 있어요. 주리 헌터님 걱정하는 건 당연해요. 두 분 동생은 감염됐었나 봐요. 균열 닫힐 때 간신히 경계를 빠져나왔는데 동생분은 그대로 경계를 통과해 나간 모양이더라고요.”
“혹시, 괴물이 된 걸까요?”
“알 수 없죠. 괴물이 되었을지, 살아 있기는 할지……. 주원 오빠는 계속 동생을 찾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헌터가 되어서 다른 균열에 파견되고 남들을 구할 수는 없다고. 동생이 자길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
주리는 지호에게서 그때를 떠올렸을까.
당시에는 정보도 없어 알 수 있는 것이 적었을 것이다. 주리나 주원 역시 그때는 몰랐던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을 거고, 한 사람은 그래서 포기하고 한 사람은 그래서 균열을 헤매는 결과가 나타났겠지.
편협한 경험으로 타인의 감정을 재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지호는 주리의 공격적인 반응을 이해하며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음 조는 선발대의 절반도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고 있었다.
“제가 들어가지 않았대도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알 수 없죠.”
지윤은 덤덤히 사실을 이야기하며 소독된 특수 바늘을 내밀었다. 신체 계열 능력자들의 단점인데, 주삿바늘이 들어가지 않아 보통 방법으로는 채혈할 수 없었다.
지호의 눈에서조차 눈물이 찔끔 나오는 통증이 지나간 뒤, 피가 쭉 빠져나왔다. 적정량은 한 카트리지인데 지윤은 두 개를 채우고는 바늘 찌른 부분을 알코올 솜으로 꾹 눌렀다.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고 싶다면 살아야 해요. 어디 애먼 데다 몸 던져 개죽음당하지 말고.”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입만 살아서는.”
지호는 한 대를 더 맞은 다음 균열을 빠져나오는 진입 팀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저 사람들처럼 어찌어찌 빠져나와 다들 무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행동은 무의미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행히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호가 다른 어느 때보다 집중했고, 감각이 동물처럼 확장되었던 그 순간조차 사실은 괴물의 손아귀 안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좌절하게 했다.
이겨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만화나 영화 같은 걸 보면 늘 그러니까. 의지로 이겨 내고, 노력으로 이겨 내고. 동료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로도 잘 이겨 내지 않던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균열 저편에서 공격조를 짓밟으려는 괴물들에게 거적처럼 걸쳐진 전투복을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입조 보조자 하나가 너무 심하게 넘어져 팔이 온통 쓸리는 통에 지호는 치료기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른 기계를 새로 가동하는 건 에너지가 많이 드는 탓이다.
모두 알다시피 균열에서 다친 상처는 회복이 더디다. 지호처럼 자가 치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턱이 없고, 그나마 살만 벗겨진 게 어디냐며 다친 헌터는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좀 도와도 될까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신경 이상하게 이어서 사고 나면 책임질 거예요?”
“아니, 그, 제 능력은 치유력 자체를 높이는 쪽이니까…….”
“괜히 힘 빼지 마요. 무슨 일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지윤과 다른 치유계 능력자가 부상자를 돌봤다. 지호는 따스하게까지 느껴지는 치유계 능력을 옆에서 쐬며 어느새 멀리까지 이동한 공격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료기를 탑재한 구조대 차량은 현장을 실시간으로 따라다닐 수는 없었다.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 헌터들 부근으로 옮기면 모를까.
그 때문에 그들 사이에 거리가 좀 있었고, 헌터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을 때도 지호는 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경계에 모여 있던 헌터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며 물러났다. 분위기가 이상해 지호는 벌떡 일어났다. 후방 대기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왜…….”
헌터들 사이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지호는 양해를 구하곤 휙 날아올랐다. 그 편이 시야를 확보하기 편했으니.
그러자마자 지호가 본 건, 생각해 본 적 없는 악몽 같은 장면이었다.
인질은 실신 직전이었다.
숨어 있는 생존자를 찾아내는 것이 괴물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등한 지능을 가진 놈이었단 건 진작 알아채고 있었으니.
그러나 놈들이 찾아낸 생존자를 죽이거나 먹지 않고 인질로 붙잡는 건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경악에 빠진 헌터들을 상대로 인질을 불쑥 내민 괴물은 보란 듯이 놈의 머리를 잡았다.
꺾으려는 것 같은 행동이다.
기겁한 헌터들은 균열로 뛰어들 뻔했다. 지호 역시 그랬다. 그러나 오 팀장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멈춰, 새끼들아!”
괴물은 경계 쪽을 바라보며 눈을 굴릴 뿐 행동을 이어 가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인질의 목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다.
오 팀장은 거의 균열에 뛰어들기 직전이었던 헌터 하나를 무력으로 제압해 바닥에 메다꽂은 상태였던지라 낮춘 자세 그대로 으르렁거렸다.
“함정이야. 모르겠냐? 지금 너희들 들어가면 뒤에서 덮쳐 올 거야. 위치를 가늠했고, 우리와 함께 이쪽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나는 패턴도 대략적인 인원도 파악했을 거다. 우리가 놈들을 끌고 온 게 아니야. 놈들이 우릴 끌고 온 거다.”
수원역에서 북서쪽 방면으로 서호 저수지가 있다. 아예 탁 트인 곳이다. 괴물이나 헌터들이나 서로 몸 숨길 곳이 없는 위치. 그쪽에서는 퀸 패러사이트도 사각을 만들 수 없을 테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공격도 적을 터였다.
그 때문에 괴물들을 그쪽으로 몰아가고 있던 헌터들이다. 오 팀장의 말은 헌터들까지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 작전이었어요. 그걸 저놈들이 어떻게 알고…….”
“놈들은 며칠간 이 경계를 비롯해 주변 경계 지역을 탐색했다. 지금 경계를 저렇게 이용하고 있는 것만 해도 봐.”
괴물은 반응 없는 헌터들을 보며 인질의 머리를 쥐었던 손을 내렸다. 눈을 데룩데룩 굴리던 놈은 인질을 질질 끌고 경계로 이동했다.
이 미터를 넘는 괴물이다. 손에 인질을 잡고 휘두르는 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인질을 붙잡고 슬슬 경계 코앞에 다가온 놈은 인질을 앞으로 내밀었다. 괴물의 손은 빛이 되어 사라지지만, 인질은 그렇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쓰러지려는 인질을 받으려고 팔을 내밀던 헌터 하나는 복부에 통증을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보이면 안 될 것이 보였다. 왈칵 쏟아진 피와 내장에 곁에 있던 헌터들이 질겁하며 그를 잡았다. 치유계 헌터가 다 뒤에 있었기에 우선 방벽을 응용해 상처를 틀어막았다.
“균열 안에서 어떻게…….”
공격당한 헌터의 뒤로 그를 꿰뚫은 길쭉한 철근이 굴렀다. 다친 헌터를 치료기 쪽으로 데려가는 동안 헌터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인질로 그들을 유인하고 내부에서 물건을 던진다. 헌터들이 해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작전. 저쪽에서 여길 볼 수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작전을 바꿔야 한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조에게도 전달해야 하고…….
“물러서. 외부에서도 방벽을 유지한다.”
괴물이 경계로 밀어 넣은 인질은 균열과 경계 사이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덜덜 떨며 엎어져만 있었다. 걸을 수가 없는 건지, 그냥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오 팀장은 팀원과 함께 인질에게 접근했다.
경계 부근으로 반 보 더 진입했을 때 다른 위치에서 시멘트 덩어리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즉각 대응해 염동력 능력자들이 그걸 멈춰 세웠으나, 하나가 아니었다.
방벽의 두께가 형편없이 얇아지며 방벽 담당이 거의 고꾸라졌다. 오 팀장은 팀원을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인질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집어 던지며 자신 역시 빠져나왔다.
인질은 무사했다. 이걸 무사하다고 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외적으로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괴물에게 오래 붙잡혀 있었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덜덜 떨며 침을 흘리기만 하는 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상황 보고 올리고 구조 팀 뒤로 빠지라고 해.”
“구조 팀 수원역에 접근했다고 했는데요.”
“젠장, 그럼 상황 보고만 해. 끝내주게 머리 좋은 놈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 있어 시야가 좁았던 것과 반대로 지호는 홀로 공중에 떠 있어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팔 큰 놈이 인질을 휘두르며 헌터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사이 나머지 한 놈이 그늘에 숨은 놈과 함께 인질이 넘어간 방향으로 온갖 것들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헌터들이 그랬던 것과 다르지 않다.
저쪽이 시야 확보가 되었다면 진짜로 위험했을 것이다. 지호는 날카롭게 끝을 갈아 뾰족한 창 같은 철근이 헌터들 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멈춰 세우며 아래로 내려섰다.
코드 레드 개체의 힘일까? 퀸에게 부려지는 수족들이라 똑똑한 것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은 괴물들마저 이렇게 고등한 놈들이면 헌터들이 생존자를 구조하러 들어가는 건 죽으러 가는 것과 매한가지가 될 테니.
퀸에게 조종되는 괴물들은 머리가 좋아진 것일까, 아니면 퀸이 저것들을 조종하기 때문에 똑똑하지만, 연결이 끊기면 곧 다른 놈들처럼 단순한 모양새로 돌아오는 걸까? 지호는 그것들이 물건을 던져 바깥을 탐색하면서도 간혹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내리찍거나 화풀이하는 것을 보며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고 짐작했다. 입이 썼다.
“치료기 추가 구동하고 이 사람 집어넣어. 병원으로 옮겨야 하니까 이동 능력자 파견 요청하고. 진입 팀은 직접 들어가지 말고 대치 상태만 유지한다. 괴물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유인할 방법을 생각해 보자.”
오 팀장이 무거운 음성으로 읊조리며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고작해야 스물 남짓. 그렇게 박박 긁어모았는데도 헌터의 수는 언제나 모자랐다. 이 균열이 닫힐 때쯤 되면 그 수는 또 줄어들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내던져 남들을 구하는 사람보다는 타인을 짓밟고 살아남으려고 뛰어나가는 사람이 더 많으니.
“위쪽에서 진입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