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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84화 (85/260)

84화

그럴 수가 있나? 괴물 중에 붉은 눈을 가진 놈은 드물었다. 심지어 저렇게 명확하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놈은 더 없었다. 어쩌면 지금 다른 정신계 공격을 받는 건 아닐까. 지호는 떨며 외쳤다.

“경계로 돌아와요!”

쓰러진 방벽 담당을 챙긴 헌터들은 필사적으로 경계로 내달렸다. 괴물들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게 정말 절호의 타이밍인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랬다. 뒤늦게 발견했는데 김 반장도 이 팀에 끼어 있었다. 그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안한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헌터들이 경계 부근으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괴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을 피하는 순간 놈들이 달려들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헌터의 감은 잘 맞는다고 했었지. 지호는 자기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손짓만으로 헌터들을 뒤편으로 보내며 방벽 에너지를 회수했다. 이로써 죽을 위험에선 벗어났지만, 여전히 움직일 수 없다.

“이지호, 너 정신 방벽도 없는 게!”

“움직이면 안 돼요! 눈 떼면 날아올 거예요.”

뭐가 날아올지는 모르겠다. 지호는 퀸과 연결된 개체들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못했다. 건물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붉은 눈에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탓이다. 다행히 그쪽은 조용하다. 심지어 다른 헌터들을 공격했던 것처럼 지능적으로 그를 노리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고요에 모두 당황했다. 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공격하지 않지? 균열 저편에서 볼 때 이 붉은 눈은 보이지 않았었다. 이것과 마주할 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공포에 다리가 꺾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한참을 서로 노려보고 있었을까. 괴물의 눈이 얇게 휘어졌다.

마치 웃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얼굴 옆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놈들은 분명 지능 있는 개체다. 심지어 이쪽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 다른 헌터들에겐 무작정 공격을 가했을까? 왜 지호에게는 그러지 않을까? 다른 것들을 마주할 때는 그저 공포만 느껴지는데, 이 붉은 눈 앞에서는 죽음의 감각까지 따라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죽음의 원인이었기 때문에?

이상했다. 당시 지호를 죽음에 몰아넣은 뱀 같은 괴물들은 계양 균열에 나타났던 눈알 괴물과 다르고, 지금 건물 그림자에 숨어 있는 저 빠른 놈과 다르다. 그런데도 지호는 그것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참을 대치하던 놈의 시선이 갑자기 느슨해졌다. 당겨진 실처럼 팽팽하던 긴장이다. 지호는 의문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도 되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을까?

정신 공격에 당한 거면 어떻게 하지.

지호의 마음에 덜컥 불안이 들어찼다. 이 균열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건 애초에 그것 때문이었다. 퀸의 촉수가 지금 그의 목덜미에 꽂혀 있으면? 다른 이들의 영상 자료로 퀸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호위대가 본인이 되어 있으면?

온갖 불안한 생각이 발치부터 들어찼다. 지호는 턱밑까지 넘실거리는 부정적인 감각으로부터 유리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딴생각하다 죽으면 그만치 개죽음이 없을 터.

그런데 고요하다.

모두가 지호를 위해 조용히 있는 걸까? 다 같이 긴장한 채 괴물을 노려보고 있어? 그럴 턱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니면 괴물들이 균열 내부에서 느끼는 고요는 이러한가.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곳에서 퍼석, 뭔가 밟는 소리가 났다.

분명 집중하고 있었으나 그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지호는 붉은 눈의 그림자 속 괴물을 노려보며 동시에 그 주변 풍경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예민해진 청각에 잡힌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괴물들의 존재가 감지돼 솜털을 쭈뼛 서게 했고, 바람 소리가 굉음처럼 밀려왔다.

확장된 시야 저편과 정면을 동시에 보며 지호는 생각했다. 저건 사람인데.

눈을 돌려 조금 더 분명하게 보고 싶었으나 놈과 마주한 시선이 떨어지는 순간 공격이 몰아칠 거란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대신 지호는 곁 시야로 사람 형체를 보이는 정체불명의 이를 흘깃거리며 낮춘 자세 그대로 한 걸음 물러났다.

추적은 없었다.

응시에 집중하느라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뻔했던 지호는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이지호!”

벼락같은 노성이 고요를 찢어발겼다.

뭔가 끊어지는 느낌. 지호는 잠에서 깨어나는 기묘한 감각과 함께 황급히 뛰어올랐다. 뒤늦게 지호를 쫓는 공격이 내리꽂혔으나 지호의 몸은 허공 저편에서 경계를 통과한 다음이다. 몸의 모든 힘을 다리에 쏟아부은 터라 착지하지 못 할 뻔했다.

건물에 그대로 처박힐 뻔한 지호는 기겁한 염동력 능력자들에게 구조됐다. 바닥으로 내려온 지호는 야차의 화신 같은 이주리 헌터의 분노를 맨몸으로 받아야 했다.

“뒈지지 못해 안달 났어? 정신 방벽이 생긴 것도 아닌 새끼가 어딜 기어들어 가, 어? 우리 손에 죽고 싶었어? 소원이면 지금 뒈져!”

서너 명의 헌터들이 달려들어 말렸다. 지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에 모여든 헌터들과 균열 방면을 응시했다. 괴물들 부근에 이상한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잔뜩 널브러진 온갖 것들도.

아. 지호는 짧게 깨달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게 아니었다. 방금 저쪽에 세뇌당할 뻔했던 거다.

날아온 무언가가 퀸과 지호 사이에 연결된 선을 끊었다. 천운이었다. 여전히 발치 부근에 퍼덕이는 것을 짓밟은 김 반장은 창백해진 얼굴로 지호의 머리를 훑었다. 속 울렁거리는 역겨운 감각이 몰려왔으나 이내 빠르게 괜찮아진다.

“이상 없음. 감염 안 됐습니다.”

김 반장의 담담한 보고에 오 팀장은 크게 안도했다.

그러나 지호의 혼란은 여전했다. 언제부터였지? 이것 또한 전조는 없었다. 퀸의 접근도, 괴물의 공격도 없다. 전자는 그럴 수도 있으나 후자는 이상하다. 어쩌면 세뇌 과정에서 외부 충격이 있으면 세뇌가 풀리게 되나? 몸으로 실습하기는 지나치게 위험했으며, 표본을 구할 수도 없다. 아무튼, 그 과정이 삐끗했다가 잃는 건 목숨일 테니.

눈에서 불이 팍 튀었다. 지호는 얼굴이 돌아갈 정도로 강한 충격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얼을 빼고 있었다. 방금 균열에서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후유증일까? 알 수 없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놀라기는 했기에 지호는 뺨에 손을 올렸다.

“정신 안 차려!”

주리는 화내고 있었으나 동시에 울부짖고 있었다. 왜? 이유를 묻기도 전에 오 팀장이 끼어들었다.

“왜 애를 패!”

“균열에서 나오고는 정신 못 차리고 있습니다. 저기서 괴물한테 세뇌된 채로 나왔을 가능성이 있어요.”

“방금 정신계 능력자가 확인했잖아.”

“인간 수준에서 말이죠.”

주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주변에 있던 일부 헌터가 흠칫해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굴려 생각해 봤으니 세뇌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할 만한 게 없었고, 그렇다고 세뇌당한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 팀장은 일단 지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럼 패지 말고 지켜봐야지. 왜 손부터 올라가나?”

“그랬다가 옆 사람이라도 당하면요? 정신이 들었나, 멀쩡한가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때려서 말인가?”

“안 듣고 있었잖아요. 어디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주리, 왜 이래?”

“균열을 나왔으니 당연히 괴물은 아니겠죠. 괴물이 아니겠지만, 만약 그대로 퀸의 수족이 되었으면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언제까지 말할 수 있죠? 이지호 임시 헌터는 절대 현장에 나오면 안 돼요. 언제까지고 요행만 바라는 헌터가 되고 말 겁니다.”

“우선 애 챙겨. 우리끼리 이럴 시간 없으니까. 다음 팀 대기하고 지원조에 사람 요청해.”

“오솔잎 헌터. 당하고 난 다음에는 늦어요.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 한다고요. 팀장 직권으로 쟤를 현장에서 빼요. 적어도 구조 팀으로 돌려 주시든가요.”

오 팀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1세대 헌터이며 2세대인 이주리 헌터보다 당연하게도 현장 경험이 많다. 그러나 모든 헌터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며, 본래는 냉정한 사람이 이런 난리를 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내렸다.

“다음 진입조 앞으로. 방벽 담당 부상으로 열외하여 대기자 투입하고 방벽 보조로 이주리 헌터가 들어간다. 이 임시 헌터 백업 팀에서 빼고 우선 치료기에 집어넣어.”

지호는 자기를 미는 손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손목과 발목에 움직임을 막는 벨트가 채워졌으나 최상위 신체 계열인 지호는 마음만 먹으면 그걸 뜯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한 까닭이고, 본인 역시 자기 상태가 멀쩡한지 걱정되기도 한 탓이었다.

균열에서의 경험은 김 반장이 제공하던 환상보다 더 현실감 있었다. 지호는 자기가 언제 괴물에게 넘어갔는지도 알지 못했고, 주변에 떨어진 것이 분명할 돌이며 집기들도 느끼지 못했다. 감각까지 차단하는 환상이라니. 섬뜩할 정도였다.

지호를 치료기로 데려가는 헌터는 아직 먼지도 채 털어 내지 않은 공격조 헌터 중 하나다.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서영 헌터는 자잘한 상처로 가득한 본인 얼굴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속삭였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도 구하려고 했는데요, 뭐. 제가 좀 빨랐을 뿐이고…….”

“그래서 결국 우리를 구한 건 그 다른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지호는 머쓱하게 웃었다. 요란하게 혼이 나고 난 다음에 듣는 감사 인사라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지만, 잘못도 했고 잘한 일도 있으니 둘 다 받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서영은 대기조에 지호를 맡기곤 다시 진입조로 투입되었다. 처음에 후발대 인원으로 차출되었던 전투 비적합 인원들 역시 다시금 편성되는 걸 보니 상황이 아주 급한 것 같았다.

지호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임시 헌터인 지윤이 친구 상태를 확인하겠다고 자원했다. 치유계 헌터들은 백업 팀 중에서도 할 일이 가장 적었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지호 씨, 괜찮아요?”

지호는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다음 조가 진입하면서 백업 팀도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고, 지호에게 화내던 주리 본인이 균열로 들어가 버려서 당장은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지윤은 치료 파장을 낮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정신계 감응 가능 능력자분 오고 계시다고 연락받았고요.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해요. 정신 방벽 없다면서요. 제정신이에요?”

“눈앞에서 다섯 명이 뭉개지는 걸 구경만 할 순 없잖아요…….”

“그때도 그러더니! 지호 씨 목숨 여러 개예요? 다른 사람들 구하면서 본인이 죽으면 뭐가 돼요!”

“하하하. 죽은 본인들이 다 여기 있네.”

지호는 팔을 찰싹찰싹 때리는 지윤의 손길에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머리가 천천히 맑아졌다. 주변 소리들이 평소처럼 또렷이 들려오자 지호는 그제야 숨을 탁 몰아쉬었다.

혹시나 했다.

혹시 주리 말처럼 잘못된다면, 끔찍한 사태가 일어났을 터였다. 지호는 자기 손으로 벌이게 될지도 모를 지옥을 상상하곤 눈을 감았다.

“이주리 헌터님네 막내도 실종자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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