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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77화 (78/260)

77화

대형 균열이 될 뻔한 걸 막은 것이다. 아마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고, 지호가 파악하지 못한 원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었단 사실이고, 그는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을 구했다는 사실이다.

살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가 죽음으로 남긴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지호는 떨림이 멎은 손을 꽉 쥐며 다시 덕팔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새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호 본인의 영상이다. 주안 공단 CCTV 중 하나를 확보한 모양이었다. 덕팔은 선글라스를 다음 걸로 갈아 끼며 덤덤히 자리를 권했다.

“마침 잘 왔다. 자세한 건 연구 팀으로 넘기면 좀 더 확실히 나오겠지만, 내가 보기에 의심되는 거로 추측되는 부분을 찾았다. 이걸 먼저 봐. 균열 파장과 각성자의 이형 에너지 파장 충돌에 집중해라.”

수원 영상이 느리게 재생됐다. 공간에 금이 가는 모양새가 선으로 긋는 것처럼 천천히 펼쳐진다. 눈에 하도 집중해 시퍼렇게 빛나는 게 금방이라도 뭘 쏘아 낼 것 같은 맹렬한 모양새였다.

덕팔은 그가 본 것과 지호가 보는 것은 다를 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지호가 본 건 덕팔이 어렴풋하게 잡아낸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흐름이었다.

두 영상 모두 균열의 시작이 찍혀 있다. 그런데 수원 균열의 파장이 훨씬 더 빠르고 세차게 뻗어져 나왔다. 본디 균열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 자체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지호는 정말 운이 좋았다. 만약 그가 수원 균열과 비슷한 것에 휘말렸다면? 주안 공단 균열처럼 조그마한 사이즈가 아니라, 대형도 아니고 중형만 되는 크기의 균열이었다 해도 지호 역시 위험했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차이도 있었다. 죽은 각성자는 일반 각성자 교육만 받고 빨간 명찰로 해당 센터를 수료한 사람이다. 능력 자체도 전투에 적합하지 않고, 수치도 유의미하게 강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작은 힘으로도 균열을 막으려 했다.

지호는 치밀어 오르는 존경과 가슴을 울리는 슬픔을 억눌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겁에 질렸던 마지막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앞으로도 종종 떠오를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엔 여기서 느껴지는 충돌의 크기 자체가 다른 것 같아. 네 상황은 1톤 트럭 정도와의 충돌이었다면 이쪽은 기차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어.”

“그렇네요. 큰 균열이라면 막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겠어요.”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람 때문에 대화가 어려웠다. 덕팔은 연락들을 확인하며 인상을 잠시 찡그리곤 영상을 껐다.

“이상의 정보를 연구 팀 쪽으로 보내마. 가서 쉬는 게 좋겠다. 균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다. 근신 대상자. 너 같은 헌터들이 1세대에 차고도 넘쳤었어. 지금 다 어디 있는 줄 알아?”

덕팔은 조용히 위쪽을 가리킨 다음 나직이 경고했다.

“아니다. 이대로 보내면 그쪽을 기웃거리겠지? 심부름이나 좀 해라. 협회로 돌아갈 테지?”

“그, 하지만 균열이…….”

“네가 가서 뭘 할 수 있는데? 기초 구조 작업? 이동 능력자라도 되나? 아니면 염동력에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날아가는 속도가 비행기급으로 빨라?”

지금 당장 수원으로 날아간대도 큰 도움은 안 될 것이다. 지호는 시무룩해졌다. 덕팔은 약간 말투를 누그러뜨렸으나 끝끝내 뽁뽁이로 돌돌 말린 물건 하나를 건넸다.

“허튼 생각 말고 협회로 돌아가. 차라리 거기 가서 연구 작업에 네 직감을 보태는 편이 낫다. 쓸데없는 영웅심으로 너를 깎아 먹지 말고. 알고 있잖냐, 임시 헌터니까. 균열에 들어가는 건 결국 너를 상하게 해. 사냥도 아닌 구조 작업이라면 시간이 몇 배로 들지. 네가 헌터가 되길 택했으니 어떤 쪽을 택해도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필요는 없단 말이야.”

지호는 동의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저씨도 헌터로 일했었잖아요. 사람들을 구했었잖아요. 저렇게 균열이 터지고 다들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걸 보면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어. 내가 가서 돌 몇 개 나르고 짐 몇 개 치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 나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오히려 도움돼.”

“어떻게 그렇게…….”

“나는 1세대 헌터고, 너보다 훨씬 많은 균열을 봐 왔다. 그런 것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뛰어다니던 놈들을 모두 잃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냐? 누가 그렇게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남을 위해 몇 번이고 뛰어드느냔 말이야.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겠냐? 죽은 사람들? 말 없는 그 사람들?”

덕팔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어 갔다. 지호는 그의 말에 이성적으로는 동의했으나 심적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사리면 누가 저 사람들을 구해요!”

“못 구해. 네가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당장 빠져나와.”

“어떻게 그런…….”

“나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해야 해! 너 같은 놈들이 자기 몸 내던져 추풍낙엽처럼 죽어 가는 꼴을 더 보기 싫으니까!”

“죽으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뭐가 다르냐? 헌터들은 다 죽으러 뛰어드는 놈들뿐인데! 아니라고 말해 봐라. 네가 하려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해 봐!”

“그렇게 해서라도 누군갈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옳잖아요!”

“그렇게 해서 네가 죽을 수 있는데 뭐가 옳다는 말이야!”

둘 다 서로를 노려보는 정도가 지나쳐 눈에 이형 에너지가 일렁거린다. 감지계 선글라스를 쓴 덕팔 역시 알고 있을 것이고, 지호 역시도 보고 있었다.

감지계 특화 능력자인 차나연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고순도 이형 에너지. 저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돕는 지호를 손가락질한다. 열불이 나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지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쾅 닫고 나가며 분노를 표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요새 종종 그러하듯,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문은 종잇장처럼 우득 떨어져 나왔고, 둘의 목소리가 너무 큰 탓에 무슨 일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문 앞에 모여든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다시 닫을 문도 없었다.

분노가 푸시시 식는다. 그러나 당혹감 때문이지, 덕팔에게 화가 풀린 건 아니었다. 그걸 손에 들고 어쩔 줄 모르던 지호를 구해 준 건 선경이었다.

“둘 다 좀 닥쳐.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든가. 건물 사람들 다 들으라고 쩌렁쩌렁 뭣들 하는 거냐?”

선경이 나타나기 무섭게 구경꾼들이 흩어졌다. 바퀴벌레보다 잽싼 움직임이었다. 심지어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일조차 없었다. 서릿발이 날리다 못해 이쪽에만 겨울이 온 듯한 느낌에 지호는 문짝을 잡은 그대로 할 말을 골라야 했다.

“바빠 보이더니 여기서 핏대 높여 가며 전직 헌터랑 싸울 시간은 있었나 보지?”

“아니 전…….”

“그거 내려놓고 우선 나와. 사방에 방해된다.”

“예…….”

선경의 명령조는 차라리 익숙한 쪽에 가깝다. 훈련받을 때 리더의 명령을 듣도록, 지시에 따르도록 구르기도 하니까. 그리고 지호 주변에 유독 명령조로 말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았다. 김 반장이며 이주리 헌터며 교육 들어갈 때면 누구보다 무서워지는 박순자 헌터나 가끔 박 팀장도 그럴 때가 있었으니.

심지어 덕팔 역시 조용해졌다. 그는 어린애와 목소리 높여 가며 싸웠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진 듯 헛기침하며 말을 골랐다.

“임보현이 왜 얘를 설득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일 터지면 제일 먼저 죽을 것 같아.”

“남의 선택에 왈가왈부 말고 할 일이나 해라.”

덕팔은 찌그러진 문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지호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으나 그 이상 뭐라고 말하진 않았다. 도제 중 이형 에너지 능력자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문을 받아 들었다. 형태가 천천히 변하며 모양이 갖추어지는 걸 본 지호는 그제야 슬그머니 손을 뗐다.

선경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큰 여자. 표정마저 싸늘하자 여기에만 겨울이 온 것 같다.

“도움을 청하러 온 거냐, 깽판을 치러 온 거냐?”

“죄송합니다…….”

“영상 분석은?”

“저분이 균열 파장과 이형 에너지의 충돌 정도가 차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셨어요. 나머지는 연구 팀에 가져가 보려고요.”

“수원 균열에는 가지 마.”

“아까 들었는데…….”

“정신 방벽이 없잖아. 그렇지?”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금세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기 때문이다. 화면을 보자마자 뜨는 건 균열 어플에서 보낸 알림들.

코드 레드 개체 출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원역 부근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다른 곳들도 그렇지만, 사람도 촬영 팀도 많았던 수원역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출현 장소는 역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다.

“균열이 안정되어도 너는 접근하지 마라. 김동주의 정신 공격을 확실하게 방어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정도까지 올라가든가.”

“다른 건 쓸수록 천천히 실력이 는다는 걸 알겠어요. 하지만 정신 방벽은…….”

“재능이 없는 분야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더더욱 가면 안 된다. 다른 일들을 해. 각성자가 필요한 곳은 수두룩하니까.”

선경은 코드 레드 알림이 뜨자마자 이쪽으로 온 걸까? 단순히 지호에게 균열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러 온 사람 같진 않았다.

보현이 지호 이야기를 누구에게 어디까지 했을까. 보현의 인간관계를 추측하는 건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각성자 연합 사람들이 지호 이야기를 약간 정도씩은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애당초 보현은 헌터가 아니고, 이쪽 소속이니까.

“저, 음, 시끄럽게 한 거 죄송해요. 이만 가 볼게요. 균열에도 안 가고…….”

“덕팔이가 말은 거칠게 해도 임보현하고 제일 죽 잘 맞는 친구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 마. 쟤는 그냥 어린애가 헌터 일 한다는 게 싫은 거니까. 네 의사가 어떻건 간에, 애를 그런 일에 밀어 넣는 사회가 싫은 거고.”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지호 역시 자기보다 훨씬 어린, 예를 들면 샛별이 같은 어린애들이 각성해서는 균열에 들어가겠다고 하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으니까.

“알아요.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죠. 처한 환경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니까요. 그래도 저는 헌터가 되기로 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는 순간이 온다면 언제든 그만둬라. 바로 당장 오늘 저녁에 생각해 보니 안 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어도 놀리거나 비아냥거리지 않고 받아 줄 테니까. 너 정도의 재원은 특히들 환영할 거고.”

“가 볼게요.”

헌터 일을 하다가 업계를 떠난 사람들이나, 애당초 균열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 헌터가 되지 않은 사람들.

그 두려움을 이해하면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진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지호는 그냥 고개만 꾸벅 숙이곤 서둘러 건물을 나왔다.

인사하는 그 순간까지 절대 수원 균열에 접근하지 말란 이야기를 뒤로하고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보현이 깨어 있었다면 코드 레드 개체가 뭔지 먼저 확인했을 테고, 퀸이라면 들어가려고 했겠지.

헌터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퀸의 이름 앞에서는 그 대전제를 당당히 어기면서 행동하는 보현이 있다. 왜일까? 한때 여러 헌터들과 팀을 이루었던 보현인데, 왜 퀸 패러사이트의 이름 앞에서는 그토록 무모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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