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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76화 (77/260)

76화

“그럼, 내가 알지 네가 알겠나? 임보현네 꼬맹이. 데이터베이스 업데이트나 좀 해라. 구조 직후 사진이 프로필에 올라와 있으면 어떻게 하냐.”

덕팔은 선글라스 옆면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벽면에 그가 보고 있던 화면이 출력됐다. 지금보다 훨씬 겁 많고 두려움 가득하던 시절 사진이다. 각성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고 헌터가 되겠다는 결심도 없었을 때.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이 슬프지 않다는 사실로 하루하루 마음이 괴롭던 날에 찍혔던 어떤 사진.

“영상이 내 쪽으로 왔는데? 어차피 여기에 와 있는 이상 나한테 의뢰하러 올 거란 사실을 짐작하긴 했을 거다. 이왕 온 거 같이 분석이나 하자. 경험이란 중요한 법이니까.”

“저도요? 어, 저는 보고 분석하는 건 소질이 없는데…….”

“쓸수록 느는 거야. 어떤 식으로 힘을 발달시킬지는 네가 어떻게 능력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른 거다. 완전히 소질 적성이 없는 분야가 아니라면 무엇이건 개발해서 능력을 높일 수 있어. 계속해서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교육 담당이 말하지 않았나?”

숨 쉬는 것처럼 능력을 쓰는 훈련을 받긴 했다. 차나연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어도 방벽을 유지할 수 있을 침착함과 항상성을 요구했었고, 이주리는 신체 능력자라 쓸 수 있는 묵직한 공격들과 평범한 공격을 섞어 쓰는 종류의 속임수를 요구했다. 김 반장이야 언제나 지호를 무너뜨렸지만, 다른 사람들 훈련에는 대체로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자기만의 방식이 효과적이었다고 가르쳐 줬던 것이며, 지호 역시 그 빠른 길을 쫓기만 했다. 따르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은 할 시간이 없었다.

“능력을 쓸수록 강해진다는 건 옛날에 언니한테 들었던 것 같아요.”

“자기 힘에 익숙해질수록 잊게 되는 부분이지. 헌터들보다 각성자가 더 많이 한계점에 부딪히며 자기 능력을 확장해. 왜인 줄 아나?”

“어, 목숨이 위험하지 않으니까 따로 힘을 남겨 두지 않아도 되어서요?”

“나쁘지 않은 추론이지만, 그것보다는 납품일에 맞춰야 하니까. 마감은 언제나 무서운 법이야. 돈 냈으니 빨리빨리를 외치는 놈들도 그렇고. 균열은 항상 열리는 게 아니지만, 마감은 항상 있거든.”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덕팔은 몇 번씩 손목을 확인했다. 메시지, 전화, 메일, 그밖에도 많은 소식이 꾸준히 넘어오고 있었다. 헌터들만 접근할 수 있는 것들도 더러 있다. 어쩌다 보니 옆에서 그걸 다 쳐다보고 있던 지호는 뒤늦게 자기 행동을 깨닫고 얼른 물러났다.

“됐다. 봐도 되는 거니까.”

“어, 왜 아저씨한테 이런 소식들이 올라오나요? 혹시 높으신 분이신지…….”

“죽기 싫은 친구들의 애타는 구애지. 안 그래도 오늘 완성된 물건이 있는데, 온 김에 테스트 좀 해라.”

“예?”

“균열 확장기에 신체 계열 능력자들이 마정석 도구를 가지고 경계를 오간 기록이 있다.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아야겠어. 아니면 살아 있는 게 아니라서 허용된 건지……. 본래 같으면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겠지만, 일반적으로 균열이 터지면 휘말린 피해자들이 있는 법이라 거기서 함부로 실험하기는 어렵지. 검단에 일반 균열 열리고 그쪽에 사람들 다 대피하는 거 확인되고 나면 여태 모은 자료로 그쪽에서 실험이 이어질 거다.”

“아.”

“그때까지는 수원 균열 같은 상황이 두 번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덕팔은 부품 더미인 줄 알았던 상자 한쪽을 뒤적여 선글라스를 꺼냈다. 지호가 가진 선글라스는 기성품에 가깝다. 용도가 있다면 실내에서 감지계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형 에너지 방벽을 두르고 있는 괴물을 식별할 수 있는 정도.

실내 청소부나 그림자 호랑이 같은 투명한 놈들과 싸울 때 감지 파장과 이형 에너지를 병행해 사용하지 않아도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물건이었다.

“제 거 따로 있어요. 저는 감지계라 다른 건 딱히 필요 없고 투명한 것들 볼 수 있게…….”

“써 봐.”

덕팔이 주르륵 꺼내 펼치는 선글라스들을 보며 지호는 말을 줄였다. 하나가 아니었구나. 그가 하나씩 시착할 때마다 덕팔은 한마디씩 보탰다.

“그건 신체 계열 능력자 이외의 각성자를 보면 색이 변하도록 개량된 것. 이형 에너지의 흔적이 남은 거라면 다 가능해. 루미놀 반응과 비슷한 건데 이건 말하자면 잔류 이형 에너지에 반응하는 거라서…….”

“원리를 자세하게 알려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음, 그렇지. 이번에 특이한 코드 레드 개체가 새로 나타났단 소식을 듣자마자 개발에 착수했던 건데, 요전에 강남 균열에서 잡은 놈한테 얻은 자료로 만든 거야. 그쪽은 빌딩 숲을 뛰어다니는 특이한 놈이 있었는데, 유리의 형질을…….”

성 팀장과 같은 과다. 분명하다. 지호는 덕팔이 늘어놓는 정보들을 들으며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명은도 가끔 이럴 때가 있는데, 그래도 명은은 지호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단 걸 알아채면 금방 이야길 그만두곤 했다.

그러나 덕팔은 그러지 않았다. 무수한 도제와 손님,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 거느리고 있는 실력자란 그런 법이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그들을 배려할 이유도 없는 높은 사람들.

덕팔은 어린 지호가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그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친절을 베풀 정도로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작업물의 피드백을 원하는 열렬한 연구자이기도 했다.

지호는 각성자 연합에 보현을 끼고 들어온 덕에 명은이나 덕팔, 선경을 독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몰랐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만큼은 잘 알게 되었다.

“저, 아까 온 영상 먼저 보면 안 될까요?”

“아.”

이 사람들은 집중해 버리면 정도를 모른다. 지호는 덕팔이 일곱 번째 선글라스를 내려놓는 것을 보며 식은땀을 훔쳤다.

하나당 용도 설명 한참, 관련된 괴물 설명 한참, 주요 사용자가 될 헌터에 관한 이야기나 이전 개량 버전 사용에서 아쉬운 점 같은 것들이 줄줄 흘러나와 몇 개 더 있었으면 오늘 집에 갈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을 발명품들.

덕팔은 아쉬운 기색 역력한 얼굴로 전송받은 영상을 벽 한쪽에 재생했다. 차량 블랙박스를 어떻게 구했는지 비스듬한 화면에 소리도 노이즈가 많이 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장면은 잘 잡혔다. 도망치던 각성자의 마지막까지.

“이거 쓰고 봐라. 넌 감지계니까 추가 기능이 필요하진 않을 거고.”

한 번 본 장면이었으나 두 번을 봐도 속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덕팔은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바꿔 영상을 재생했다.

몇 번이고 이름 모를 각성자의 죽음을 보며 지호는 자기도 모르게 정신 방벽을 두껍게 세웠다. 모두를 위해 봐야 해. 분석해야 해. 어떤 것이 다른지 알아야 해.

그러나 생각과 달리 굳게 마음먹기 힘들었다. 자꾸만 눈을 돌리게 되고, 분석은커녕 손발이 덜덜 떨렸다. 지호는 화면을 본 시간보다 바닥을 본 시간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눈을 들기 어려웠다.

저 사람은 왜?

그런 의문이 머리를 가득 메운 채 생각이 진행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일상적인 풍경이 너무 이상했다.

지금도 어딘가에 균열이 열려 있고, 사람들은 죽어 가고, 그런 비일상을 일상 한편으로 받아들인 이들의 발걸음은 저렇게도 바쁜데.

“그만 보고 나가 있어라. 방해되니까.”

“제가, 보는 게…….”

“집중 안 돼서 방해돼.”

덕팔은 큼직한 손으로 지호를 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컸지만, 그의 태도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건 걱정스레 찡그려진 눈썹과 어쩔 수 없이 일그러지는 얼굴, 숨기지 못하는 걱정 섞인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덕팔의 방을 나와 도제들이 있는 곳을 지나자 사람들 많이 모인 복도가 보였다. 복잡한 부평 지하상가와 근처 건물들을 이리저리 개조해 만든 공간이라 길 찾는 게 굉장히 어려웠는데, 중간에 있는 분수대 쪽 커다란 TV 아래에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뉴스는 내내 수원 균열을 비추었다. 지호는 바로 전에 몇 번이고 보았던 죽음이 생각나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아는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본래는 대형 균열이 될 만한 에너지 폭발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균열 경계가 폭발하던 순간에 측정된 계측 정보가 정확하다면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균열은 일반 크깁니다. 어, 구조 작업에 방해되니 저기 방송 차량 좀 뒤로 빼라고 하세요.

리포터는 당황해 카메라 쪽으로 손짓했다. 차량이 움직이기 무섭게 구조대 차량이 틈새로 달려오는 것이 카메라에 잡혔다.

아직 균열 열리고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시기.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구경꾼들은 일정 거리를 지켰다.

-수원역은 균열이 자주 열리는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대균열 이래로 벌써 다섯 번이나 균열에 휘말렸습니다. 한 번 균열이 열린 자리는 몇 번이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어요. 그 점 명심하고 균열 경보에 항시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럼 균열이 열린 곳들은 땅값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양 박사의 경멸하는 눈초리가 리포터를 훑었다. 그는 얼굴로 상대를 비난하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덧붙여 급성 균열이라고는 확인되었지만, 만일의 경우 악성 균열일 가능성이 있으니 보고 계신 분들은 몇백 미터 더 물러나시는 게 좋습니다. 사실은 근처에 안 계시는 편이 목숨엔 좀 더 이롭죠. 최악의 악성 균열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우리 모두 대구의 예시를 통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양 박사는 구경꾼들에게 그렇게 말을 던지곤 다른 헌터들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바쁜 와중에도 그에게 관련 자료를 넘기는 헌터들의 뒷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정확히는 발치가 잡혔다고 해야 옳다. 화면은 헌터들의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카메라맨이 균열 방향에 서 있어,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방송에 헌터가 대놓고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지금까지 균열학의 저명한 권위자 양솔 박사였습니다. 현재 균열의 속성이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니 부근에 계신 시민 여러분께서는 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좀 더 먼 대피소를 찾으시고, 혹여 예기치 못한 재난에 휘말리시면 최대한 빨리 실내로 들어가 재난 시 행동 요령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수원 균열 앞에서 전해 드렸습니다.

양 박사가 왜 저기에 있나.

사소한 의문은 화면 뒤편으로 휙휙 지나가는 아는 헌터들로 해결되었다. 다들 벌써 출동했구나. 균열 열리자마자 뛰어나갔으면 수원에 도착할 때도 되었다.

덜덜 떨리던 몸의 진동이 멎은 건 뉴스를 본 다음이었다. 지호는 천천히 자기 상태를 파악했다.

양 박사가 한 이야기 덕분일 것이다.

그 각성자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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