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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75화 (76/260)

75화

-진짜요? 미쳤다. 진짜요?

“미친 건 알아요. 영상 자료 확보할 수 있을까요? 지금 부평 각성자 연합에 와 있어요. 이쪽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했었…….”

-왜요! 왜 우리 팀 놔두고!

“균열 열려서 곧 바빠지실 거 알아요.”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긴 숨소리가 후욱 소리를 채웠다.

-그렇긴 해요. 그렇긴 하지만……. 알겠어요. 확보하는 대로 보낼게요. 근데 근신 중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거기에…….

“빨리 찾아서 보내 주세요! 그럼, 이만!”

지호는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여기 오는 것도 안 된다고 할 줄이야. 뉴스 보고 수원에 안 달려간 것만 해도 스스로 아주 잘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통화를 마치고 다시 선경의 방에 들어온 지호는 움찔했다. 손목에 채우는 팔찌 형태의 물건이 책상 위에 보란 듯이 놓여진 까닭이었다.

“그게 뭐예요?”

“방어구……. 라고 부르더라. 젊은 애들은 게임 좋아하잖아. 이런 거 분류하기도 좋아하지. 굳이 용도를 따지자면 균열에 들어가서 이형 에너지에 몸이 부식되잖아. 그 속도를 늦춰 주는…….”

“부식이요?”

“오래 있을수록 점점 약해지니까 난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정확한 용어가 있는 건 아니야. 연구하는 애들이 알아서 붙이겠지. 신체 계열들은 좀 버티지만, 나머지는 점점 쇠약해져. 몸을 이루는 분자 구조가 흩어진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보현이 같이 열성적으로 균열에 뛰어드는 삶을 살았던 1세대들일수록 그런 상황을 많이들 겪었지.”

“언니는 그런 말은…….”

비슷한 말을 했나?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갈수록 아쉬웠다. 선경은 팔찌를 수갑처럼 지호 손목에 철컥 채웠다. 아닌 게 아니라 무게나 착용감은 거의 수갑 못지않았다.

“꼬맹이는 이제 막 헌터가 되었다지? 우리 애들처럼 다 늦어서 젊을 때 잘할걸, 하고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예방해라. 예방이 최고야.”

“예? 어, 예…….”

“자료 받는 대로 덕팔이한테 가 봐. 이걸 제외하고 감지계 도구 대부분은 걔 작품이니까. 나도 마정석 순도 맞춰 필터 가공하는 작업 외엔 크게 손 안 댔고.”

지호는 그 구수한 느낌 나는 이름을 머리에 새기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팔이요. 알겠어요. 어디로 가야 해요?”

“나가서 아무나 잡고 덕팔이한테 데려다달라고 하면 도와줄 거다. 외부 손님들 다니는 통로에서 애먼 핸드폰 부숴 먹지 말고 도제들한테 물어봐.”

희끗한 머리에 피로한 안색. 오래 잡고 이야기를 듣기는 미안할 정도로 얼굴이 좋지 않았다. 지호는 그 사실을 진작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마저 느끼며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곤 선경의 방을 나왔다.

도제들은 ‘덕팔이가 누구예요?’하는 지호의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일반인 사용품 제작부.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글씨는 손으로 직접 적어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입구엔 도제가 얼마 없다 못해 한 사람도 없었다. 덕팔이란 사람 혹시 왕따인가? 감지계 도구를 제작한다고 했으니 부근에 방해될 만한 사람을 들이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눈에 익은 마정석 도구들이 벽에 보란 듯이 진열되어 있어 당황스럽다. 선경의 방과는 달랐다. 이쪽은 복도에서부터 남달랐으니.

한가로이 감상할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지호는 거의 한달음에 복도를 가로질러 문을 두드렸다. 사실 노크보다는 재산 압류하러 온 조폭의 항의에 가까운 소리였다.

“저기요! 여기 덕팔이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뭐?”

“덕팔이가 여기에…….”

문은 금방 열렸다. 고개를 내민 건 험악하게 생긴 남자였다. 선경이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라면 이쪽은 꼭 험한 뒷 일 하는 분들이나 가질 법한, 사나운 인상으로는 어디 가서 안 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고 할까.

기세에 밀려 약간 머뭇거린 지호는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기, 덕팔이란 사람을 찾는데요…….”

“헌터요?”

“예? 아, 네. 맞아요.”

“2세대? 아니, 1세대쯤 되나?”

시기별 헌터가 된 세대 구분으로라면 지호는 요즘 세대 헌터니 고작해야 4세대다. 왜 세대 확인을 할까. 혹시 각성 시기별로 사용 도구가 다른가? 지호가 머뭇거리자 남자는 험악했던 얼굴을 더더욱 험악하게 구겼다.

“어린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잇살 먹은 헌터 나리가 아니고 그냥 어린애였나?”

“저, 그게, 선경이란 분이 여기 가서 덕팔이란 사람을 찾으라고 해서…….”

“왜?”

“필요한 게……. 저기, 그게…….”

지호는 거의 협박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생각해 보면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

문득 지호는 익숙하던 어떤 순간들을 생각했다. 일상과 비일상을 요란하게 찢어 버리던 김 반장의 공격 같은 것들.

지호는 두텁고 단단한 장벽을 상상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눈 뜬 지호 앞에 있는 건 날건달 저리 가라 할 험악한 아저씨가 아니었다. 지호 못지않게 선량한 얼굴에 체격만 커다란 사람이 서 있었다.

“이런, 정신 방벽이 있구나.”

그는 황급히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러나 지호가 느끼던 압박과 두려움은 살그머니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인상 좋은 사람이었다. 숨기고 있었을 뿐.

“왜 얼굴을 바꿔요?”

“그래야 인생이 편해. 근데 진짜 왜 왔니? 모르는 얼굴인데. 누나가 아무나 보내진 않을 테니 관련자 같긴 한데…….”

“아저씨가 덕팔이에요?”

“그래. 내가 덕팔이다.”

지호는 부끄러움에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선경의 태도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좀 어린앤가 보다, 생각했던 것 같았다. 물론 어리긴 어리겠지. 누나라고 부르니까. 하지만 그게 지호 본인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매사 조심해야지. 지호는 몇 번을 사과한 다음에야 용건을 꺼냈다. 그가 선경에게 설명했던 이야기를 들은 덕팔은 턱을 문지르며 고심했다.

“일단 누나 말대로 비교하려면 자료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건 자료 얻은 다음에나 할 이야기고, 그것보다 뭐라고? 이형 에너지 충돌로 균열 확장을 막아?”

선글라스 때문에 어떤 눈빛인지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성 팀장과 비슷한 얼굴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복도에 즐비한 발명품들을 봤을 때 눈치챘어야 했나. 이 사람 뼛속까지 연구자다.

영상 자료가 없었기에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가며 어떤 식으로 에너지가 부딪치고, 어떻게 흐름을 흘려 보냈고, 어떻게 균열과 맨몸으로 충돌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던 덕팔은 갑자기 말을 중단시켰다.

“잠시만. 오늘 수원에서 죽은 각성자 정보 좀 보여 줘.”

지호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 명은이 사용했던 그 프로그램이다. 덕팔이 끼고 있는 기계를 통해 소리가 들리고, 또 그가 낀 선글라스를 통해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지호가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신체 능력자인 데다 이형 에너지의 순간적인 번뜩임을 감지할 수 있어 파악했다. 그는 짧게 고민하더니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

정말 선량하기 그지없는 눈이다. 맹인 안내견의 유순한 눈꼬리를 닮았다.

“자료 받으면 바로 나한테 전송해 줘. 그것보다 너, 우선 들어와서 앉아 봐.”

지호는 시키는 대로 했다. 덩치 산 만한 남자긴 해도 힘으로건 능력으로건 지호를 압도할 사람을 본 일이 없어 크게 나쁜 상황들을 걱정하진 않았다.

덕팔의 방은 온갖 부품들로 가득했다. 전시실 같은 선경의 방과는 전혀 달랐다. 명은의 방 역시 이런 느낌이긴 했는데, 좀 더 정돈된 느낌이다. 조금 전까지 뭘 만들고 있었는지 정제하고 남은 마정석 가루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여기에 있는 것이 당연한 물건이라 지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공사장이나 폐가에 한 줌 놓여 있으면 이상하기 짝이 없지만, 여기가 아니면 또 어디에 있어야 자연스러울까.

지호에게 앉을 의자를 내민 덕팔은 책상 밑 냉장고에서 마실 것과 먹을 것도 주섬주섬 꺼내 올려놓았다.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본 지호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이건 무슨 실험 같은 건가요?”

“먹기나 해. 안색 엄청 안 좋다.”

정신 안정 효과가 있는 개발품인가, 하고 한 입 크기로 잘린 카스텔라를 입에 넣은 지호는 사르르 녹는 달콤함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뒤에 고심했다. 뭐라고 감상을 말해야 하나?

“이것도 마셔.”

평범한 우유같이 생긴 흰 액체를 한 모금 마신 지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우유 같은데.

“좋아. 그거 다 먹고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 협회에서 자료 보내 주는 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사고가 터지긴 했지만, 원래 과학 팀이니 연구 팀이니 하는 놈들은 현장에 재깍 출동 안 하거든.”

“무슨 특수한 재료가 들어간 음식 같은 거 아니었어요?”

“모르는 어린애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하란 말이냐? 그런 용도의 모르모트는 밖에 많아.”

아마도 덕팔의 도제였을 지호의 길 안내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호는 영문을 모른 채 그럼 이걸 왜 준 거냐고 물었고, 덕팔은 콧김을 뿜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런 장면을 직접 봤잖냐. 그러고도 어떻게든 뭐라도 해 보겠다고 여기까지 뛰어오고. 어린애가 그렇게 살면 안 돼. 아무리 이런 세상이 되었다지만, 애들까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괜찮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아등바등하는 거란 말이야.”

“저는 헌터니까…….”

“괜찮다고 하지 마라. 안 그래도 괜찮으니까. 누가 괜찮을 수 있겠니? 매번 그런 상황들 처리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서 정신과 다니는 판국인데.”

덕팔은 카스텔라를 큼직하게 잘라 지호 앞에 내밀었다. 괜찮다고 사양하기도 어려웠다. 애초에 방 안에 들어오라고 했던 것 자체가 쉬게 하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는지, 그는 무릎 담요나 코코아 같은 것들은 어떤지 묻기까지 했다

지호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으나 덕팔이 그 이상의 것을 주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걸 보며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보현이 하곤 했던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헌터 된 지호를 걱정하는 것도, 그 걱정이 온전히 걱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진심으로 타인을 위로하려 하는 것도. 그리고 헌터 자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조차도.

기묘한 그리움에 코끝이 찡해져 지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보현이 깨어나지 않은 동안에도 삶은 흘러가, 지호는 임시 교육을 거의 다 수료했으며 이만큼이나 자라서 수상한 단체도 그들의 흔적도 쫓으며 살고 있다.

잘했다고 말해 주기보다는, 그때 마주치는 힘든 상황들을 들으며 괜찮냐고 물을 사람. 승찬이나 주리, 나연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해 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두툼하고 투박한 손이 따뜻한 유자차 담긴 머그 컵을 지호 앞에 내려놓았을 때 지호는 인정했다. 이 남자가 각성자라 그럴 것이다. 체격적으로나 시각적으로도 그런 느낌을 주기도 했다.

보현만큼 강한 사람이 없었기에 여태 느낀 일 없던 이상한 안정감.

“왜 헌터 안 하세요?”

“겁이 많아서.”

“진짜요?”

“초기에 잠시 했었다. 그러다 맨몸으로 부딪치는 것보단 이런 것도 필요하고 저런 것도 필요하겠네, 하고 나와서 차린 게 이거야.”

초창기 그 정리되지 않았던 시기에 균열을 헤쳐 나왔다면 의심할 나위 없이 실력자일 터.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현장에 있었으면 언니가 그렇게 다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글쎄. 왜 그렇게 생각하냐?”

“언니는 파트너를 잃고 혼자 버티다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렇게까지 무리할 이유가 있다면 그 사람 이야기 외엔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으시는걸요.”

“그렇지. 임보현은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나도 도준우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종종 한다. 괜찮은 사람이었거든.”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파트너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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