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바깥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승찬은 이번에야말로 당황했다. 덜 마른 셔츠를 대충 입어야 하나? 아니면 뭔가 다른 입을 것이…….
대답할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작은 손 하나가 쑥 들어와 비닐을 툭 내려놓았다.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어요. 아저씨 입을 만한 옷이 없어서 사 오긴 했는데, 안 맞으면 어쩔 수 없고요…….”
승찬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문이 닫혔다. 그는 자기 머리를 몇 대 두드리며 한숨 쉬었다. 아니 어쩌자고 술을 그렇게 될 때까지 마시나. 어린애도 아니고.
지호가 어디 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같은 동네긴 하지만 가까운 거리는 아닌데. 승찬은 약간 타이트한 사이즈의 반팔 티를 대충 당겨 입곤 머리를 대강 정리했다.
솔직히 창피했다. 이래서야 누가 누굴 챙기고 돕는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거실에 나오자 소파에 대충 뭉쳐진 이불이 먼저 보였다. 승찬이 쓴 방이 지호 방이었던 모양이다. 보현의 방을 쓸 수는 없었을 테니 지호는 거실에서 잔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우유 두 컵과 빵 몇 개를 얹은 쟁반을 들고나오던 지호는 로봇처럼 덜컥 멈췄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승찬은 얼른 다가가 쟁반을 대신 받았다. 가까이 서자 지호가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승찬은 덩달아 긴장했다. 무슨 사고라도 쳤나?
신체 계열 능력자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확률이 제로는 아니다. 업혀 가던 어렴풋한 기억 때문에 승찬은 이를 악물었다.
“저기, 제가 어제 실수를 했다면…….”
“오, 옷을 빨아야 해서!”
둘의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같이 말했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멈췄고, 덕분에 또 이상한 고요가 찾아왔다. 지호는 일단 자리에 앉자고 손짓했고, 승찬은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집은 꽤 넓었다. 보현의 취향대로 장식은 최소에 가깝게 걸려 있고 여백의 미를 자랑하는 곳이 많았으며 한쪽에는 마석 치료기까지 놓여 있으니 과연 헌터가 사는 곳이 맞나 의심할 여지는 없을 터였다.
“어젠 진짜 과하게 마셨죠. 폐를 끼쳤습니다.”
“다들 아저씨랑 비슷한 꼴이었는데 집에들 잘 들어갔나 몰라요.”
“아니 다들 지호 씨한테 저를 팽개쳐 놓고 가 버렸어요?”
“아녜요. 제가 아저씨 민증 보고 주소지 찾아갔는데 문을 열 방법이 없어서……. 문을 부술 수는 없잖아요.”
깨워도 안 일어나셨다고요. 하고 중얼거리는 지호의 평소 같은 태도에 승찬은 안도했다. 술을 과하게 마신 것만 잘못했나 보구나.
“그냥 문 앞에 버려두고 가셔도 괜찮았는데.”
“어떻게 그래요! 아니 날도 춥고. 아저씨 막 자꾸 기침했다고요. 괜찮아요? 제가 감기약도 사 왔어요. 하늘 날아다니는 게 좀 그랬나 봐요. 저 혼자만 다녀 봐서 몰랐는데 생각해 보면 바람도 칼바람이고 좀 그렇죠. 옷도 좀 얇으셨는데.”
“길에 버려두지 않으신 것만도 감사한데요……. 아니 진짜로요. 제가 속도 좀 안 좋았나 본데.”
“그, 음, 제가 아저씨 차만큼의 승차감은 없는 운전자였나 봐요. 아무튼, 저기 어쩌다가 옷이 좀 그래서 빨래를 해 두긴 했는데 여벌 옷이 마땅치가 않아서. 그니까 그걸 입고 주무시게 둘 수는 없었는데요. 제가 어떤 나쁜 생각으로 옷을 벗기고 그런 거는 아니고…….”
지호가 손을 이리저리 내저으며 횡설수설하자 승찬은 그 말을 끊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말을 덧붙이면 괜히 상황만 이상해지게 생긴 탓이다.
옷과 함께 빵을 사 온 모양이었던 터라 둘은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커피가 아니고 우유라니. 승찬은 그 귀여운 조합에 속으로 웃었다. 지호는 빵을 우물거리며 연신 자판을 두드렸다.
“다들 집에 잘 들어갔대요. 아저씨 이야기는 안 했어요. 체면이 있지, 형철 아저씨가 막 놀릴 게 분명하니까 숨겨 드렸습니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근데 진짜 십 년은 놀려 먹었을 거예요.”
만취했던 다음 날 아침으로 먹기엔 썩 편한 조합은 아니지만, 숙취 해소할 만한 게 이 집에 있을 리 만무했다.
불편한 속을 찬물로 가라앉히며 승찬은 습관적으로 뉴스를 켰다. 홀로 집에 있을 때면 조용한 실내가 허전해 아무거나 켜 놓곤 하는데, 예전에 보던 채널이 곧장 켜져 다급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주안 공단 부근에서 이상 에너지 반응 발생. 급성 균열 전조로 보입니다. 부근에 계신 시민 여러분께서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 빠른 대피 바랍니다. 다시 알립니다. 주안 공단 부근에서…….
“이상 에너지 반응이요?”
지호가 목을 쭉 빼 승찬의 화면을 응시했다. 그는 지호가 보기 편하게 핸드폰을 돌려 주며 인상 썼다.
“균열은 아닐 겁니다. 경보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 경보가 나오죠?”
“통신 중계기와 비슷한 빈도로 설치된 감지기가 있습니다. 이형 에너지가 특정 농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곧장 재난 관리 본부로 신호를 보내고, 별도의 승인 절차 없이 1차 경보가 발령되죠.”
“그럼 그 감지기에 저 에너지 반응이 가깝지 않으면요? 균열이 조그맣게 열린다든가…….”
승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뉴스 화면을 작게 줄여 한쪽으로 밀어 놓고 실시간 관심 집중 보도를 확인했다. 주안 공단 균열, 급성 균열, 대피소 안내, 이거 진짜 등등. 확연한 불안감이 전파된다.
“일반적으로는 가장 작게 측정된 균열조차 몇 키로 크깁니다. 그보다 작은 균열이라니…….”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승찬은 지호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여태까지의 사례들을 나열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아는 것들은 모두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알게 된 것들이며, 균열은 언제나 새로운 재앙으로 사람들을 덮쳤다.
“그렇죠. 헌터의 감은 믿는 게 좋죠. 작은 균열이 나타날 확률을 의심하는 겁니까?”
지호는 고심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무수한 기사들이 생산되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불안감에 떨며 온갖 것들을 검색했다.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가 피난 관련 단어들로 도배되자 어디 또 균열이 열렸느냐며 sns가 시끄러워졌다.
승찬은 핸드폰을 껐다. 화면에 뜨는 뉴스들, 누군가가 퍼 나르는 게시 글들, 속보며 단독이며 붙여 클릭만 유도해 대는 기사들에 현혹되지 않고 들을 이야기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비록 잔뜩 퍼마신 술에 절절매는 못난 어른이었으나 승찬은 필요한 순간에만큼은 언제나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제가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라면, 그리고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이야기해 줘요. 그렇지 않다면 당장 필요한 곳으로 가셔야 할 것 같군요. 다른 헌터의 도움이 필요할까요?”
“네. 아니, 아뇨.”
지호는 승찬이 내려놓은 핸드폰에서 가까스로 눈을 떼었다. 그는 아직 임시 헌터다. 파트너 없이 움직일 자격이 없는 임시 헌터.
보현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으나 보현은 일어난다고 해도 지호의 파트너가 되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감정적인 이유보다는 실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지호 역시 그 사실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다.
보현의 말대로라면 지호가 택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신체 계열뿐이다. 그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을 택해야 하니까. 모든 능력을 다 보유한 지호를 보조해 줄 사람은 당연히 아무 능력도 갖추지 않은 사람이어야…….
“지호 씨. 표정이 안 좋아요.”
승찬이 걱정스럽게 그를 들여다보았다.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었나. 그간 심란한 이야기들을 종종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헌터 일과 관련된 무엇이라 추측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승찬이 무슨 생각을 하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호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렇다.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신체 계열 능력자에 한정된다고만 생각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와 부딪치지 않는 사람엔 일반인도 당연히 포함된다.
눈앞의 승찬 같은.
“아저씨. 저랑 어디 좀 가요.”
“현장 말입니까?”
“헌터는 혼자 다니지 않거든요. 하지만 지금 제게 파트너가 없고, 제 능력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으로 아저씨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네요.”
“네? 아니 저는…….”
“일단 가요. 가면서 설명할게요.”
지호는 벌떡 일어났다. 승찬은 외투와 신발을 챙겨 현관으로 나가려다 붙잡혔다.
“시간 없어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건물을 빠져나가 다른 탈것에 타고 신호를 지키며 현장으로 출동했다간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터. 지호는 그 일련의 과정을 설명하는 대신 실례한다는 한마디와 함께 승찬을 번쩍 들었다. 무겁진 않은데 자세가 나빴으며, 기겁한 승찬이 이건 아니라고 소리친 까닭에 지호는 엉거주춤하게 그를 내려놓아야 했다.
“영화 같은 데 보면 다들 이렇게 데려가는데요.”
“지금 날아가려는 겁니까?”
“그게 빠를 것 같아서요. 제가 이동 능력자가 아니기도 하고…….”
지호는 당연한 것처럼 베란다 창을 열었다. 거친 바람이 실내를 휘저었다. 공기가 서늘하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으나 엄살 피울 시간이 없었다.
짐짝처럼 들고 가는 방법은 어떠냐는 제안은 금세 기각되었다. 나쁜 제안은 아니었으나 승찬의 상태는 나빴고, 거꾸로 쏠리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그렇다고 지호가 처음 옮기던 것처럼 공주님같이 안겨 갈 수는 없었기에 승찬은 속성으로 한 가지 자세를 가르쳐 주었다.
구조 현장에서 드물게 쓰이는 방법인데, 옆 사람의 허벅지 안쪽으로 팔을 넣어 같은 방향 팔을 잡은 상태로 어깨에 사람을 짊어지는 식이었다. 어깨에 오른 사람이 붙잡히지 않은 팔로 자신을 든 사람의 등을 받쳐 주면 피차 편해진다.
한 손으로 팔다리를 함께 잡으면 나머지 손이 자유로워진다는 장점이 있다고 소개하기에는 이 작은 헌터의 힘이 무지막지했기에 승찬은 그냥 조용한 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안 떨어뜨리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꽉 잡아요.”
“그런 무서운 말은 덧붙이지 말아 주시겠어요?”
지호는 어설픈 웃음으로 답했으나 자신 없는 태도는 승찬을 더 불안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여차하면 염동력도 있고, 콘크리트 덩어리도 옮기는 지호가 승찬을 떨어뜨릴 리가 있나.
한밤이 아니었기에 두 사람의 도약은 몇 사람 눈에 띄었다. 그러나 촬영할 타이밍도 없이 빠르게 지나쳤기에 헌터가 지나갔단 외침만 꼬리처럼 따라올 뿐이었다.
주안 공단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아직 균열이 보이진 않았으나 이형 에너지의 불규칙한 흐름이 지호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보통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호는 최근에 이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만약의 재난을 피해 달려 나오는 인파를 피해 골목에 내려선 지호는 승찬을 내려 주며 속삭였다.
“아저씨를 저기까지 데려가진 않을 거예요.”
“그럼 저를 왜 데리고 왔습니까?”
“통화 상태 계속 유지할게요. 혹시 끊기거나 무슨 일 있거나 모종의 문제들이 생기면 곧장 보고해 줘요. 아무 단서 없이 지원을 부를 순 없어요. 다들 너무 많은 곳에 불려 다녀서 피곤하잖아요.”
“결국, 혼자 가는 거잖습니까. 헌터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면서요?”
“혼자 아니잖아요. 든든한 백업 두고 가는데요.”
“본인 입으로 말했죠? 두고 간다고.”
승찬은 다급히 지호를 붙잡아야 했다. 물론 뿌리칠 수 있었으나 그렇게까지 매몰찬 사람은 아니었기에, 지호는 그 미약한 힘에 순순히 붙잡혀 뒤돌아봐 주었다.
“얼른 가 봐야 해요. 균열이면 어떻게 해요.”
“왜 균열임을 확신하는 겁니까?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당장 구조대를 호출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 올지도 모를 그런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