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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66화 (67/260)

66화

“좀 괜찮아요? 많이 드셨어요.”

“그러게요, 오늘따라 지호 씨한테 술잔이 많이 들어오네요.”

“제가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안 괜찮으면 큰일 나는 거 알죠? 여기서 술 취한 각성자 제압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요.”

지호는 시무룩해졌다. 신체 계열이라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괜찮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드니, 차라리 안 마시는 게 현명할 것 같긴 했다.

“본격적으로 복구 작업 들어가면서 다들 좀 쉬게 되니까 당분간 회식도 없을 거예요. 여러 이유로들 좀 신났네요. 평소 때는 학생이고 어린 친구라고 눈물 글썽이더니 자기들 필요할 때는 어른이고 술 마셔도 되지, 참나…….”

차가운 손가락을 비비며 담배를 한 대씩 물고 있는 저쪽 편을 구경하던 지호는 눈 마주친 사람이 다 피우지 않은 담배를 얼른 비벼 끄고 들어가는 것을 보며 웃었다.

“말만 어른이라고 하지, 사실 애 취급하시는 경우가 더 많은데요? 나쁜 거 배우지 말라고들 해 주시는 이야기들도 그렇고.”

“그야 현장에선 지호 씨 도움 없인 힘든 일들이 많은걸요. 그때만큼은 어른 대우해 주려고들 하죠?”

승찬의 말이 맞았다. 그가 코코아를 홀짝이는 동안 담배 물고 나오던 사람들 몇이 도로 들어갔다. 세 팀 정도.

“담배 정도는 피워도 될 텐데, 다들 제 앞에서 저러시더라니까요.”

“비흡연자를 위한 배려죠.”

“흡연 구역에서도요?”

승찬은 웃기만 했다. 아무튼, 지호 취급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었다. 현장에선 무지막지한 괴력을 발휘하고 신묘한 초능력으로 온갖 작업에 도움을 주지만, 작업이 끝나고 구조대로 돌아가면 주는 간식을 오물오물 먹으며 빵빵한 볼을 부풀리는 무해한 얼굴이라니.

승찬은 대원들의 혼란을 이해했다. 지호는 보통 어른스러웠지만, 가끔 철이 없었고, 드물게 애 같았다.

자긴 애가 아니라고 툴툴거리는 지호는 충분히 애였지만, 승찬은 그 이상의 이야기 없이 코코아를 홀짝였다. 바닥이 보였다.

“임보현 헌터는 좀 어때요?”

급작스러운 질문에 지호는 갈 곳 잃은 시선을 캄캄한 밤하늘로 던져 버렸다.

“여전해요. 숨은 잘 쉬고 있고 대사 활동 원활하고 신체 반응 정상이지만 의식 없음.”

“머지않아 깨어나겠죠.”

머지않아. 곧. 금방. 내일은.

보현의 의식 회복을 위한 의식 같은 것일까. 수두룩하게 비슷한 말들을 듣다 보니 힘이 좀 빠졌다.

“그런 꿈을 꾼 이유는 뭐였을까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다들 모르겠대요. 제가 언니가 깨어 있길 너무너무 바라서 그런 걸까요? 혹은 정신 방벽이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든가…….”

“그분이 정말 뭔가를 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언니가 깨어나 봐야만 알 수 있는 문제일 것 같네요.”

“이제 두통은 좀 괜찮아요?”

“훨씬 나아요. 기름 냄새 너무 오래 맡았나 봐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보현이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꽤 많은 이들이 지호의 임시 보호자를 자처했으나 개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뜻밖에도 승찬이었다. 각성자들은 각자의 훈련과 각자의 일, 각자의 연구와 개발로 바빴으니 예견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성별이 다른 보호자는 아무래도 오해를 사기 마련이라, 승찬은 절대 지호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다 부서진 건물들 철거도 거의 끝났으니 지호 씨도 더는 도울 일이 없을 거예요. 나머지는 진짜 업자들 일이고요.”

“다들 더는 못 본단 거네요.”

일이 적어 못 보는 편이 사회에는 훨씬 좋은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호는 시무룩해졌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소중했던 탓이다.

“다음엔 노란 명찰 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식 헌터가 도움을 준다면 정말 구조대와 헌터 측 협동 라인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죠. 지금이야 좀 따로 노는 면이 없잖아 있으니까요.”

“다들 자진해서 도와줄 거예요. 저도 여러 가지로 알아볼게요.”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다. 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물론 승찬의 생각은 그렇게까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만약 그런 이들이 많았다면, 지호가 나타나기 전부터 진작 헌터들과의 공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니까.

모든 착한 사람들이 지호처럼 자기 몫 챙기지도 않고 나서서 남들을 돕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긴 했다. 사실 그들이 맞서는 위험에는 대가가 주어지는 편이 정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섰다가 공조하는 게 사실은 불필요하거나 효율적이지 못한 일이라 끊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기도 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혹여 도울 마음 있는 사람이 있다면 헤매지 않도록 시스템 정도는 갖추도록 해 보지요. 머지않아 검단에 균열이 열릴 테니 그 전까지 뭐라도 형태를 갖추면 좋을 텐데요.”

누군가 가게 문을 벌컥 열었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하냐고 잔소리가 심하다. 아우성치는 사람들 틈으로 돌아간 지호는 고기쌈을 잔뜩 받았다. 승찬은 또 지호를 대신해 술잔을 잔뜩 받았고.

회식이 끝난 건 열 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궤짝으로 술들을 비워 댔는지 온통 난리다. 멀쩡한 사람이 훨씬 적었다.

대리를 부르든가 동료에게 업혀 가든가 같은 방향으로 택시를 타는 사람들을 챙기며 지호는 여러 사람을 동시에 부축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박수를 받았다. 웃기고 도움되는 능력이다.

“아저씨, 정신 좀 들어요? 주소 불러 주세요. 대리 부를 거예요. 아저씨?”

승찬은 대답 없이 손만 휘적휘적 내저었다. 다른 대원들도 만만치 않게 취해 있었기에 도움을 받기는 요원했다. 지호는 결국 대충 띄워 놓은 승찬의 품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어린 시절에 찍었을 신분증 사진 뒷면으로 주소가 찍혀 있다. 회식 장소에서 멀지 않은 위치였다.

짧게 고민한 지호는 승찬과 차를 함께 띄웠다. 무게가 다른 것들을 동시에 드는 훈련을 질리도록 한 덕분에 승찬을 위로 날려 버리지 않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 훈련할 때는 무거운 것에 들어가는 힘만큼 가벼운 쪽에도 힘을 준 덕분에 천장 엄청 부숴 먹고 나중엔 야외에서만 훈련했었다.

“아저씨 데려다주고 가 볼게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헌터님도 시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요!”

지호를 홀로 보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직 버스가 다니는 시간이니까. 그리고 대원들 역시 지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그 반대가 훨씬 쉬우리란 사실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건물을 통째로 허무는 힘이 있는 헌터에게 조심하라느니 하는 염려를 덧붙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위치를 확인하자 몇 분 되지 않는 위치에 승찬의 주소가 찍혔다. 이쪽인가, 3층 언저리를 살피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내려놓으며 지호는 조금 당황했다. 삭막하다 못해 아무도 안 사는 건물처럼 보였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한 세대도 불이 켜져 있질 않고, 주차장 역시 빈 상태라니. 그마저 건물 앞쪽으로 차를 대 놓은 양심 없는 사람들 때문에 승찬의 차 한 대 들어갈 길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주차장이 비었는데 왜 앞만 막아 놓았나? 아래로 내려오자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다 부식되어 가는 필로티 구조의 빌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건물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외벽 일부가 무너진 건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건물 구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석면 섞인 회백색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래서 주차장에 차를 안 댔구나. 저런 게 떨어지면 차가 상할 테니.

안쪽 자리 한두 군데 정도는 그래도 멀쩡해 보였기에 지호는 그쪽에 승찬의 차를 내려놓았다. 잠기지도 않은 건물 입구를 툭 밀어 열며 지호는 심란해졌다.

“아저씨 혼자 살아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 같긴 한데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협소한 위치로 승찬을 옮기다가 벽에 옷이 요란히 쓸리자 지호는 잠시 고민하다 그에게 가하던 염동력을 천천히 해제했다.

술 냄새가 풀풀 난다.

승찬을 업고 읏차, 하고 자세를 추스른 지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좁은 복도를 올라 3층 앞에 서자 그제야 비밀번호 누르는 패드가 지호를 반겼다.

“아저씨. 비밀번호 뭐예요? 문 열어 줘요.”

또 뭐라고 웅얼웅얼. 지호는 고민에 빠졌다. 현관 비밀번호를 다른 데 적어 두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지갑을 아무리 뒤져 봐야 나올 턱이 없겠지.

문을 부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 지호는 결국 도로 건물을 나왔다. 어떻게 하지? 문보다 창문을 부수는 편이 수리비가 덜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이고 창문이고 물어 줄 돈이 당장은 없는데. 보현의 카드를 쓰기엔 너무 미안했다.

한참 고민하던 지호는 남의 집 기물을 파손하고 돈을 물어 주는 것과 주인 없는 집에 손님을 데려오는 것 중 어떤 것이 덜 실례되는 일일까 고민했다. 당연히 후자이긴 하지만, 본인부터 얹혀사는 처지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는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업힌 승찬의 몸이 움찔했다. 추운가? 날이 좀 쌀쌀하긴 했다. 지호는 그를 다시 추슬러 업곤 땅을 박찼다.

염동력을 익힌 뒤 이동 능력과 관련된 교육도 받았다. 이제 다른 이동 능력자가 함부로 그를 데리고 움직일 수 없도록 처치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이동 능력 자체를 쓸 수는 없다. 체질적인 문제라고 했다.

덕분에 지호가 쓸 수 있는 이동 수단은 튼튼한 두 다리와 약간의 염동력뿐이다. 땅을 박차고 사 층 높이로 뛰어오른 뒤 그대로 건물 위로 날아오른 지호는 직선거리로 밤하늘을 주파했다.

다음 날 눈을 뜬 승찬은 생경한 장소를 보자마자 그대로 굳었다. 베개 부근을 더듬자 핸드폰이 잡혔다.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 게 감기 기운도 좀 있는 것 같았다. 웃옷을 벗은 상태라 당황이 갑절이 되었다.

간밤의 기억은 술자리에서 끊겨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긴 했다. 지호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이미 1차를 마치고 2차로 자리를 옮겨 온 상황이었는데, 며칠 포상 휴가를 받은 대원들끼리 죽도록 마신 거라 말릴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의 왁자지껄한 기억 너머로 드문드문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업혀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됐다.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꿈을 그토록 실감 나도록 꿨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승찬이 알고 있는 가장 책임감 있는 이의 얼굴을 떠올리는 편이 빨랐다.

외투는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고 셔츠 역시 그랬다. 모양새로 보니 토악질이라도 한 모양인데. 승찬은 좀처럼 안 하던 실수가 여기서 연달아 터졌다는 사실에 현실 도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승찬이 일어난 방은 단정하고 깔끔했다. 방 주인이 정리 정돈을 잘해서라고 하기보다는 정리할 물건이 지나치게 없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를 확인했다. 눅눅한 셔츠는 약간 덜 말라 꿉꿉했다. 늦은 밤 빨아 탈수도 안 하고 대강 널어놓은 모양새였다.

“아저씨, 일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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