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8. 자격들
보현이 깨어나는 건 당분간 어려우리라는 성 팀장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왜요? 하는 질문에 성 팀장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 말을 들으면, 지호가 헌터의 길을 걷지 않겠다고 할까 봐서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야기해야 한다. 보호자가 쓰러진 피보호자를 안심시켜야 하고, 아이를 걱정하게 하는 건 어른이 할 짓이 아니기에.
“균열에 오래 들어가 있을수록 신체 수복률이 떨어져요. 알죠? 균열에서는 되도록 다치지 않는 게 좋다는 거. 균열 내부에서 뭐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특히 신체 계열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은 몸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라요. 임보현 헌터는 1세대니까 대균열 때부터 얼마나 많은 균열행을 택했게요? 지금 멀쩡한 것만 해도 기적이에요.”
보현을 막아야 했었다는 뜻이었다.
그가 무리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호는 사람들을 도울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따라, 보현이 그 현장에 뛰어드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 자리에 보현보다 강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보현이 없었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거니까.
한때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면 한목숨 좀 희생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지호는 서글픈 얼굴로 보현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이제는 안다. 그것만큼 이기적인 일이 없다는 걸. 남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잔인한 짓이 또 없으리란 걸.
“언니가 아예 안 깨어나진 않겠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1세대 헌터 중 균열에 너무 오래 머물러 신체가 복구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을 수 있었다.
보현은 아직 그 단계까지 들어서진 않았지만 위험 수위라고. 그래서 헌터를 그만두는 그토록 뛰어난 인재를 잡을 수도 없었고, 급성 균열이 아니었다면 부를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고.
옆에서 주저하며 이야기하는 성 팀장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쉬었어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했었지.
죽었을 텐데.
지호는 그의 아빠를 생각했다. 돌아오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설령 각성자가 되어 살아났다 한들, 여태껏 안 돌아온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만약 각성자로 살아났다 해도 두 번 목숨을 던졌겠지. 아빠는 그럴 사람이었으니.
그러면 준우란 사람은 어떨까. 보현의 마지막 희망으로 남아 있는 이름. 데이터베이스에 사망자로 등록된 도준우 헌터의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물론 보현이 아까워 보였지만.
죽은 사람이건 산 사람이건 보현의 살 목표가 되어 준 사람이라는 점에서 고마웠다. 그가 없었다면 지호가 보현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 아닌가.
왜 보현의 꿈을 꾸었을까.
부디 눈을 떠 답을 들려달라고 수없이 속삭였으나 보현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병실 앞에 앉아만 있는 지호를 끌고 간 건 차나연 헌터였다.
“그런 꼴로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걸 보면 임 헌터가 뭐라고 할 것 같아요?”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지 않을까요?”
“물론 상당히 동의하고 싶어지는 말이긴 한데, 일단 화낼걸요?”
한때 지호의 훈련 담당으로 배속되었던 차나연 헌터의 말이다. 보현이 직접 지호를 부탁한다고 하기도 했었고.
양 박사나 성 팀장이 이야기할 때는 꿈쩍 않던 지호였으나 보현이 깨어났을 때 정식 헌터가 되어 있으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느냐는 나연의 꼬드김은 그를 움직이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그날로부터 석 달이 지났다.
다른 임시 헌터들에게 재능충으로 불리는 지호의 실력은 단번에 일취월장했다. 핸드폰으로 남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시야에 어렴풋이 보이는 과녁 열 개 한 번에 꿰뚫기 같은 신묘한 묘기를 선보일 수 있는 헌터는 현역에도 없었다.
계양 균열이 정리된 이후 송도 균열도 머지않아 닫혔기에 균열에 출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테스트를 완벽에 가까운 수치로 통과한 지호는 여전히 모든 기록을 경신하며 최우수 선발 인원으로 노란 명찰을 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여전히 파트너를 찾지 못한 것이다.
“무단 행동을 할 거라면 차라리 빨간 명찰을 달고 프리로 뛰어라.”
“그럴까요? 근데 그럼 헌터 자격증 안 나오잖아요. 균열 출입 허가도 따로 받아야 하고요. 그냥 혼자 뛰면 안 돼요?”
“헛소리 말고 정신 방벽 높은 헌터나 찾아. 그런 전투력으로 퀸에게 넘어가면 넌 살아 있는 재앙이 된다.”
김 반장의 잔소리는 이제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별로 상처가 되지도 않았다. 지호는 입을 비죽였다.
“저는 보현 언니랑 파트너 할 거예요.”
“임보현 헌터는 현직 헌터도 아니다. 심지어 그 자리는 공석일 수밖에 없을 텐데.”
“반장님도 알아요? 언니의 러브 스토리는 사실 공공재 같은 거 아닐까요?”
“하도 유명한 사람들이니 모를 수가 없었을 뿐이지. 가서 훈련이나 해라. 파트너 후보 보내 줄 테니 튕기지나 말고.”
“얍, 피했는데!”
김 반장 손가락에서 튕겨 나온 빛줄기를 잽싸게 피한 지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옆에도 뒤에도 심지어 위에도 나타난 김 반장은 한숨을 쉬며 박수를 딱 쳤다.
“진작 당했던 걸 뭘 피했다고 잘난 척이냐.”
“아! 티 좀 내고 공격해요!”
“어떤 괴물이 예고장 던지고 공격한다던?”
또 감점이다. 하는 평소 같은 말을 던지며 연구실로 들어가는 김 반장 뒤통수는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지호는 그를 흘겨보곤 훈련실 촬영 카메라부터 확인했다. 기기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지호의 정신이 침식당하고 혼란스러워질지언정 카메라 앞에서의 두 사람은 큰 변화가 없으니까.
김 반장과 대화를 나눌 때까지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지호가 계속 한쪽을 바라보고 있고 김 반장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 다니며 지호를 빤히 응시하는 장면은 낯설었다. 이때부터 정신 간섭이 있었나?
다른 부분에선 정말 일취월장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성과를 내고 있는데 정신계 공격은 아무리 해도 알아채고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감지 파장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이렇게 일상생활을 하든가 다른 쪽에 집중하는 중간에 치고 들어오면 막을 길이 없는 게 문제였다.
퀸 패러사이트가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설령 정식 헌터가 된다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호는 여전히 열외 인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터.
그러면 보현에게도 쓸모없을 것이다. 심지어 예전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최악의 수가 될 수도 있다.
김 반장은 익숙해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고, 인천 지역에서 정신 계열 능력을 다루기로는 한 손으로 꼽히는 사람 말이니 따를 수밖에. 지호는 김 반장에게 여유 시간이 될 때마다 정신 계열 교습을 받고 싶다고 신청했고, 김 반장은 나머지 훈련에서 빼어난 실력을 보일 때만 도와주겠다고 못을 박았다.
누군가 뒤통수에 물을 끼얹는 순간 방벽이 펼쳐졌다. 흘러내리는 액체를 염동력으로 끌어모아 컵에 알뜰히 담아 준 지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루에 세 번 당할 순 없지 않아요?”
“열다섯 번 당했었잖아요.”
“아니 언제 이야기를 해요!”
지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주리는 담담한 얼굴로 다가오자마자 뒤 돌려 차기를 날렸고, 지호는 자세를 낮추며 팔로 움직임을 막았다. 서너 합 교차 이후 주리는 흠, 하며 긴장을 풀었다.
“금방 배우네요. 이제 저한텐 더 배울 게 없을 것 같은데.”
“이주리 헌터님은 보현 언니 파트너잖아요. 어떻게 해서…….”
“임시예요. 아무리 임 헌터래도 혼자 들여보내 줄 리 없으니까요.”
대화 도중에 자비 없이 팔다리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평범하게 훈훈하고 다정한 대화였다. 정신 방벽 쪽을 김 반장에게, 감지계를 비롯한 이형 에너지의 섬세한 조절을 차나연 헌터에게 배운다면 신체 계열 및 무술 쪽은 이주리 헌터의 도움을 받았다.
염동력은 이전에 교육받던 연수 센터의 박순자 헌터의 도움을 받았다. 신체 계열을 병행하며 염동력을 움직이는 훈련은 꽤 도움되는 편이고, 집에 돌아갔을 때 홀로 남는 시간이 싫어 매일같이 훈련에 매진하다 보니 금세 실력이 늘었다.
말도 없이 다시 격투가 시작되고, 지호는 몸을 움직이는 그 순간만큼은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단 사실 자체를 좋아했다. 신체 계열이기에 남들보다 오래 버틸 수 있고, 치유력을 보유하고 있어 치료기 앞에 대기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헌터가 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요즘 지호는 공허하다. 딴생각하다가 주리의 발차기를 막지 못하고 뒤로 붕 날아갔다. 훈련실 벽에 처박히기 직전 염동력으로 허공에서 멈추지 않았으면 이번에야말로 꽤 아프게 구를 뻔했다.
“집중 안 합니까?”
“실수했어요. 다시 가요.”
공중에서 몸을 돌려 허공을 박찬다. 박순자 헌터에게 배운 체술 중 하나였다. 염동력과 신체 계열 능력의 조합. 주리는 익숙하게 몸을 틀어 지호의 공격을 흘려 내곤 곧바로 뒤를 찍어 눌렀다.
“뭐예요, 이건. 미사일? 한 번 피하면 그대로 죽여 주십시오 하는 건데.”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허공을 밟고 다시 뛰어드는 거 보면.”
“놀라긴 하겠어요. 이렇게 밥상을 차려 주다니? 하면서.”
얼굴을 내리찍는 발에 지호는 황급히 옆으로 굴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리는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현직 헌터들 중 가장 빠른 헌터란 이름에 걸맞게 공격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고, 지호는 감지계 능력까지 동원해야 주리와 엇비슷하게 싸울 수 있었다.
“너무 빨라요!”
“저보다 빠른 놈도 있을 텐데요.”
주리의 팔꿈치가 관자놀이를 스쳤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오자 지호는 곧바로 방벽을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중지를 요청하는 신호다. 주리는 숨도 고르지 않고 태연히 멈추었다.
“급소는 막거나 피해야죠.”
“실수를…….”
“현장에서 실수하면 죽어요.”
지호는 주리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박 팀장을 제외하곤 지호에게 가차 없는 사람이 몇 없던 까닭이다.
승찬이 해 준 조언 중 하나다. 친절한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들을 곁에 두라고. 물론 적이 아닐 때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미 지호 곁에는 좋은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지호에게 물렀다. 지호는 강해지고 싶다고 했고, 승찬은 그런 마음이라면 지호를 가혹하게 훈련해 줄 사람을 찾는 편이 빠를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성 팀장이나 양 박사는 지호의 상태를 매번 점검하느라 훈련을 멈추고 싶어 했고, 박 팀장은 염동력을 가르치기보다 이동 능력을 개발시키고 싶어 했으며 서명은 장인은 아예 헌터가 아닌 길을 권하기 위해 자기가 아는 인맥을 동원하느라 바빴다.
물론 좋은 사람들이고 어느 방향이건 지호에게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지호가 원하는 길은 아니었다.
핸드폰에 진동이 몇 번 왔다.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약속한 시각이었다. 지호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며 꾸벅 인사했다.
“급소 방어에 한 번 더 실수하면 더 시간 내 주지 않을 거예요.”
“너무 무시무시한 소린데요…….”
“그러니 주의하란 거죠. 지호 씨는 너무 긴장감이 없어요. 훈련에도 익숙해지고 다 만만해지니 더 그런 것 같은데, 그러다 정말 위험해져요.”
“조심할게요.”
주리는 더 잔소리하지 않았으나 눈을 가늘게 뜨고 지호를 한참 바라보았다. 정말 조심하겠다고 몇 차례나 이야기한 다음에야 훈련실을 떠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