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김 반장님이 기억을 읽어 낸 뒤에 상세 보고를 올리셨을 겁니다. 저는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무서웠어요.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른 헌터들을 위해서요. 하지만, 하지만 균열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괴물들과 싸울 수 없어요. 저는 당신의 보호자처럼 전설적인 영웅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럴 만한 힘도 능력도 없어요.”
“아무도 싸움을 강요하지 않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면 그냥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면 돼요.”
“그럴 겁니다. 저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어렵겠죠. 1세대 헌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의 기대와 찬사를 등에 업고 영웅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게 되겠죠.”
“저는 영웅이 아닌걸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걸 기대할 겁니다. 애석하게도요.”
지호 이야기는 너무 많은 매스컴을 오르내렸다. 지호가 살아온 길지 않은 과거가 낱낱이 파헤쳐 전시됐고, 원치 않았던 아빠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가족 모두가 균열에 휘말렸다는 이야기와 함께 빈부 격차에 따른 균열 재해 피해자가 많다는 이야기도 여러 기사로 나왔다. 수많은 이야기가 지호의 것이었고, 동시에 타인의 것이었다.
“언니가 헌터들 사진 찍고 그러는 거 엄청 싫어했었는데, 왜 그래야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언제라도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였어요.”
헌터이기를 포기하기로 한 상원은 예전보다 좀 더 차분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언제나 부담스럽게 여겨지던 능청맞은 웃음 대신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 씨의 본질은 변하지 않죠. 다들 그걸 압니다. 하지만 지호 씨를 알던 사람들만 알아요. 그러니 평범한 삶이란 더 멀어지겠죠. 그래도 만약 그런 삶을 원한다면, 저를 비롯해 헌터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터전으로 돌아오세요. 완전히 평범한 삶까지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평범한 듯한 삶은 살 수 있을 겁니다.”
“각성자 연합으로 가는군요?”
“헌터 일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힘이 되고 싶으니까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겠죠.”
“부평 연합으로 가세요?”
“아직 고민 중이에요. 송도 쪽에도 곧 하나 생길 거란 이야길 들어서요. 균열 닫힌 다음의 이야기라 배우기는 부평에서 배울 것 같긴 해요. 뭐가 됐건 완전히 이쪽 세계를 떠날 마음은 없으니까, 혹여 이쪽 방면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해요.”
지호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지호에게 상원은 그렇게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고, 늘 불편함을 동반하는 사람이기까지 했다. 왜 그에게 이토록 친절할까? 처음 가졌던 불순한 의도 비슷한 건 다시 보이지 않았는데.
“왜요?”
망설인 끝에 툭 튀어나온 질문에 상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이 이야기를 연구 팀에서도 하고 온 길입니다. 그쪽 연구 팀원 중 한 사람이 지호 씨 이야길 했어요. 당신에게도 들려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저요? 왜 저한테…….”
“임보현 헌터가 퀸 패러사이트를 쫓을 테고, 당신은 다른 누구보다 그분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 제가 기절한 후에 그 부근에 퀸 패러사이트가 나타났었다던데, 두 개체가 서로 공격하진 않았다더군요. 참, 제가 알려 주겠다고 했던 정보 생각나요? 결국, 당신이 별로 궁금해하지는 않았던 이야기들요.”
“이제 퓨어 헌터가 안정기가 아니어도 균열을 출입할 수 있단 정보는 그다지 기밀이 아닌데요.”
“그거 하나로 그렇게 귀찮게 했으려고요. 연수 센터에서 관찰한 건데, 흔히 괴물들끼리는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고 알고 있잖아요? 근데 그건 안정기 이후고, 안정기 이전에는 괴물들끼리 영역 다툼 비슷한 걸 한다더군요. 근데 고등 개체들끼린 거의 안 싸운대요. 특정한 이름 붙은 놈들 말입니다.”
괴물끼리 서로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는 말은 일반인 사이에 통용되는 마법 같은 단어다. 한 놈만 피하면 되니까, 그 한 놈의 특성이라도 알고 있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틀린 이야기라고? 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사람들한테 빨리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장은 그럴 수 없죠. 혼란만 가중될 테니까. 충분한 관측 후에 달라진 정보들이 차근차근 공지될 겁니다. 관계자들끼리야 당장 정보를 알아야 하지만, 균열에 휘말릴 일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증식시킬 필요는 없어요.”
곧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사람의 말이었던 터라 지호는 불만스러웠으나 입을 다물었다. 상원은 자꾸 말이 딴 데로 샌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머지않아 알려질 거니 너무 염려는 마세요. 그, 본래 서로 공격하거나 자리를 피해야 할 괴물들이 서로 대화라도 하듯이 한참 같이 있다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더군요. 자세한 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차후 퀸 패러사이트를 만난다면 도플갱어 역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림자가 본체이며 다른 놈 흉내를 내는 개체가 독일에서 보고된 바 있으며, 해당 지역에 전승되는 비슷한 이미지를 본떠 이름 붙였다고 들었습니다.”
“상원 씨가 하는 말을 듣고 종합해 보면, 사람처럼 말하고, 흉내 낸 사람의 기억도 가지고 있는 거죠?”
“고유 능력만 좀 다른 것 같더군요. 아마 괴물 특유의 능력 자체가 감지나 이형 에너지 쪽으로 쏠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진짜 그쪽 계통의 능력 가진 사람들을 흉내 낼 때겠죠. 차라리 이번 일이 일찍 터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요.”
만약 도플갱어가 보현을 흉내 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 예리하고 계산적인 에너지 배분까지는 따라 할 수 없겠지만, 착각 정도는 하게 할 수도 있을 터.
“자세히 알려 줘서 고마워요. 언니와도 정보를 나눌게요.”
“따로 정보를 받으실 수도 있긴 했는데, 제가 인사를 하러 오고 싶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이지호 씨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음, 저는…….”
“아니, 거절하진 말아 주세요.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만 품고 돌아가고 싶으니까요. 어차피 다시 만날 수는 없을 테고, 현시대에 가장 유명한 헌터 중 한 사람에게 짝사랑하는 시늉이라도 해 본 경험담 정도는 남겨 주셔도 되잖아요?”
지호는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게 싫어서 거절하려는 건데. 상원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봐야겠네요. 오래 있었습니다.”
“그, 잘 가요. 고생했어요.”
지호는 어정쩡하게 일어났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상원을 배웅할 틈도 갖지 못하고 애매한 자세로 멈췄다. 누가 신체 계열 각성자 아니랄까 봐 행동 하나는 잽쌌다.
도로 침대에 앉으려다 양 박사가 준 훈련 매뉴얼대로 가벼운 운동을 하기로 한 지호는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을지언정 알 건 아는 나이다.
왜 저런 아무도 안 믿을 말을 남기고 떠났을까?
오래도록 눈을 들여다봐도 설렘 없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른들의 좋아함이란 그런 걸까? 애당초 상원에 관해 아는 것도 없는데, 어떤 부분이 그런 맘이라고 착각하게 한 걸까?
그저 경험담 한 자락이 필요했다면 그렇게 둘 수 있겠지. 나중에 뉴스건 신문에건 오르내리는 지호 본인 얼굴을 보며 옛날 헌터 일할 때 말이야~ 하고 아저씨들이나 할 법한 옛 이야깃거리로 삼고자 한다면 또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아는 헌터가 있었는데, 정도로 시작하는 이야기여야지. 좋아하는 헌터가 있었는데, 로 시작하는 이야기와는 영 어울리질 않는다. 애당초 지호와 상원은 몇 번 마주치고 대화를 섞은 사이도 아니다.
세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 아닌가. 지호는 침착하게 동영상 속 동작을 따라 하며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이래서야 누가 환자라고 믿을까.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계 종사자들은 대부분 치유계 능력자고,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몸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양 박사는 지호가 본인의 몸을 회복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돌리기를 바랐고, 그런 방식으로 치유계 능력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기를 바랐다.
지호 역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도움받기만 하는 건 영 불편하던 터라, 퇴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얼른 그러자고 수락하곤 서류에 사인했다. 다리는 멀쩡했기에 팔에만 몇 가지 처치를 마저 받고 성 팀장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은 지호는 드디어 병원을 나섰다.
어디로 가지.
아파트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병원에 앉아 있는 것과 큰 차이 없는 행동 아닌가 싶어 내키지 않았다.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무슨 일을 할까, 어디로 갈까.
내내 표류하는 삶이다.
병원 앞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지호는 누군가 그를 손가락질하는 걸 보았다. 작은 키에 똘망똘망한 눈. 아는 얼굴이었다.
“어, 언니!”
“샛별아?”
옆에 서 있던 아빠의 손을 휙 놓고 우다다 달려온 샛별이가 지호에게 답싹 안겼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한 건 샛별이의 보호자뿐이었다. 누가 봐도 아빠 아니면 이상할 정도로 닮은 얼굴이라, 지호는 얼른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샛별이 아빠세요?”
곤란한 표정으로 샛별이와 지호를 번갈아 본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지호가 샛별이에게 연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바로 그 보호자였다.
“이렇게 뵙네요.”
“언니 티비에서 봤어. 유튜브에도 되게 많이 나왔어!”
“진짜? 언니는 샛별이 못 봤는데.”
“나는 헌터 아니니까……. 언니 언제 헌터 됐어? 나랑 있을 때는 아니었잖아!”
샛별이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병원을 오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개중에는 지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지호는 어설프게 웃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거는 여기서 말해 줄 수 없어. 사람이 너무 많은걸. 샛별이 병원 오는 길이야? 어디 아파?”
“검사하는 날이야. 아픈 데는 없지만, 아플 수도 있다고 아빠가 그랬어.”
샛별이는 지호를 따라 조그맣게 속삭인 다음 생긋 웃었다. 문득 마음 한편이 찡하니 울렸다. 샛별이가 여기서 아빠와 함께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병원 가야지. 아빠가 저기서 기다리시는데.”
“언니도 가자. 언니도 검사해. 언니 다치는 거 봤어. 괜찮아?”
샛별이는 그제야 지호에게서 떨어지더니 염려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순수한 걱정이 너무 오랜만이라 지호는 잠시 대답을 유보했다. 감동으로 촉촉해진 눈가나 반쯤 갈라진 음성을 숨기려고 헛기침하며 지호는 황급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언니는, 이렇게 혼자서 치료할 수도 있어. 짜잔!”
지호의 손바닥 아래에 마석 치료기에서나 볼 법한 푸른빛이 서리자 샛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참 호들갑을 떨며 헌터 대단하다고 소리친 샛별이는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걸 뒤늦게 알아채곤 또 목소리를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