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벌어진 일로 후회하지 말자고요.”
민재는 다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본디 외부보다 훨씬 어두운 균열 특성상 선글라스를 쓰는 건 스스로 시야를 가리는 역할밖에 되지 못할 텐데. 높이 뛰어올라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민재는 선글라스를 다시 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마 이런 도구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신체 계열들은 이형 에너지 보는 데는 소질이 없잖아요.”
“그걸 쓰면 보이나요?”
“다 보이는 건 아닌데 어느 정도는요. 지금 이쪽으로 접근 중인 개체가 몇 있는데 거리 차가 있어요. 우리한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집니다. 하나는 계속 도망 다니는 거예요. 적당한 장소 찾아 올라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쌓으면서요. 한 명이 이쪽 분을, 그러고 보니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다빈이에요. 한다빈.”
“다빈 씨를 보호하는 사람 외에 나머지 사람은 다음 아지트를 준비하는 거죠. 다만 내내 돌아다녀야 하니 피로가 가중되기 쉽습니다. 두 번째도 사실 피로야 그다지 차이가 없는데, 이쪽은 다빈 씨를 미끼로 우리가 괴물을 잡는 선택지예요. 제 생각엔 이쪽이 좀 더 확실합니다. 전자를 골랐다가 끝도 없이 몰려드는 괴물들에게 포위당할 위험도 있잖아요.”
“못 이기면 어떻게 해요?”
“그런 놈이면 도망가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겁니다. 사실 각개 격파 할 수 있는 선에선 처리하는 게 좋아 보여요. 최대한 균열 경계를 떠나지 않는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죠. 직접 오갈 순 없어도 부차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뭐 합니까?”
다빈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쪽을 보는 것이 뻔히 보여 민재의 말이 뚝 끊겼다. 다빈은 손가락을 입 앞에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망가진 건물을 응시했다.
그림자 쪽이 일렁이다 가라앉는다. 흡사 신기루에 가까운 모양새.
“그림자 안에만 있을 수 있는 뭔가가 있나 봐요.”
“감지계 능력도 있었던 겁니까?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을 숨기고 균열에…….”
“모르겠어요. 왜 되는지 모르겠는데 느껴지네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빈은 부근에 있는 괴물은 그림자에 있는 것이 전부고, 몇 마리가 더 접근하는 것 같다고 답했다. 거리는? 하는 민재의 질문에 어렴풋한 단위는커녕 그냥, 몇 마리 정도라고 답한 다빈 사이에 기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상원은 다빈이 말한 그림자 쪽으로 돌을 던졌다. 젤라틴처럼 흔들리는 게 평범한 그림자론 보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놈인데, 어떻게 잡죠?”
모두 고민에 잠겼다. 일반적인 포지션에서 신체 계열 헌터들은 방어 인력으로 구분된다. 방벽 담당 팀원이 방벽을 칠 수는 있어도 버티기는 힘들기에 그를 물리적으로 보조하고 지탱하는 인간 쐐기 정도 될까.
물리적 충격으로 괴물과 싸우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놈과 맨몸으로 부딪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인지라 아직까지 그렇게 싸우는 사람은 없다. 종종 보고되는 괴물 중에는 외피에 산을 두르고 있거나 독성이 있는 놈도 없지 않으니까. 민재는 난처한 얼굴로 그림자 진 방향을 응시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능공 연합에서 준다던 보조 도구를 좀 챙겨 올 걸 그랬군요. 개발 중인 도구라곤 해도 도움이 됐을 텐데……. 출력이 너무 무식해서 다루기 좀 힘들더라고요.”
“그걸 가져다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마정석 쓰는 도구라 균열 경계를 통과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안 갑니다. 그것도 일단은 이형 에너지니까…….”
민재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 안쪽에 있는 놈이 몇 차례의 돌 던지기에도 밖으로 나오지 않자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상원은 다빈이 불안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며 함께 긴장했다.
감지계 헌터가 말했던 적이 있다. 그들의 파장으로 느끼는 세계는 눈으로 보는 세계와 사뭇 다르다고.
이제 다빈은 그 세계를 느끼게 된 걸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저 균열 경계에 함께 걸어왔을 뿐인 동료의 변화는 너무 극적이었고,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워 사실 크게 궁금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접근하는 놈은 어떻게 하죠?”
“뭐 같아요? 아는 놈입니까?”
“아뇨. 근데, 알기도 하고…….”
다빈의 답이 애매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를 가늠하려 애쓰는 얼굴로 목을 위로 쭉 뺐다. 흡사 안테나라도 가동하는 것 같은 모양새라 상원은 웃음을 참았다.
그때 균열 확장 때문에 몇 차례쯤 불었던 강풍이 다시 한 번 불어왔다. 그와 동시에 경계가 순식간에 바깥으로 확장된다. 내부가 넓어지고 이형 에너지가 휘몰아치자 눈 뜨기도 어려운 폭풍이 균열을 할퀴어 댔다. 세 사람은 동시에 바닥에 엎드렸다.
그런데 다빈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근접해 있던 민재가 황급히 다빈을 붙잡았고, 다빈은 새로 개장한 가게 앞 막대풍선처럼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직전의 기괴한 모양새가 떠올라 상원이 심약한 가슴이 요란하게 떨렸다. 다행히 강풍이 가라앉으며 다빈의 몸은 도로 아래로 내려왔고, 그 끔찍하던 사고는 반복되지 않았다.
바람이 가라앉기 무섭게 바닥에 발을 붙인 다빈은 안도하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넬 생각이었던 상원은 곧 그 생각을 철회했다. 민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다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아까 꺼냈던 선글라스를 도로 꺼내는 이유가 뭘까.
“신체 계열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을 알고 있습니까?”
“몸이 튼튼해지는 것 말고요?”
“외부적으로 드러날 만한 요소 말입니다.”
“채소 썰다 칼에 베여도 피 안 나는 거?”
다빈이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려 시도했으나 민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선글라스 옆면을 눌렀다. 삑, 하는 가벼운 비프음.
“신체 계열은 이형 에너지로 인해 신체가 재구성된 뒤 본래보다 무거운 특성을 가집니다. 한다빈 임시 헌터. 제가 지금부터 일반적인 신체 계열 헌터라면 당연히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을 할 겁니다. 받아 내십시오.”
“예? 저한테요? 갑자기?”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민재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상원은 보았다. 민재가 다빈을 내리치고, 다빈이 아주 느리게 그 동작에 반응하려 팔을 올리려고 시도하는 순간에 이미 공격이 끝난 것을.
다빈의 얼굴에 선명한 실핏줄이 갔다. 놀라울 정도의 조절이다. 약간 따끔한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상원은 결과에 당황했다.
다빈은 상원보다 훨씬 빠른 반응 속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같은 센터에서 훈련받았기에 당연히 알 수밖에.
더욱이 같은 계열이라 같은 훈련을 받아 온 두 사람이다. 어떻게 서로의 실력을 모를까.
다빈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첫째로는 자기가 공격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당황했고, 그다음으로는 제 얼굴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 같았다.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저는……. 아니 전……. 이상해요. 분명히 막을 수 있는 건데. 그래 왔었는데.”
“서상원 씨라고 했었죠.”
“예, 예.”
“한다빈 헌터와 본디 아는 사이였습니까? 예전부터?”
상원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빈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쳐 내어 제 얼굴에 난 피를 보곤 사색이 되었다.
한 번 각성한 사람이 다른 연유로 재차 각성하면 본디 가지고 있던 능력을 잃는 걸까? 상원의 소심한 추측을 들은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주목해야 할 점이 있었습니다. 모든 각성자가 그러했죠. 우리는 비록 죽었다가 살아났을지언정 본래 몸을 버리며 재생되는 경험은 하지 않습니다. 각성하는 순간의 기억이 확실치 않은 각성자라 해도 이 부분에 관해선 이견이 있었던 적이 없죠. 모두 자기 몸을 가지고 깨어납니다. 심지어 몸을 잃었던 사람조차 그래요.”
“그건…….”
“자기 각성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각성자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무수한 목격자들이. 하물며 CCTV와 조악한 핸드폰 카메라 같은 것들이 언제나 말하고 있죠. 죽었던 몸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각성자는 없다고.”
상원은 자신의 각성 순간을 떠올렸다. 좀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자기 개를 지키려다 죽었다. 산책 길이었다. 언제나 오가던 큰 분수대 앞에서 괴물이 튀어나왔었지.
상원의 개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상원을 위해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둘 다 서로를 위해 몸을 던졌지만 살아남은 건 상원뿐이었고, 그는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일어나 손에 남겨진 리드 줄을 붙잡고 울었었다.
상원은 안다.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건 분명 각성의 조건이 맞다. 하물며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각성의 조건에는 분명히 부합했다.
그런데 다빈은? 두 번째 각성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 모를 그 괴악한 장면은 어디에서 왔는가. 균열이 확장되는 것이 무언가를 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나?
상원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이상하다고 생각부터 해야 했다. 선글라스를 낀 채 민재가 상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들어올 때 했던 이야기 기억합니까?”
“아직 잘못되지 않았어요.”
“아직이죠.”
민재가 훅 가까워졌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던 상원은 그대로 팔을 붙잡혔다. 그가 땅에 발을 콱 박아 넣은 채로 몸을 돌리자 상원은 억 소리와 함께 몸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균열 경계가 멀지 않다. 지금? 도대체 왜? 상원의 얼굴에 떠올랐던 무수한 의문들은 뒤에서 피어오르는 이형 에너지를 보자마자 해소되었다.
다빈의 발치에서 솟아난 커다란 그림자가 민재를 덮친다.
우그러지는 몸. 기괴하게 꺾이기 시작하는 신체. 허공을 날아가는 짧은 순간 동안 상원이 보았던 건 끔찍한 모양새로 구겨져 가는 민재의 몸과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다빈이었다.
이형 에너지를 감지하거나 볼 수 없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상원은 그 그림자가 본체라는 것도, 그리고 다빈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민재의 모습과 유사한 모양새로 몸을 변이시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체공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던 건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염동력 능력자가 상원을 허공에서 붙잡은 까닭이었다. 균열 밖으로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원은 기절했다. 다빈이었던 무언가가 민재의 모습을 온전히 훔치는 것을 지켜본 다음의 일이었다.
깨어난 후, 상원은 다시는 균열에 접근하고 싶지 않게 되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죽을 수도 있었던 곳이다. 심지어 그토록 고통을 받아 가면서.
지호는 상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이 새로운 코드 레드 개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퀸 패러사이트와 달리 생김새가 알려진 놈이 아니었던 터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웠지만, 분명 놈이었을 터.
“도플갱어를 처음 목격하고 보고한 게 상원 씨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