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55화 (56/260)

55화

7. 범인들

전투 중 각성.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만, 전혀 없지도 않다. 심지어 없던 수치가 아니고 가진 걸 필요에 따라 증폭하는 경우는 간혹 보고되는 때도 있었다.

지호는 최근 측정한 수치에서도 염동력 부문이 제로가 아니라는 양 박사의 이야길 들으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다른 수치가 너무 높아서 염동력 계측 자체가 없어 보였다는 말씀이시죠?”

“증폭되었어도 치유계나 정신 방벽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의 능력 같습니다. 없는 건 아닌데, 효율이 떨어지는 거죠. 아마 알게 모르게 쓰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강화되고 그러지는 않거든요.”

아마 이주리 헌터가 염동력으로 몸을 고정하라고 지시했을 때 그대로 말을 따르며 사용 중이었던 것 같다. 본인조차 컨트롤하기 힘들게 증폭된 힘을 다수에게 사용했으니 몸 상태가 이 지경이 된 모양이었다. 그 이후, 남들 보기에는 괴물 입에 반쯤 먹힌 상태로 놈을 격퇴하느라 에너지가 폭주. 양 박사는 그 결과가 고작 며칠간의 혼수상태였던 게 다행이라고 했다.

“신체 계열 소질 적성이 최상위자가 아니었으면 거기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운이 좋았던 거예요. 중상을 입은 헌터나 각성자는 최대한 능력 사용을 자제하는 게 원칙입니다. 진짜 큰 사고가 난다고요. 임보현 헌터가 자꾸 그런 팔로 균열에 들어가니까 다들 무리해도 되는 줄 알고…….”

“죽을 순 없었잖아요. 잘 끝나서 다행이죠?”

긴 잔소리를 한숨과 함께 날려 버린 양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사 결과가 적힌 차트를 내려놓았다. 모든 수치가 맨 처음 공인 각성 지원부에 가서 측정했던 수치보다 조금씩 올라 있다. 특히 염동력의 증가치가 눈에 띄었다.

“그래프로만 보니까 알기 어려웠는데, 확실히 처음부터 제로 값은 하나도 없었더군요. 같은 올라운더여도 임보현 헌터님은 정신 방벽이랑 이형 에너지 구현, 염동력만 갖고 있으시거든요. 전부 상위 클래스라 해당 능력으로 보일 수 있는 묘기가 많다 보니 다들 올라운더, 올라운더 하는데 못 하는 거 많으시죠. 잘 아물었네요.”

진정한 의미의 올라운더라니, 하고 눈을 빛내는 양 박사의 태도가 편하지는 않아 지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기 근데 박사님. 제가 보현 언니 각성 당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저보다 훨씬 더 엄청난 희생을 한 사람이에요. 근데 왜 능력 보유 값이나 종류에 차이가 있을까요?”

“음, 글쎄요. 정확한 건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죽을 당시 상황도 상황이지만, 괴물의 종류 때문에도 차이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어요. 이건 뭔가 뒷받침할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니까 흘려들어도 좋기는 합니다만…….”

“괴물의 종류요?”

“괴물 중에도 머리 좋은 놈과 무작정 먹으려는 놈, 두 부류가 있지 않습니까?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긴 한데, 그래도 전자가 없는 게 아니니까요.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고려해야 할 게 많기는 한데, 능력의 강도라면 모를까 종류라면 어느 정도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예요?”

양 박사의 얼굴에 온갖 질문이 올라왔다 사라졌다. 그는 어물어물 말을 줄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해도 되는 말이 아니었으니.

“그, 각성할 당시의 상황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적어서 표본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제 추측 정도만 들려드릴 수 있고, 당장은 그 정도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네요.”

눈을 뜨고 사태를 파악한 후로 지호는 외부와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며 회복에 집중했다. 양 박사나 상태 확인을 위해 오가는 간호사들, 정기적 측정을 위해 들르는 성 팀장 정도나 보았을까.

팔에 난 구멍은 남들 것보다 빠르게 아물었다. 균열에서 다친 것치고는 그렇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힘을 다루는 건 조심히 하시고요. 되도록 치유 계열 사용에 집중하시라는 조언이 있었습니다. 쓸수록 몸도 낫고, 능력 효율도 올라간다고요.”

“감지 파장도 안 돼요?”

“차라리 근력 운동을 하시지 그래요. 다린 멀쩡하시잖아요.”

“저 환잔데!”

“이건 성 팀장님이 전해 주라고 한 훈련 지침서입니다. 신체 계열 헌터들이 주로 참고하는 거래요. 나중에 센터에서 자세 제대로 봐 줄 수 있을 거라고도 하셨고요. 덤벨은 무거워서 못 들고 왔으니까 맨몸 운동만 하세요.”

지호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신형 기기에 뭔가를 밀어 내는 모양새로 파일을 전송한 양 박사는 이만 가 보겠다며 일어났다. 사람 마주할 일이 많지 않은 지호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어, 저기. 언니 상태는 좀 어때요?”

“일어나면 알려 드릴게요. 덤벨은 다른 사람 통해서 보낼 거고요. 면회 희망자들이 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는 사람들만 보면 좋겠는데요…….”

“그건 당연하죠. 우리 헌터분 보호해야지. 아, 미리 말해 두는데 그래도 시험은 쳐야 헌터증 나옵니다. 선행이 프리패스가 될 수 없어요. 알죠?”

장난기 어린 말투다. 기자들이 뻔질나게 써 대는 기사 내용이기도 했다. 그 기사 사실 박사님이? 하고 낄낄거리며 시답지 않은 대화를 몇 분 나눈 뒤에야 양 박사는 정말로 일어났다.

“성 팀장 호출이 자꾸 떠서 가 봐야겠습니다. 또 들를게요. 대체 자기 아들 입대하는 자리에 제가 왜 같이 가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긴 하는데…….”

지호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양 박사와 성 팀장을 자주 보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싹튼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한쪽 머리에 지나치게 과학과 인류애만 들어 있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렇게 좋은 동료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군 생활 해라, 뭐 그런 걸 보여 주고 싶으신 거 아닐까요?”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긴 하지만, 성 팀장은 각성자라 나이를 먹어도 늙어 보이질 않아 양 박사와 큰 차이 나 보이지 않는다. 피차 연구 업무에 몸담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좋은 관계가 되는 건 좋은 일이라고 보현이 말한 바 있기도 했다.

양 박사가 떠난 뒤 오래 지나지 않아 손님이 왔다. 연수 센터의 임시 각성자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지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까?

임시 헌터 교육이 연수 센터에서 이루어진 탓에 당연히 지호가 아는 제일 많은 헌터는 연수 센터 소속이다. 누가 됐건 별로 거리낄 사람은 없기에 지호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어, 몸은 좀 괜찮아요?”

“서상원 씨.”

안색이 좋지 않은 상원을 보곤 지호는 이쪽이 환자인지 저쪽이 환자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일어나려 했다. 상원은 들고 온 병문안 선물을 내려놓으며 황급히 지호를 만류했다.

“아니, 앉아 계세요.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이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균열에 임시 헌터들과 함께 파견되었던 첫날이었던 것 같았다. 신체 계열 헌터들만 안정기 전에 균열을 오갈 수 있는데, 어떤 헌터 때문에 난리가 났었던 바로 그날.

지호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던 의욕적인 태도가 사라진 상원은 얌전하고 조용했다. 지호는 상원이 건네주는 음료를 받으며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음, 어, 잘 회복 중이에요.”

“다행이네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상원은 헛기침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예전 생각이 나 저도 모르게 상원의 손을 쳐다만 보고 있던 지호는 일단 물었다.

“악수요?”

“예. 인사할 겸 들렀어요. 저 헌터 그만두거든요.”

“네?”

“이번에 엄청 유명해지셨잖아요. 떠나기 전에 기념으로 악수나 한번 해 주세요.”

이번 악수는 담백했다. 정말로 가벼운 흔들림 후에 떨어진 두 손. 아래에서 보호자용 침대를 꺼낸 지호는 자리를 권했다.

“염동력으로 펴 드리면 좋은데 지금은 능력을 못 써서요.”

“다치셨으니 쓰면 안 되죠.”

“왜 그만두세요?”

“무서워서요.”

상원은 덤덤히 속내를 밝히며 웃었다. 파리한 안색. 자세히 보니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균열 안정기 직전에 균열에 들어간 사람은 아마 앞 시대 이후로는 드물었을 터.

“괴물과 다시 마주하는 거 많이 힘들죠.”

“그건 괜찮아요. 이겨 낼 수 있었어요. 좀 웃긴 이야기지만, 저는 영웅이 되고 싶었거든요.”

상원은 덤덤히 당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숙련된 헌터들조차 들어가기 어려운데 상원에게는 허락된 출입. 심장이 떨리고 두려움이 밀려와 긴장됐으나 그보다 더 앞서는 감정이 있었다.

영웅심과 고양감.

임시 헌터들은 아직 파트너를 찾기까지 한참 시간이 남았기에 상원이 비교할 대상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본디 나약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이전의 자신과 달리 지금의 상원에겐 힘이 있었다. 벽을 부수고 한 번에 오 층 건물을 뛰어오를 수 있는 영화 속 슈퍼히어로 같은 힘.

그러니 괴물들을 단번에 물리치고 사람들을 멋지게 구해 내며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꿈 정도는 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주의 사항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상원은 균열 내부를 예의 주시했다.

공기가 일그러지며 색이 변하는 균열 경계는 생물 같았다.

호흡하면 오르내리는 가슴처럼 크게 밀려 났다 수축하기를 반복하는 공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벽. 상원은 함께 차출되어 온 임시 헌터보다 몇 걸음 앞서 걸어 균열 내부에 진입했다.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균열 내부를 가득 채운 이형 에너지가 수심 깊은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몸을 눌렀다. 상원은 너무 당황해 숨을 내쉬는 것도 잊고 계속 들이마시기만 하다 눈앞이 아찔해져선 주저앉았다.

누가, 누가 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억지로 고개를 들었을 때 상원의 눈에 보인 건 흰 빛이었다.

정확히는 균열 경계에 걸친 동료 임시 헌터 주변으로 발광하는 흰빛이라고 해야 옳았을까.

그가 진입할 때는 없었던 빛이었다. 상원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 것과 동시에, 그 헌터를 시발점으로 사방 천지에 흰빛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상원은 요란하게 뒹굴다 어딘가에 부딪쳐 컥, 하고 숨을 토한 다음에야 간신히 숨 쉬는 법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압박은 오래도록 그를 눌렀고, 가까스로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을 땐 상원보다 더 죽을 것 같은 얼굴의 임시 헌터가 덜덜 떨며 바닥에 엎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에게 기어 다가갔을 때, 상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신체 계열 헌터였기에 그 힘에 저항할 수 있었던 상원은 필사적으로 동료 임시 헌터 쪽으로 기어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색이 된 다른 헌터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로 뛰어오르는 괴물 역시도.

“멈추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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