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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54화 (55/260)

54화

앞만 경계하느라 혀를 깨물 뻔한 지호는 여전히 보현을 보조하는 주리를 보곤 약간 억울해졌다. 일반적으로 방벽 담당을 보조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다른 사람이 없으면 치유 계열이라도 뒤를 봐 준다. 아무래도 방벽에 오는 충격이 그대로 몸에 전해지다 보니 버티려면 도움이 필요했다.

위쪽에서 내리찍는 두 번째 충격. 지호는 컥, 하고 간신히 버틴 다음 소리쳤다.

“저, 저도 좀 도와줘요!”

“신체 계열에 다종 능력자잖아요. 염동력으로 본인을 바닥에 고정해요.”

주리가 냉정하게 지시하며 보현의 한쪽 어깨와 등에 손을 얹었다. 다친 쪽 팔은 아니다. 보현은 주리의 지지를 거치대 삼아 이형 에너지를 집중했다.

세 번째 격돌. 그 순간 모든 창날이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 놈은 비명도 없이 절명했고, 상황 종료를 알린 보현은 지호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잘했어요. 든든하게 버티더라.”

과연 잘했다고 할 수 있나? 지호는 발끝만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구했고, 많은 이들의 영웅이고, 이름을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유명 헌터라는 사실을 그저 듣기만 했지 실제로 목격한 건 처음이다. 보현은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데도 혼자 괴물을 사냥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갑자기 보현과의 격차가 체감되며 이 자리에 있는 게 잘한 선택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 헌터의 팔을 잘라먹은 건 도대체 뭐 하는 놈일까?

지호는 치유계 임시 헌터가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것에 감사를 표하며 방벽을 얇게 줄였다.

주리가 적색경보를 녹색으로 되돌리며 사냥 보고를 올리는 동안 보현은 괴물 시체에서 마정석을 추출했다.

“다행히 패턴을 아는 놈이라 금방 잡았어요. 들개 변종인데 몇 번 만난 적이 있거든요.”

“원래 공격할 때 보조가 필요한가요?”

“건강할 때였으면 아니었을 거예요. 근데 다친 상태로는 에너지가 불균형하게 튈 우려가 있어서요.”

“언니가 위험한 거잖아요.”

“그래서 저랑 충돌할 일 없는 신체 계열 계통 파트너가 필요한 거예요. 문제 시에도 제 이형 에너지가 파트너의 능력을 교란할 일이 없거든요. 지호 씨가 보조했으면 혼선이 왔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파트너는 할 수 없다고 말한 거고.”

감정적 이유도 아니고, 행정적 이유도 아니다. 순전한 실리적 이유. 지호는 보현이 보이는 명확한 태도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다른 파트너 찾아볼게요…….”

녹색 신호가 세 번 점멸한 후 큰 나무 두 개를 양쪽에 끼고 주변과 동화되어 있던 방벽이 스르륵 사라졌다. 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별 응용이 다 있었다.

“임보현 헌터님? 맞죠, 임보현 헌터님이시죠?”

“예. 지원 왔습니다.”

보현은 덤덤히 숨어 있던 팀을 훑었다. 방벽 담당과 치유 담당 두 사람이 전부다. 나머지는 떨고 있는 일반인이 다섯.

허옇게 질린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등짝, 거칠게 뜯긴 전투복을 보니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지원 팀에 연락을 넣자 이동 능력자들이 부재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난처한 일이다.

보현은 지호에게 생존자들을 포함할 크기로 방벽을 넓히도록 지시하며 속삭였다.

“멀리 오지는 않았으니 이대로 균열 경계로 후퇴할 거예요. 방벽 유지한 상태로 이동할 줄 알죠?”

“네! 제가 하나요?”

“혹시 몰라서요. 방금 같은 사태가 오면 저는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좀 달리기도 하고. 저였으면 두 번밖에 못 버텼을 거예요. 지호 씨가 신체 계열 병행이라 좀 더 튼튼한 거거든요.”

제 별명이 유리 대포라니까요, 하고 툴툴거린 보현은 생존자들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못 버틴다고? 지호는 설마 하면서도 방벽을 두껍게 강화했다. 네 사람이 들어갈 크기의 방벽과 아홉 사람 들어갈 크기의 방벽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다. 균열 내부에 이형 에너지가 가득 차 있어 더욱 그랬다.

“방금 제가 사냥한 들개 변종이 여러분을 습격했던 놈인가요?”

“들개요? 아뇨, 아니 저희가 만난 건 긴 용 같은 놈이었어요. 하늘도 날고…….”

“하늘을요? 사진 있어요?”

“흐릿하게 찍힌 것뿐입니다. 보고는 올려 놓긴 했는데, 센터에서는 유럽 측에서 발견되었던 빙겔드라큰? 뭐라고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놈 같다던데요.”

“중국도 일본도 아니고 무슨 유럽…….”

보현은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렸으나 곧 평정을 찾은 얼굴로 태연하게 생존자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괜찮아요. 놈들을 사냥할 것이 아니니 특징을 명확히 파악할 이유는 없습니다. 균열 경계가 멀지 않아요. 천천히 나가죠.”

보현은 뻔뻔한 척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손쉽게 속을 만큼 자연스럽기도 했다. 생존자들이 안심하자 이동이 좀 수월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이들 뒤편에서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으나 자연히 걸음이 빨라진다. 주리가 보현의 상태를 재차 확인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지호는 멀찍이 보이는 균열 저편에서 임시 헌터들이 생존자들을 마중 나오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러나 안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폐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위를 내리찍은 괴물의 힘이 아까 놈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버티지 못하고 휘청이는 지호를 다급히 붙잡은 주리는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보현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정뱅이처럼 흔들리는 팔. 시위를 당기는 자세를 취한 보현은 옆 헌터에게 소리쳤다.

“뒤돌아서 내 등 받쳐요!”

치유계 임시 헌터는 어쩔 줄 모르고 보현의 뒤에 섰다. 재차 다그칠 시간이 없다. 보현의 공격이 위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놈은 잽싸게 공격 틈을 빠져나가고, 커다란 입을 벌려 그들을 위협했다. 쏘아 내는 바람이 방벽을 밀어 지호의 몸이 쭈욱 밀렸다. 그는 당황해 염동력으로 자기 몸을 바닥에 고정했다. 주리에게 배운 대로다. 지호의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주리는 그를 놓고 보현에게 달려갔다.

단 한 순간이다.

보현의 공격이 놈을 스치고 지나갔다. 괴물은 괴성과 함께 물러났으나 보현 역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치유계 헌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현에게서 피어나는 파장이 이상할 정도로 날뛰고 있었다. 지호는 방벽을 유지해야 할지 보현을 챙겨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다시 한 번 달려든다면 당연히 방벽을 유지해야 하지만 심적으로는 이미 보현을 부축하고 있는 지호다. 놈은 괴성을 몇 번 질렀으나 다시 접근하지는 않았고, 방벽을 노려보다 하늘 높은 곳으로 유유히 오르기 시작했다.

“가…….”

보현이 주리를 붙잡으며 바깥을 손짓했다. 의미 명백한 눈빛. 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현을 업었고, 같이 고꾸라진 치유계 헌터를 붙잡아 일으켰다.

“여러분. 뜁시다.”

먼 곳에서 아까 그 괴물의 괴성이 울렸다. 세상에. 지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지금 저 높이에서 찍어 내리려는 건가? 지능 높은 개체가 드물게 나타난다곤 들었지만, 이건…….

“이지호!”

주리가 지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같은 신체 계열이라 억 소리 날 정도로 아팠으나 정신은 번쩍 들었다. 지호가 안 움직이면 아무도 못 움직인다. 그는 황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경계 너머에서 다른 임시 헌터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보현도 상대하기 힘든 놈이니 당연할 터.

땅 박차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십여 초.

본디 맞은 후보다 맞기 직전에 더 두려운 법이다. 지호는 이를 악물고 방벽 너머로 감지 파장을 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이러다 방벽이 너무 얇아 괴물이 그들의 머리를 씹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러나 해야 한다. 축 늘어진 보현의 팔이 온갖 불안한 상상을 몰고 왔다. 방벽이 비눗방울처럼 위태롭게 흔들리자 주리가 매섭게 소리쳤다.

“방벽 유지해!”

균열에 거의 다 접근했을 때 일부 용감한 임시 헌터들이 방벽을 펼친 채 이쪽으로 뛰어들었다. 감지 파장이 위로 뻗어 가다 놈과 만난 순간, 지호는 알았다.

못 막아.

그는 바닥을 박차며 염동력을 끌어다 주변 사람을 전부 후려쳤다. 생존자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닥에 엎어졌으나 헌터들은 전부 사방으로 굴러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보현을 업고 있던 주리는 밀리는 순간 힘이 가해지는 방향으로 한 바퀴 점프하는 묘기를 보이기까지 했다.

달려온 임시 헌터들 쪽 방벽으로 사람들을 내던지다시피 한 지호는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위에서 내리찍는 힘 때문에 방벽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놈이 노리는 게 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지호는 다급히 혼자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방벽을 내부에 재생성하며 눈가를 훔쳤다.

죽는 걸까? 결국, 이렇게 죽나?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빨이 피부에 와닿게 가까워진다. 강렬한 죽음의 예감.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둥거릴 힘 정도는 있었다. 눈물 때문에 목구멍과 이빨이 명확히 분간되지 않았으나, 지호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놈의 목구멍 안쪽을 겨냥했다.

침착하게 쏴요, 하던 차나연 헌터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머리를 짓씹으려 달려드는 이빨. 다른 헌터들의 공격이 약했는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시시각각 우그러지는 방벽 안에서 지호는 펑펑 울며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끝에서 맺히는 에너지 뭉치가 날카로워지며 동시에 놈의 이빨이 어깻죽지를 파고들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통은 에너지를 불균형하게 흔들었고, 지호 내부에 있던 상당수의 에너지가 손가락 끝에서 터져 나왔다.

퍽. 뭔가가 떨어졌다. 방벽에 가해지는 무게는 다르지 않았으나 압력이 사라진다. 그르르 하던 목울음도 천천히 가라앉으며, 지독한 입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호는 힘겹게 놈의 턱을 밀쳤다. 이빨이 빠져나가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부근의 이형 에너지를 모조리 끌어모아 팔을 치료하는 동안 다른 헌터들이 달려왔다.

얼굴이 아플 정도로 눈가를 벅벅 문지른 지호는 울지 않은 척하려 노력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날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걷긴 하지만, 이겨 냈다는 환희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균열 저편에서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지는 게 보인다. 당황한 몇 사람이 그들을 제지했다. 경계를 지나친 기자들인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봤을까. 균열 경계에 거의 다 도달한 시점이었으니 품질 좋은 카메라였다면 뭔가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찍은 것이 모두에게 도움되는 기록이라면 좋을 텐데. 팔을 치료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고, 그 전에 쏘아 낸 에너지 자체가 워낙 많았던 터라 스스로 알지는 못했으나 지호는 이미 탈진 상태였다.

누군가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보현은 아니었다. 익숙한 복장인데. 지호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표시하려다 소매가 뜨뜻하다는 것을 알고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피에 흠뻑 젖어 이빨 구멍 숭숭 뚫린 게 보기 흉하다.

이런 걸 보이면 창피한데. 지호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고작 그런 생각이나 하다 괴물 아가리 쪽으로 쓰러졌다. 달려오던 사람들이 기겁한 건 당연지사다.

뒤늦게 합류한 구조대가 생존자들을 비롯한 헌터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바쁘게 상태를 점검했다. 보현의 팀은 주리를 제외하면 전부 부상자이거나 중상자였다. 그들을 제외하고도 한 팀이 더 지원 요청을 하는 통에 내내 소란했다.

남부에서 수원 팀이 효율적인 동선을 짜 빠르게 사냥을 끝마치면서 급성 균열이 닫힐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퀸 패러사이트를 다른 방향으로 유인하며 부근에 남은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데까지 성공한 부천 3팀은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경계를 나섰다.

지호가 깨어났을 때는 모든 상황이 정리된 다음이었다.

보현의 생사 유무를 비롯해 건강한지, 또 무리하지 않았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부터 켜려던 지호는 병원 침대 옆에 놓인 신문에 자기가 찍혀 있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1면에 대문짝만하게, 꼴이 엉망인 채로 서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지호 본인이었다.

내적 비명을 내지른 그는 다급히 일어났다. 기자들을 본 것 같기는 했는데 이건. 헌터들 정보는 원래 퍼트리는 거 불법 아닌가. 병실 문을 열기 무섭게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이지호 헌터! 사흘 만에 깨어났는데 상태가 어떻습니까?”

“보호자가 그 임보현 헌터라고 알고 있는데, 강한 헌터라서 후계자 교육을 받는 겁니까?”

“이쪽 좀 봐 주시겠어요? 이지호 헌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더 많다. 물론 다 들리긴 했으나, 머릿속에서 걸러져서 말이 아닌 모양새로 뭉개져 웅얼웅얼 지호의 귀를 메우는 외침일 뿐인 말들.

지호는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같은데. 침대로 돌아와 앉아 다시 신문을 펼친 지호는 그의 삶이 평범함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호사가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입방아를 찧어 댄 탓에, 지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뭔가가 되어 있었다.

제일 큰 사진은 엉망이 된 지호 사진이고, 그 다음은 지호를 안고 있는 균열 구조대원 사진. 아마 승찬인 것 같았다. 다른 헌터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사진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경계까지 와서 사진을 찍었단 말인가? 생존자인 척하고 경계 부근을 얼쩡거리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방문객으로 위장하고 병실 부근에 숨어 있던 기자들이 모두 끌려 나간 뒤에야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는 얼굴이다. 이 병원이 어딘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처음 입원했던 그 특수 병동. 들어온 간호사는 지호가 신문을 들고 있는 걸 보곤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좀 괜찮아요?”

들고 있던 신문지를 와작 구긴 지호는 자기 얼굴을 그대로 찢어 버렸다. 살려고 그랬을 뿐이다. 그리고 살리려고.

신체 계열 능력자의 힘은 신문을 와작와작 구겨 작은 사이즈로 쉽게 압축해 버릴 만큼 강하다. 신문 하나를 손바닥만 한 공으로 만든 지호는 그걸 쓰레기통에 던지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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