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뻣뻣하고 우둘투둘한 살갗. 매끄러운 가죽보다는 늙은 코끼리의 살갗에 가까운 거죽.
거친 질감이 낯설다 못해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보현은 일어나려는 지호의 어깨를 꾹 잡아 누르며 지시했다.
“차근차근 확인해요. 확실히 죽은 놈이니 염려 말고.”
“이걸 왜 확인해야 돼요?”
“어떻게 생긴 건지 볼 수가 없잖아요. 만져서 추측하고 기억해요. 경험으로 체득한 것들은 잘 잊히지 않아요.”
보현이 지호의 손을 힘 있게 잡아끌었다. 어쩔 수 없이 지호는 그림자 호랑이의 사체를 쭉 더듬었다. 특징적인 부분으로는 뒷발의 두 배에 가까운 앞발,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의외로 작은 이빨들이 만져졌다. 확인하는 도중 놈의 몸이 몇 번쯤 푹 들어가고 꺼졌는데, 보현은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죽었고, 이형 에너지까지 추출당했는데요. 금방 가루로 돌아가지 못해서 천천히 무너지는 거예요. 먹히지 않은 괴물들의 끝은 보통 이렇거든요. 이것도 같이 기억하면 되겠어요.”
그림자 호랑이의 몸이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는 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몇 번 생존자 발견 연락을 받아 다른 팀을 지원하러 다녀온 주환은 아직도 그러고 있냔 얼굴로 둘을 보며 헛웃음 지었다.
“여태 안 끝나셨습니까?”
“현장 실습의 소중한 기회라서요. 알아서 돌아갈 수 있으니 먼저 가셔도 되는데요.”
“다른 건 아니고, 그 공중 비행 괴물 관련 영상이 아직 안 올라왔다고 팀장님이 그러시길래요. 보고는 올렸는데 영상이 없다고…….”
“아, 깜빡했네.”
1팀으로부터 생존자 발견 보고가 올라왔다. 주환은 보현이 영상 올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그쪽으로 이동했다. 이동 능력자들의 과로가 끝나는 날은 언제일까? 이제는 균열 안에서도 조금 편히 움직일 수 있게 된 지호는 머뭇거리며 보현의 눈치를 살폈다.
“팔은 좀 괜찮아요?”
“아직 남의 것 같은 느낌이 좀 남아 있긴 해요. 그래도 요새 기술이 좋아서 잘 붙을 거래요. 성 팀장은 뭐라던가요?”
“네? 어, 그냥 괴물들에 관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균열에서 만났던 것들…….”
“우리도 뭐 명확하게 아는 거 없는데. 그쵸?”
둘은 마주 웃었다. 생존한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지금의 경지를 이룩했단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호가 느끼기에 본인은 그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란 걸 알고 있다. 뒷걸음질 치다 잡은 쥐가 좀 어마어마한 놈이긴 하지만, 성 팀장에게 관련 정보를 읊었던 것을 떠올리며 그는 한숨 쉬었다.
“알고 있는 괴물이 나타나도 이렇게 얼어 버리는데, 아무 정보 없는 놈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옆 사람을 지켜야죠. 그러다가 운 좋으면 살아남고, 더 운이 좋으면 놈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고요.”
“언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균열에서 싸워 왔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보현은 잠자코 웃기만 했다. 영상 업로드가 끝나기 무섭게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간다. 혹여 도움 필요한 곳이 있나 알림을 빠르게 훑은 보현은 멀쩡한 한쪽 팔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음, 균열 북쪽에서 경계 경보 발령 났어요. 일단 균열 나가서 구조대 일 돕고 있어요. 급성 균열이라 더더욱 혼자 다니면 안 돼요.”
“언니는 지금 가려고 하는 거 아녜요?”
“저라고 여길 가로질러 가겠어요? 제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바깥으로라도 가긴 가신다는 거죠?”
“네. 임시 파트너가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어서요.”
지호의 눈에 의혹이 가득 들어찼다. 보현은 설명 없이 껄껄 웃으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임시 헌터인 지호의 것과 비교하면 메뉴가 몇 개 더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중 일부가 활성화된 상태였다.
“이쪽 봐요. 노란색으로 활성화된 부분이 경계 경보 올린 팀 부근 500m예요. 어, 사냥 팀이네. 퀸 패러사이트 유인조고…….”
설명하다 말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보현은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자조하며 전원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껐다. 이 팔로 뭘 하겠다고. 이런 탐색 작업만 해도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눈빛이 날아오는데, 위험 구역에 들어가려고 하면 다들 필사적으로 말릴 것이 뻔했다.
물론 그런다고 들을 보현이 아니었지만.
“이쪽이 구조 루트라 이쪽으로 계속 사람들 올 거예요. 방금처럼 그림자 호랑이 같은 은신 개체들만 주의하면 당장은 위험한 게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급성 균열이니 혼자 있으면 위험하거든요. 급한 대로 각성자들 중에 비상시에만 임시 헌터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올 건데, 그쪽이랑 손발을 좀 맞춰 보는 게 좋겠어요.”
“다들 임시 헌터인데 괜찮나요?”
“지호 씨랑 달리 다른 사람들은 정규 교육 다 이수한 사람들이에요. 단지 본인이 헌터의 길을 원치 않아서 그럴 뿐이지. 다음 구조대 차량 편으로 온다네요. 잘 기다릴 수 있죠? 균열 밖에서 대기해요.”
“언니는 위험 지역 가세요?”
“원수의 안부도 확인할 겸요. 깊게는 못 들어가요. 몸 상태가 최상이어도 접근하기 어려워서요.”
지호는 몇 번이고 위험한 짓 하지 않기로 약속을 받아 내고 나서야 보현을 배웅했다. 균열 경계를 통과하자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이형 에너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허전함이 밀려왔다.
오랫동안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나온 것 같기도 하고, 기분 좋게 몸을 누르고 있던 두꺼운 솜이불에서 빠져나온 것 같기도 하다. 지호는 그 허전함을 떨쳐 내려 주변부터 살폈다. 아까 구조된 몇 사람은 이미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구조대원들이 지호 쪽을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임시 헌터분? 혼자예요?”
지호는 그가 1팀에서 열외되었다는 사실을 조그맣게 털어놓으며 부끄러워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버텼는데 혼자 낙오된 것 같아 어쩐지 미안했다.
그러나 구조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지호를 위로했다.
“정식 헌터도 아니고 임시 헌터인데 현장 나온 것만 해도 어디예요. 항시 도움은 감사한 일이라고요. 여기서 저희 힘이 되어 주시면 기쁠 거예요.”
여기저기에 승찬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지호는 괜히 눈가가 찡해져선 알겠다고 고갤 끄덕였다. 출동 전 받은 연락을 제외하곤 승찬에게서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쪽에서 경계 경보가 뜬 것 같은데 괜찮나. 북쪽이면 계양산 방면이었다. 지호는 메신저 어플을 연신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초조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노란 경보가 하나 더 뜬다. 지호 아이디로는 세부 정보를 볼 수가 없었다. 계양산 부근은 다 노란색 같다. 사냥 팀 셋이 전부 경보를 띄우면 이렇게 될 수도 있을 터. 조금 지나자 붉은색도 떴다.
[도플갱어 출몰. 변이 전 형태에 유의.]
새 팝업 창으로 알림이 떴다. 지호는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만 붙든 채 올라오는 보고를 읽었다.
생존자 다수를 발견한 와중에 퀸 패러사이트가 근접 거리 이내에서 움직이지 않아 구조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도 올라왔다. 보현이 이쪽으로 간 건 아닐까. 본인이 몸이 성치 않으니 주의하겠다곤 했지만, 여기 온 것부터 이미 그런 말을 믿을 상황은 아니었다.
구조대 차량에서 무전이 울렸다. 대원 하나가 무전을 받자 잡음 없이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
-통신망에 대기 중인 구조 팀 응답 바람. 당소 지휘 통제실. 이상.
“청라 구조 2팀 송신.”
-구조 인원 다수 목장 부근에 숨어 있음을 확인. 농업 체험관을 중심으로 구조 작업 예정. 구조 차량 요청합니다.
“계산 1동은 어떻게 합니까?”
-외부 지원 팀 이동 중. 현재 비상 구역에서 가까운 차량 우선 선발합니다. 청라 2팀 이동 바람. 이상.
아마 각성자들을 태우고 온다던 차량이 이쪽 구조 작업을 도울 모양이었다. 구조대원들은 빠르게 차량에 탑승했고, 마지막 대원이 지호에게 손짓했다.
“같이 가죠! 저쪽에 한 명이라도 더 급한 것 같은데.”
“제가 도움이…….”
“저희도 가는데요. 서둘러 타십시오!”
거절할 틈이 없다. 다급히 고정해 놓은 장비들을 수납하는 대원들 틈에 휘말려 버린 지호는 떨떠름한 얼굴로 균열 어플과 현장 공지를 확인했다. 괜찮겠지. 위험한 상황이 아니기를.
계양산 방면으로 접어들자 교통 통제 하는 경찰들이 곳곳에 보였다.
조금 더 들어가니 일반 차량은 아예 통행할 수 없게 막아 놓았다.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다고 돌아가라고 막는 와중에 몇몇이 자기는 기자라며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억지를 부린다.
개중 일부가 건물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차를 타고 지나가는 통에 경찰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저 사람들이 균열에 들어가고 그러진 않겠지. 아무리 기자고 특종이 중요해도 자기 목숨만큼 중요할까. 건물과 도로가 망가진 부근에 오자 균열 경계에 왔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위험 구역까진 아니다. 경계 구역일 뿐.
북쪽 균열은 강 앞 줄기 부근에 어른거리며 멈추어 있었다. 물줄기가 균열이 퍼지는 걸 막는 것 같다. 그러나 악성 균열이니 저 안의 괴물을 사냥하지 않으면 저 균열이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갈 것이다. 실제로 균열이 생성된 후 안정기까지 며칠이 소요되었는데, 그사이 균열이 넓어져 경계에 걸쳐 있던 구역 중 균열로 들어가 버린 곳도 더러 있었다.
지호는 배운 것들을 생각하며 얼굴을 굳혔다. 강변 쪽으로 구조대 차량이 몇 대 보였다.
산 방향에서 바람이 분다. 바람결 사이사이 악취가 스며 있었다. 승찬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차량이 멈추고 내려서자 몇 사람이 지호에게 손짓했다. 가슴에 붉은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랑이 아니라 빨강. 헌터로 살아가진 않지만, 급성 균열이 터질 때면 달려와 주는 각성자들의 표식이었다.
“임시 헌터들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고 들었는데 왜 이쪽으로 왔어요?”
“상황이 좀 그래서 백업 팀으로 빠졌었어요. 구조대분들이 이쪽으로 이동하시길래…….”
보현은 보이지 않는다. 노란 명찰을 보고 습관적으로 임시 헌터를 챙긴 다른 각성자들은 소식 올라오는 것을 유심히 보며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전투 상황이 없기를 바라지만, 엄폐 가능 구역이 아니면 어쩔 수 없어요. 특기는 뭐죠?”
“이형 에너지 구현화로 원거리 공격 조금 하고 방벽도 칠 수 있어요. 신체 계열도 있고, 다른 것들은 아직 일인 분 할 자신이 없어서…….”
“재주가 많은 친구네. 고생했겠어요.”
균열이 이스트 들어간 빵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경계가 확장된다는 경고 섞인 외침과 동시에 일부 구조대원들이 차량으로 뛰어들었다. 간발의 차로 후진한 차량과 그렇지 못한 차들. 당장 균열에 들어간다고 위험할 건 없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했다.
“가까운 곳에 퀸 패러사이트의 숙주가 있어요. 그리고 보고받기로는 도플갱어가 있다고 하는데, 뭐가 비칠 이유 없는 곳에서 거울 같은 게 보이면 곧바로 공격하라더군요. 정확한 건 아직 다 몰라요. 그런 보고가 있었어요. 분명 죽인 괴물이었는데 다친 부위까지 똑같은 놈이 반대 방향으로 뛰는 것도 목격되고.”
“사냥 팀 분들은 괜찮을까요?”
“아직 사상자 보고는 없어요. 참, 나는 인천 각성자 지부 최정엽이에요. 우리는 딱히 직위가 있고 그런 건 아니라서 이름으로들 부릅니다. 병아리 학생은 이름이 뭐예요?”
“지호예요. 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