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지호는 주환을 깔아뭉갠 채 방벽을 펼쳤다. 거의 동시에, 매서운 돌격이 그들을 덮쳤다.
짓눌린 주환이 비명을 토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생존자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고, 지호는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힘을 혼자 받아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눌린다. 그대로 밀려 방벽이 깨지면 이 네 사람은…….
“헌터 기본 수칙 하나. 헌터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명랑하기까지 한 음성과 함께 몸을 누르던 압박이 사라졌다. 건물 한쪽에 처박힌 괴물은 그르르, 하고 울음을 토함과 동시에 머리를 잃었다. 버둥거리던 몸이 추욱 늘어지자 보현은 그것에게서 마정석을 추출했다. 괴물의 몸이 습기를 한 번에 쭉 빨린 건조육처럼 말랐다.
“어, 언니? 아니 언니가 어떻게…….”
“파트너를 못 구했다고 혼자 다니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다니요. 이래서 내가 헌터들을 못 믿는다니까. 아무리 비상시여도 기초 교육은 확실히 이수해야 할 것 아녜요?”
보현은 지호를 일으킨 뒤 그 아래에 깔려 있던 주환을 살폈다. 움직이자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어디가 부러진 모양이다. 하기야, 넘어진 모양새가 너무 나빴다. 지호는 당황했으나 주환의 옷을 털어 주며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죽는 것보다 낫죠. 일단 나가는 게 어떨까요? 여긴 좀 위험해 보이는데…….”
“사실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왔어요. 이상한 게 나타났다길래.”
주환의 말을 받은 보현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슬쩍 웃었다. 생존자들을 챙긴 세 헌터는 곧바로 균열 밖으로 이동했다. 대기 중이던 구조대원들이 생존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하고 필요한 처치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지호는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 싸한 느낌은 다른 데서 오는 게 아니었다. 확실히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순식간이었고, 지호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하던 감이 아니었다면 바로 막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잘했어요. 아주 잘했어.”
“언니는 환자잖아요. 어떻게 여길 왔어요?”
“차 타고 왔는데요?”
보현은 구조대 차량 한쪽을 탕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익숙한 농담을 자연스럽게 흘려 넘긴 지호는 생존자들이 처치받은 후에 주환 역시 치료를 좀 받을 수 있을지 질문하며 미안해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죠?”
“예? 어, 네. 저 균열이 좀 이상한 느낌이더라고요.”
“그거 말고요. 저 사람들 구하려다 다친 상황인데 치료받는 걸 미안해하는 헌터가 이상하잖아요.”
구조대 차량에는 마석 치료기가 상시 갖춰져 있다. 균열에서 다친 상처는 치료 계열 힘이 아니고는 더디 나으니까. 아주 안 낫는 건 아닌데, 그걸 자연 치유되게 놔두는 동안 온갖 잡균이 상처를 들쑤셔 더 큰 병으로 발전하기 일쑤다. 지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헌터분들 다 저런 것 같은데요.”
“부천 협회는 특히 그렇죠.”
보현은 마석 치료기 빛으로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주환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넘어지며 긁히고 찢긴 상처가 보이자 몇 배는 더 미안해졌다. 지호는 치료기의 빛이 천천히 주환의 몸을 감싸는 것을 바라보다 질문했다.
“헌터를 싫어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치길 바라지 않아서 오신 거죠? 언니는 다른 누구보다 경험이 많으니까.”
“아뇨. 아는 게 힘이라서 온 건데요? 먼저 알아야 뒤통수 안 맞아요.”
“누구한테요?”
보현은 대답 대신 균열 안쪽 하늘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눈알 괴물을. 놈은 한쪽을 빤히 응시한 채 멈추어 있었다.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염동력 계열 이형 에너지로 하늘을 날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든다.
“감지 파장을 역으로 감지한다고 했었죠? 물리적 타격은?”
“시도 안 해 봤어요…….”
보현은 앞으로 방벽을 펼친 모양새 그대로 오십 센티가량 떠올랐다. 설마? 지호와 눈이 마주친 그는 생긋 웃었다.
“그럼 시도해야겠네. 이 근방에서 나보다 방어 능력 좋은 사람 없어요. 공격도 그렇겠지만.”
“예? 아니, 언니가 방금 헌터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고…….”
“저는 이제 정식 헌터 아니잖아요. 일개 대기조인걸.”
말도 안 되는 대답 후에 보현의 몸이 빠르게 치솟았다. 깔끔한 도약과 비행. 지호는 저도 모르게 보현의 에너지 운용을 눈으로 살피며 손을 꼬옥 모아 쥐었다. 만약 위험하면 어쩌지? 퀸 패러사이트처럼 또 다른 능력을 갖춘 놈이면?
습관적으로 감지 파장을 펼치려던 지호는 힘을 거두고 눈에만 이형 에너지를 집중했다. 부평 장인들이 마도구를 제작할 때 에너지를 다루는 방식이다. 물체의 본질을 보는 데 유용한 안력을 트이게 해 주기도 했다.
눈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모양새를 간신히 극복한 다음에야 지호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보현의 몸은 어느새 눈알 부근까지 치솟아 있었다. 두꺼운 에너지 방벽이 견고하게 짜여 있었으나, 눈알 괴물에게서 느껴지던 힘 때문에 괜찮으리라 믿기 어려웠다.
“임보현 헌터님은요?”
“저기, 위로 올라가셨어요.”
주환은 경악하며 하늘을 삿대질했다. 날아오르는 모양새로 짐작할 때 적어도 십 층 이상의 높이. 아무 위험 없는 곳을 날아갈 때도 에너지 조정이 어려운데 하늘을 나는 개체가 있는 곳에 제 발로 뛰어 들어가는 꼴이라니. 주환은 치료를 위해 열어 놓았던 전투복 상의를 여미며 외쳤다.
“백업 가요!”
“예?”
이동 파장이 지호를 빠르게 휘감았다.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눈알 괴물의 바로 아래로 이동해 온 것을 눈치챘을 땐 늦었다. 놈은 보현이 접근할 때엔 미동도 없었던 주제에 지호가 아래에 나타나기 무섭게 곧바로 눈알을 굴려 댔다. 망할. 이동 능력에 저항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르릉, 하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울린다. 가슴 철렁하는 소리였다. 최근에 들은 적이 있어 무엇인지 식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환은 보현의 방벽이 생겨나기 무섭게 한쪽에 발톱 자국이 나는 걸 보고 기겁했다.
“아니, 아까 움직일 땐 아무것도…….”
“은신 개체예요. 그림자 호랑이요!”
좀 전에 공격이 들어온 방향에서 한 번 더 발톱 찍히는 느낌이 났다. 지호는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며 주환을 바짝 잡아당겼다. 실내도 아니고 탁 트인 외부다. 뭐가 보이거나 흔적을 쫓기 쉬운 것도 아닌 상태에서 멀찍이 떨어진 다른 헌터까지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와앙! 고양이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더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아까보다 위쪽이다. 한 마리가 아닌가? 지호는 너무 당황해 놈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걸 잊었다. 어디에서 뭐가 오는지 알아야 대응을 하지. 당장 현장에 뛰어들자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지식은 휘발되고 눈앞은 허옇게 탈색되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주환이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게 지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끈적하게 따라붙던 불쾌한 감각이 어깨에서 슬쩍 떨어졌다.
무작정 방벽만 두껍게 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지호의 방벽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보현은 혀를 차며 손을 툭툭 흔들었다.
“흠, 책상에 앉아 공부할 때랑은 역시 좀 다르죠? 얌전히 시제품 구경이나 해 봐요. 이형 에너지 계열에게 곧 보급될 무긴데…….”
그림자 호랑이가 바닥을 박차는 징후를 포착한 것과 보현이 손을 앞으로 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시계 찬 손목이 탄력 있게 흔들렸다. 지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손바닥 아래에서 강렬한 에너지 반응이 포착된 까닭이다. 방벽을 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눈에 집중한 에너지를 흩어 버리지 않은 까닭에 지호는 그 신기한 광경을 빠짐없이 목격했다.
보현의 손바닥 아래로 빛줄기가 생겨났다.
아니 저게 뭐야. 지호의 머리가 혼란으로 가득 찬 순간 보현이 그걸 움켜쥐고 허공을 찍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린다. 주환은 기겁해 지호에게 찰싹 달라붙고, 그를 반쯤 밀어 내며 지호는 보았다. 희미한 그림자 호랑이의 에너지를 가르는 선명한 빛의 흔적.
“아니, 검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무슨 몽둥이가 나와? 이래서 시제품은 영…….”
심지어 오래 쥐고 있을 수 없었는지 보현이 아뜨뜨, 하며 손을 펼쳤다. 빛줄기는 아래로 떨어지기 무섭게 사라졌다. 보현의 새빨개진 손바닥만 방금 상황을 말해 줄 뿐이었다.
“이제 괜찮아요. 방벽 치워도 돼요.”
“저건요?”
“음? 못 봤군요?”
보현은 증거 자료를 촬영해 두려고 영상 녹화를 했다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니까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쥐고 한 손으로 괴물을 상대하려 했다는 의미 아닌가. 지호는 창백해진 얼굴로 보현과 핸드폰을 번갈아 보다 한숨 쉬었다.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안 보면 치워요.”
“볼게요. 봐요!”
지호는 제게 착 붙어 있던 주환과 함께 보현이 찍은 영상을 봤다. 흔들림이 심했으나 주요 장면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호가 아래에 나타나기 무섭게 눈알이 데구르르 구르더니 아래로 고정되는 모양새가 기묘하다.
보현은 아래쪽과 눈이 보는 쪽을 번갈아 촬영한 뒤, 이형 에너지로 만든 뾰족한 창날로 눈알을 꿰뚫었다. 그것은 풍선처럼 터져 나갔고, 질척한 액체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까지 촬영됐다. 그걸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바람 덕이었다.
“물리 방어력 제로예요. 바늘로 찔러도 터지겠더라. 대신 이형 에너지 자체에는 대단히 민감한 것 같더군요. 이동 에너지 사용 후에 옅은 파장 퍼지는 거 알죠? 그걸 감지해서 눈 굴리는 것 같던데, 아래에서 무슨 특별한 징후가 있던 건 아니죠?”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 호랑이의 시체에서 마정석을 추출한 보현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주환에게 그걸 던지며 혀를 찼다.
“임시 헌터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정식 헌터가 굳어 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어린애 데리고 누가 따라오라고 했어요? 위험할 뻔했잖아요. 얘가 방어계 능력 보유자 아니면 어쩔 뻔했어요?”
주환은 입을 벙긋거리다 난처한 시선으로 이쪽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호는 어깨만 으쓱였다. 다다다 잔소리를 퍼부은 보현은 주환의 손목을 쑥 당겨 잡고 그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이만 돌아가죠. 영상은 제가 알아서 올릴 거고, 지금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거든요.”
“그냥 돌아갑니까?”
“그럼. 다른 눈알이 있나 수색하다 새로운 괴물과 전투라도 벌여야 할지?”
주환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헌터들 중에 그 임보현 헌터에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 당연한 모양새다.
정작 여러 수칙이란 수칙은 다 어긴 주제에 뻔뻔한 얼굴로 지호를 부른 보현은 바닥 부근을 더듬었다.
“여기, 이 부근인데. 마정석 추출이 끝나도 균열 안에서는 시체가 천천히 없어지거든요. 외부에서랑 좀 다르죠. 이형 에너지가 작용해서라고들 말하긴 하는데, 진짜 과학적 원리가 뭔지까진 아직 몰라요. 없어지기 전에 좀 만져 봐요. 이런 느낌이니까.”
“시체를요?”
“살아 있는 건 만질 수 있어요? 몸이 위험한 거랑 마음이 위험한 거, 어느 걸 택할래요?”
둘 다 썩 고르고 싶은 선택지가 아니란 사실이 지호를 갈등하게 했다. 다만 초조한 얼굴로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주환과 시체가 사라지기 전에 빨리 빨리를 외치는 보현 사이에서 지호가 고를 수 있는 건 사실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보현이 손을 얹고 있는 허공 부근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