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두 사람이 헤쳐 나왔을 몇 년도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를 잃고 난 이후에 보현이 살아왔을 세월은 더더욱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호는 하려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같은 병아리들 그룹의 새 친구들은 벌써 파트너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교육이 극단적으로 단축되면서 그들이 배워야 할 이론 교육은 실습 병행 교육으로 대체되었고, 따라서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파트너를 찾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지호는 보현 이래로 두 사람이 더 없었던 올라운더다. 물론 이동 능력은 혼자 이동하는 게 전부이고, 치유 능력 또한 치유계로 지원하기는 대단히 미미하긴 하지만 보유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례적인 상황이다. 보현은 슬픔을 익숙하게 갈무리하며 웃었다.
“준우 이야긴 다른 사람들한테 하지 마요. 없는 사람 뒤 캐는 거 불쾌하거든. 연구며 실험이며 관심들 많은 거 아는데, 허락할 수 있는 부분이 아녜요. 누가 묻거든 그렇게 전해요. 선 넘으면 내가 조져 버릴 거라고.”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보현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훈련 당시의 생각은 결국 생각으로 끝나야 할 것 같았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지금, 도저히 다시 헌터를 함께하자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지호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다쳤던 상황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 퀸이라는 괴물을 또 만났어요? 그 균열에서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보현은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눈이 웃고 있질 않다. 그는 주무르던 팔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놈이 나타난 균열에는 들어가지 마요. 비록 내가 헌터 일은 더 안 하기로 했지만, 퀸은 사냥할 거예요. 그게 제가 정했던 우리 팀의 마지막 임무니까. 팀장이 종료를 선언하지 않았는데 끝났을 리가요.”
“팀이라니, 언니는…….”
“저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 이야기는 그만하죠. 퀸을 제외하고 새로운 코드 레드 개체가 나타났다고 들었어요. 특수 능력이 아주 골치 아프다던데요.”
보현은 익숙하게 말을 돌렸다. 그와 대화할 때면 가끔 느꼈던 벽이 지호를 턱 가로막았다. 도플갱어의 특징에 관해 기계적으로 읊으며 지호는 깨달았다.
보현은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호의 보호자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가족이 되어 줄 생각까진 없다. 각성자이기에 보일 수 있는 선량함과 호의로 착각할 뻔했다. 보현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자리는 이미 난 자리다. 아무도 대체할 수 없으니, 보현은 그 자리를 원수의 피로 채울 것이다.
“도플갱어의 출현이랑 언니가 다친 사고가 관련이 있는 줄 알았어요.”
“현장에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던 건 아녜요. 제가 마주친 건 극도로 공격 계열로 분화한 괴물이었는데……. 뭐, 정확히는 놈들을 잡아서 연구해 봐야죠. 퀸과 도플갱어가 같은 균열에서 나타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나요?”
“같은 균열이라니……. 양 박사님이 균열이 전부 연결되어 있다고 발표했어요. 모든 균열은 하나의 세계라는 뜻이라고…….”
보현은 사납게 웃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이라 지호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렇죠. 맞아요. 전에 균열에서 만난 놈을 또 만난 적도 있어요. 우리 세계와 놈들의 세계가 연결되는 것. 저는 그게 균열의 본질이라고 파악하고 있어요.”
“퀸에게 잠식당한 사람이 균열 경계를 지날 때 빛이 되어서 사라지는 걸 봤었어요.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했지만 그렇게 못 했고요. 근데 언니가 나타날 때는 반대였어요. 균열 경계가 분명한 지점에서 나타났다고요. 양 박사님은 그걸 궁금해하세요.”
“양솔이 교육을 잘했네. 나한테 그걸 물어보라고 하던가요?”
“그냥 제가 궁금하기도 했어요……. 균열에서 감지 능력을 펼쳤는데 이상했어요. 세계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은 것 같았거든요.”
말을 돌리려는 꽤 많은 시도가 전부 무용해지자 보현은 조용히 말했다.
“맞아요. 저쪽 세상은 꽤 넓어요. 균열 열릴 때 안쪽으로 구호품과 식량을 엄청 많이 던지는 거 알고 있나요? 균열이 닫히기 전에 구조되지 못한 채로 거기 갇혀 버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서인데, 가능성이 전혀 제로는 아녜요. 괴물들은 일반적으로 열린 균열에 끌리고, 균열이 닫히고 난 다음에는 또 다른 열린 지역으로 이동하니까. 운이 좋고 때가 잘 맞아 거기서 남은 식료품이며 음식들로 버티고 있으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죠. 서울 지부에선 상위 헌터들 틈으로 암암리에 도는 이야기예요. 정부에서도 알고 있고.”
“그걸 왜 비밀로…….”
“균열과 균열이 연결되어 있고, 거기 살아 있는 사람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단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요? 지금도 구조 단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기 가족, 자기 친구, 자기 지인을 구해 달라고 아우성치는데. 특히나 높으신 분들이 원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귀찮게 굴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헛소리하지 말아요.”
보현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 어조가 너무 강경해 지호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팔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인지 연신 다양한 동작을 해 보이며 보현은 철저히 객관적인 입장을 전했다.
“나를 비롯한 능력 있는 각성자들이 그들을 구하지 않기로 한 건, 그러기 위해 희생될 각성자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어디에선가 균열은 열리고 있고, 구조해야 할 사람들은 많아요. 균열 내부로 들어갔다가 입구가 닫히기라도 하면? 각성자 수는 가뜩이나 적어요. 거기에 헌터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더 적죠. 열 명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명을 구하겠다고 열 명을 팽개칠 순 없어요. 내 사랑, 내 가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상황은 잘 없죠. 상당수의 각성 단계에서 대부분은 그 소중한 사람을 잃으니까. 지호 씨, 바로 당신처럼.”
다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말해서 미안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해서 만용을 부려도 되는 건 아니에요. 고립된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사람을 파견할 순 없고, 균열 경계를 통과할 수 있는 기계는 없으니 정찰도 보급도 전부 알아서 해야 해요. 괴물이라도 씹어 먹나요? 물론 괴물 중에 먹을 수 있는 개체가 있긴 해요. 그런데 만약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으면? 생존자는커녕 우리가 소중한 헌터를 한 사람 더 잃을 뿐이라면?”
지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보현은 마음만 앞서는 임시 각성자를 노려보며 단단히 팔짱을 꼈다.
“보통 균열이 닫히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해야 해요.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실종되었다고 말하죠. 시체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실종자로 분류돼요. 지금도 실종자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그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노력만으로도 너무 벅차요. 균열 저편으로 넘어가는 도박은 절대 하지 마요. 나도 반 죽어서 돌아왔잖아요. 그나마 송도에 균열이 열렸다는 걸 기억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 없어요.”
“저기, 저, 그러면, 계양하고 송도 사이엔 아무것도 없던가요?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그 흔적 같은…….”
균열이 열린 곳이 국제도시 방향이고, 두 균열을 직선으로 이으면 지호가 구조되었던 바로 그 균열이 열린 위치가 잡힌다.
보현은 지호가 뭘 말하려는 지 알곤 쏘아붙이려던 날카로운 말들을 입 안에 뭉개 버렸다. 이야기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졌다. 어른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지호는 그가 빠져나온 균열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현은 지호에게 사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심하게 말해서. 지호 씨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무작정 자신을 던진다고 다가 아녜요. 지호 씨는 아직 좀 더 많은 걸 배워야 해요. 그런 일이 또 벌어지더라도 다시 재앙에 먹히지 않게. 그것까지는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파트너는 되어 줄 수 없지만.”
지호의 입이 열리려다 말았다. 보현은 픽 웃으며 지호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모를 줄 알았어요? 나한테 파트너 되어 달라고 온 병아리들만 한 트럭이에요.”
“아니, 그. 저는…….”
분명 파트너 이야길 꺼내려고 대화를 시작한 거긴 하지만, 이야길 듣다 보니 다른 데 생각이 닿았다. 균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냥 사람일까? 아니면 균열 때문에 거기 사는 것들과 비슷하게 변하는 걸까.
애초에 균열에 흐르는 이형 에너지 자체가 이상하다. 지호는 각성했음을 깨달았을 땐 잘 몰랐지만, 송도 균열에 들어갔을 때는 확실히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외면하던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 새로 나타난 괴물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언니가 저 구해 주셨을 때 그 부근에 좀 이상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사람 같진 않아요.”
지호는 어느새 진지해진 보현에게 그가 겪은 각성 이야기를 찬찬히 꺼내기 시작했다. 샛별이를 만나고 수희를 만났던 당시의 기억. 거기에서 지호에게 감지되지도 않고 괴물에게 목표로 인식되지도 않는 남자 이야기가 나오자 보현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신체 계열 각성자가 있는 힘껏 걷어차는데도 멀쩡한 건 사람일 리가 없는데. 남동구 균열에 그런 게 있었다고요? 하지만 못 봤었는데…….”
“괴물들이 각성자의 파장을 쫓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 힘을 감지할 수 있는 괴물도 있는 것 아닐까요? 저만 있을 땐 충분히 노릴 수 있는 먹이였지만, 언니가 왔을 땐 아니었다면 도망간 것일 수도 있고…….”
구조된 후 기생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건 무의식적으로 죽던 당시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 했던 행동이다. 남동구 균열이 닫힌 후, 지호는 그때의 악몽 역시 그곳에 묻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피해를 볼 사람이 더 없는 편이 나았다.
“그때 수희 언니는 그게 사람들을 조종한다고 했었어요. 하지만 김 반장님이 보여 줬던 퀸 패러사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거든요. 제가 계양 균열 입구에서 봤던 감염된 구조대원도 뭐랄까, 사람 같은 모습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확연히 구분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은 좀 이상한 모양새긴 해도 사람 같긴 했었거든요. 이게 퀸이랑 관련이 있는 건지 다른 괴물이랑 관련 있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인간을 조종하거나 인간과 비슷하게 모습을 바꾸는 개체가 퀸이 있는 균열 근처에 나타난 게 우연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한참 고민하던 보현은 말해 줘서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끝나고 연신 울리던 핸드폰을 확인하자 단톡방에 백여 개가 넘는 대화가 올라와 있었다. 지호는 얼른 들어가 보겠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보현은 웃으며 인사한 뒤, 지호가 센터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곤 얼굴을 싹 굳혔다.
실종자들은 잠정적 사망자일 뿐이었지만, 만약 괴물의 숙주가 되거나 그것들에 조종당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살아 있다면…….
익숙한 에너지 파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보현은 곧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데리러 온 박 팀장이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고, 둘의 모습은 금세 센터 앞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