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상황이 이렇다는 걸 설명하려고 준우는 보현의 핸드폰으로 균열 지도를 켜 몇 가지를 설명했다. 현상도 더듬거리며 기억나는 것들을 이야기했고, 여기에는 뭐가 있고 여긴 뭐가 있었다던 것들을 읊었다.
차를 안쪽에 대 놔야 하지 않나 싶어 소방차 쪽으로 걸어간 보현은 말을 잃었다. 소방차 옆면 호스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멀리서 느껴지던 땅이 흔들리던 느낌은 거대한 괴물의 그 발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먼지구름 피어나는 것이 보인다. 호스가 길게 늘어져 있는 길 쪽이었다.
보현은 준우가 반쯤 부축하고 있는 현상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뛸 수 있나? 이대로 준우가 그를 들고 뛰어 준다면 도망가는 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다. 괴물들이 또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게 되면 어쩌지.
둥글게 퍼지던 피가 생각나 덜컥 겁이 났다.
머리로는 괴물의 피였다고 안심하려 백번도 더 노력했으나 불가능했다. 보현의 마음속에서 준우는 죽었다 살아 돌아온 것과 다름없었으니. 호스가 한 번 더 흔들렸고, 보현은 소방차 운전석에 키가 꽂혀 있는 걸 봤다.
대형 면허는 없다. 면허는 스무 살 때 따고 장롱에 처박아 놔서 운전도 할 줄 몰랐다. 확실하게 아는 건 액셀과 브레이크의 용도뿐.
고민할 새가 없었다. 한두 놈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괴물은 준우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보현은 서둘러 운전석에 올랐다.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준우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보현은 씩 웃었다.
얼굴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손은 달달 떨렸다. 소방차 뒤편으로 까맣게 몰려오는 괴물들이 보였다. 욕설이 절로 나왔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 보현은 차에 오르자마자 기어를 바꿨다. 그러고 곧장 액셀.
“야, 너?”
준우는 당황해 현상을 바닥에 내팽개칠 뻔했다. 다 망가진 소방차가 출발했다. 아무리 몸이 튼튼해지고 속도가 빨라졌기로서니 저런 큰 차 앞으로 가로막는 짓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머릿속 인식으로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니.
멈칫거리느라 늦었다. 액셀을 풀로 밟았는지 소방차는 요란하게 달려 나갔다. 그 뒤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호스 줄.
땅이 흔들린다.
착각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괴물들이 우르르르 소방차를 따라 달렸다. 개중 일부가 달리다 말고 멈춰 서더니 뭔가를 찾는 것처럼 아파트 단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준우는 저도 모르게 현상을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졌다. 수가 많았다. 그리고 멈춰 서더니 아파트 쪽으로 방향을 트는 놈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고.
그러나 그 수는, 소방차를 따라간 놈들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균열 안쪽에 얼마나 많은 괴물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수 절반은 다 튀어나온 것처럼 놈들은 소방차를 따라 달려갔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흔들리는 와중에 준우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고, 그 와중에도 최적의 도주 루트를 살피며 주변을 파악했다.
막았어야 했는데.
차에 오르자마자 상황이라도 눈치채고 조처를 해야 했다. 알았다면 보현을 데리고 저층에라도 숨을 시간은 충분했을 테니까.
2층을 훌쩍 뛰어넘어 현상을 아파트 복도에 내려놓은 준우는 이를 악물었다. 괴물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무작정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뭔가를 찾는 것 같은 행동.
설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를 보았다. 바닥에 엎어진 채 떨고 있는 현상 외에는 달라진 점이 없다. 아마도 그와 마찬가지로 죽었다 살아나 특별한 힘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남자.
무슨 차이가 있지?
준우는 그의 멱살을 잡으며 낮게 읊조렸다.
“당신, 뭘 숨겼어?”
현상은 흐느끼기만 했다. 괴물이 또, 괴물이 또, 하는 중얼거림만 연신 읊을 뿐이다. 또? 준우는 그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아까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괴물이 없는 게 맞냐고. 어디선가 자꾸 튀어나온다고.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미친 새끼가 다 알면서!”
“여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안전한 곳, 안전한…….”
준우는 현상을 거칠게 들춰 멨다. 이놈을 따라 괴물들이 단지 내로 들어온 거라면 여기 두어서는 안 된다. 가족들도 위험하고 아파트에 숨어 있는 사람들도 다 위험해지니까.
그런데 어디로 가지?
고층으로 올라가는 건 자살행위다. 도망갈 곳이 없을 테니. 준우는 그의 신체가 다른 사람보다 특출나게 튼튼하다는 것밖에 아는 게 없었다. 그리고 상처가 좀 더 빨리 아문다는 것.
괴물들 소리가 커졌다. 그는 다급히 다 부서진 202호를 통과해 아래로 뛰어내렸다. 괴물들이 곧장 따라붙는다. 자기들끼리 짓밟고 밀치며 물어뜯는 와중에 준우는 최대한의 속도로 내달렸다. 들고 있는 사람 때문에 혼자 있을 때처럼 순식간에 이동하긴 어려웠다.
전철역 방향으로 곧장 달려오자 옆 아파트와 이어진 길에 높게 세워진 철제 울타리가 보였다. 통행은 막았으면서 울타리는 또 디자인을 넣어 놔선 기만적인 장벽이라고 내내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딴생각할 새가 없다. 준우는 현상을 집어 던지고 자신도 울타리를 타 넘었다.
뒤에서 행동력 나쁜 놈들이 울타리를 들이받으며 소리치는 게 들렸다. 달려드는 놈들이 쌓이고 쌓여 발판이 된다. 바르작대는 현상을 도로 들춰 메고 준우는 달렸다. 보현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다만 방향은 소방차가 간 곳을 그대로 쫓는다. 준우는 보현이 장롱면허란 사실을 잘 알았다. 끽해야 시험 볼 때나 운전대 잡아 본 게 전부일 거고, 지금 그냥 직진밖에 안 하고 있겠지.
그대로 균열을 나갔으면 좋겠다.
그럴 수 없으리란 사실을 준우가 제일 잘 안다. 서로를 짓밟으며 괴물들이 뒤를 쫓았다. 무엇에 화가 났는지 잔뜩 소리 지르는 놈들투성이라 현상은 겁에 질려 으아악 하며 머리를 감쌌다.
그때 준우 앞에 희뿌연 막이 나타났다.
뭐야, 하는데 툭 떨어진 장벽은 비눗방울처럼 바닥에 맺혔다. 좁은 아파트 사잇길이라 그것마저 걸림돌이 되었고, 괴물들은 그걸 통과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역겹게도 맨 앞에 있던 놈은 뒤에서 미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준우는 치미는 토악질을 참으며 다시 달렸다. 울타리를 넘어올 때처럼 또 그런 일이 벌어질 테니.
그는 달렸다. 대로변으로 나갈 순 없었다. 건물과 건물 틈, 차를 넘고 담벼락을 뛰어넘는 동안 현상은 바닥을 구르고 던져지고 가끔은 밟혔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곧장 멱살을 잡아 올리는 준우의 손이 빨리 돌아오기만 바랄 수밖에 현상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리가.
두 사람보다 더 끔찍한 술래잡기를 하는 건 보현이었다.
브레이크 따윈 없는 거라고 무작정 액셀만 밟아 대다 차가 엉망으로 늘어서 있는 도로에 멈췄다. 여기서 괴물을 만난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간 탓에 벌어진 꼴인데, 소방차로도 전부 밀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대로 차들을 열 대쯤 밀어붙인 뒤에 보현은 헉했다. 더 갈 수가 없다.
차가 상당한 속도를 내며 달려온 탓에 괴물 무리가 꽤 멀리에 있다. 그러나 당장 대로변에서 도망갈 곳이 없었고, 차를 밀며 난 소리 때문에 다른 방향에서 괴물이 오는 게 보였다. 망할, 빌어먹을! 보현은 온갖 욕을 내뱉으며 운전석 문을 걷어차고 차에서 내렸다.
어떻게 하지.
준우를 죽게 놔둘 수 없었다.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준우네 가족들이 걱정이었고, 그때 들었던 묘한 책임감이 다 휘발된 지금은 본인이 제일 걱정이었다.
어떻게 하지?
괴물들의 모습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보현은 우선 밀려난 차들을 뛰어넘어 상가로 내달렸다. 온 곳에 시체다. 모르는 사람의 내장을 밟고 쭉 미끄러진 보현은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악, 하는데 머리 위로 뭔가 떨어졌다.
보현은 우선 질겁했고, 다음으론 그게 옷이라는 사실에 의아했고, 고개를 들었을 때 고층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당황했다.
그들은 팔을 휘저으며 위로 올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소방관들이 더러 있다. 세워진 차 중에 소방차도 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균열에 휘말린 소방서가 있다고 했던가.
그런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보현은 서둘러 그 건물로 들어갈 입구를 찾았다. 땅이 또 울리기 시작했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놈들의 무리가 가까워져 왔단 증거였으니.
입구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장애물이 많았다. 보현은 옷이 어디 걸리건 머리가 뜯기건 신경도 못 쓰고 입구에 쓰러져 있는 가로수를 타 넘었다. 건물 내부 역시 아수라장이다. 괴물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다음에 해야 한다. 밖엔 더 어마어마한 무리의 괴물이 있었으니.
그러나 여기로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그 괴물들이 무작정 소방차를 따라온 게 아니라면? 혹은 보현이 여기로 온 탓에 이곳에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고민이 머리를 때리고 또 때리는 동안에도 보현의 눈은 착실히 도망칠 루트를 확인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곳은 위험해 보인다. 피가 진득하게 굳어 있는 다른 곳들과 달리 여전히 적색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이 안전해 보이는 건 아니다. 어느 괴물이 사람 하나 입에 물고 사방으로 흔들었는지 여긴 그야말로 피가 뿌려진 복도였다. 비상구, 비상구. 보현은 질릴 것처럼 펼쳐진 끔찍한 풍경에서 눈을 돌리며 비상구로 향했다.
문이 닫혀 있다.
철문 손잡이가 엉망이 된 것으로 보아 괴물들이 이걸 열려고 시도한 모양이다. 잘 돌아가지 않는다.
바닥이 점점 더 크게 울린다. 군집의 발 구름. 보현은 그 소리가 이 소리를 묻어 줬으면 하는 맘으로 있는 힘껏 문으로 달려들었다. 몇 번을 들이박자 손잡이가 덜걱거리다 슬쩍 비틀렸다. 보현은 그대로 문을 밀고 들어가 서둘러 문을 닫았다.
비상구는 조용하다. 준우와 도망쳤던 비상계단을 떠올리면 그럴 법했다. 먼저 도망친 사람들이 여기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며 도망쳤다고 한다면 여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른 놈이 갇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이한 고요. 여전히 느껴지는 땅울림.
보현은 침을 삼키며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는 걸음이 조심스럽다. 혹여 위에서 뭐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려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좀 더 많은 괴물에게 빨리 죽음을 맞이하는 것?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빨라졌다. 땅울림 역시 지진처럼 가까워진 다음이다. 보현은 거의 팔다리를 다 써 가며 계단을 올라 사오 층쯤 되는 곳으로 휙 뛰어나갔다. 이상하게도 거기 문만 열려 있었다.
아까 있던 사람들은 어디에 모여 있을까. 비상구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갑자기 문이 쾅 닫혔다. 보현은 질겁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있었다. 세 명. 괴물 소리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한 그들은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건물이 울린다.
보현은 아래로 보이는 대로변에 까맣게 모여든 괴물들을 보고 질겁했다. 소방차는 거의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찢겨 나가고 있었다. 금속이 종이처럼 찢어지는 모양새를 보니 모골이 송연했다. 좀 전까지 저기에 앉아 있었기에 더더욱.
“소, 소방관이 아니네요. 소방관인 줄 알고 구해 오라고 한 거였는데.”
“예?”
“또 초능력자가 있는 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