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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41화 (42/260)

41화

임보현.

누가 이런 데서 자래, 감기 걸리게.

묘하게 힘 빠진 준우의 목소릴 들은 것 같다. 옛날엔 종종 그의 꿈을 꿨었는데.

보현은 눈을 떴다. 익숙한 이불, 익숙한 벽지, 그리고 익숙한 방.

그는 화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둡고 고요한 실내로 오로지 달빛만 비쳤다. 구름이 낀 것도 아니건만 달이 뜨지 않은 것처럼 어둡다. 왜 여기 있지? 꿈을 꾸는가 싶어 곧장 뺨을 쳤다. 몇 번의 거친 손짓에 뺨이 금방 부어올랐다. 아파 뒈질 것 같다.

그러니 이게 꿈일 리 없다고 믿어도 좋은가?

보현은 다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발에 이불이 꼬여 넘어질 뻔한 건 괜찮다. 또 넘어져도 상관없었다. 넘어졌더니 꿈이 깼다, 하는 절망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앉은 채로 잠든 준우였다.

낡은 소파에 등 기댄 채 고개를 불편하게 꺾고 잠들어 있는 게 어릴 때랑 똑같았다. 오히려 크고 나서는 같이 잠자리에 들 일까지는 없어 낯선 모습이다. 보현은 발에 감긴 이불 때문에 바닥에 폭 엎어져선 엉금엉금 기었다.

문득 발이 축축하게 느껴져 보현은 우뚝 멈춰 섰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피에 젖은 양말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맨발이다. 발은 축축하지도 않았고, 오래 눌려 얇아진 이불에 얇게 보풀이 일어나 발바닥 아래를 간지럽히는 낯설고도 낯익은 감각.

이불을 벗어난 발이 바닥을 밟았다.

그리고 발바닥이 장판에서 떨어지는 쩌억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준우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잔상조차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을 깜빡인 순간 앉아서 졸던 준우의 자세가 휙 변했다고 느껴진 것에 가깝다. 보현은 당황했고 잠에서 깬 준우 역시 당황했다.

“어, 일어났냐.”

태연하게 건네는 인사가 평소와 다를 바 없다. 눈앞에 멀쩡히 서 있는 모양새가 도무지 믿기질 않고, 또 지금 깨어난 곳이 준우네 집이란 사실도 믿기지 않아 보현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좀 전에 보이지도 않게 움직였던 그 괴이한 반응 속도로 분명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준우는 얌전히 붙잡힌 채 보현을 내려다보았다. 옷자락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준우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물기에 젖는다.

멱살을 쥐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보현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준우의 어깨에 머릴 기댄 모양새였으나 그 이상 그에게 닿지 않았다. 못 했다고 해야 맞다.

마찬가지로 보현을 안으려던 손이 그의 등 부근을 어정쩡하게 헤매다 내려갔다. 언제나 그랬던 익숙한 단계를 거쳐, 준우는 보현의 머리를 꽁 때렸다.

“잠 다 깼냐? 꿈 아니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보현은 있는 힘껏 준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으악 하고 다릴 부여잡는 그의 등짝을 퍽퍽 소리 나게 쳤다. 팔이며 등이며 닿는 곳마다 다 때렸다. 준우는 아프다고 엄살을 피웠으나 때리는 대로 다 맞아 주며 보현의 눈치를 살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이었으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표정이 우스웠다.

“야, 울다가 웃으면 큰일 나. 아직도 모르냐?”

“이 새끼 그딴 농담 하는 거 보니까 도준우 맞구나, 어? 미친 새끼, 뒈진 줄 알았잖아! 진짜 걱정했다고! 너 죽은 줄 알았다고 씨이바알!”

“욕도 하던 사람이나 하는 거지, 네가 하니까 진짜 어색하다.”

“닥쳐!”

준우는 또 한참 얻어맞았다. 그는 맞다가 웃었고, 보현은 결국 내내 울었다. 이 정도 맞아 줬으면 괜찮다 싶었는지 갑자기 수그리고 있던 등을 편 준우는 자길 때리는 보현의 팔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요란하게 품에 안긴 꼴이 되어 버린 보현은 으악 하며 도로 일어나려 했으나 그를 붙잡은 팔이 도무지 움직이질 않아 그대로 얼어 버렸다.

한쪽은 때리느라고, 한쪽은 맞아 주느라고 열심히 움직인 탓에 둘 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보현의 어깨와 머리를 끌어안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신 준우는 보현의 머리에 이마를 꾹 내리눌렀다.

“내가 어떻게 너 혼자 두고 죽냐. 나 없으면 누가 너 챙기라고.”

방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보현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준우가 좋아도 놀림감은 놀림감이고, 그는 틀림없이 몇 번이고 이때 이야길 꺼내며 시답잖은 농담을 던져 댈 테니.

저도 모르게 준우를 힘주어 마주 안으며 보현은 생각했다. 그 괴물들은? 악몽은? 그런 것 걱정 않고 준우와 함께하는 다음을 생각해도 된단 말인가?

그가 죽은 줄 알았던 순간에 휘몰아치던 온갖 감정이 생각나 보현은 저도 모르게 준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당연히 농담하며 보현을 놀려야 할 준우가 어쩐 일로 얌전히 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은 채로 한참 서 있었다.

천천히 안정되는 심장 소리.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높은 체온.

“다 울었냐?”

“울긴 누가…….”

“내 옷에 눈물 다 닦아 놓고 양심 있냐?”

보현은 욱해서 그 품에서 벗어나려고 준우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쳤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렇게 힘이 셌나? 무슨 돌을 밀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상하다.

열심히 울고 때리고 안고 난리를 쳤으니 이게 꿈이란 생각을 더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보현은 다른 생각을 했다.

준우가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까?

그때의 충격, 그때의 공포, 그리고 그 두려움. 괴물이 습격한 것도 몰랐던 보현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다. 다치지 않았나?

그것보다, 어떻게 그 괴물의 눈을 피해 보현을 7층에서 6층으로 데려올 수 있었나?

“도준우. 무슨 일 있던 건지 다 설명해 봐.”

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답이 없으면 또 불안한 생각이 드는 터라 보현은 얼른 재촉했다.

“야, 씹지 말고 대답이라도 해. 네가 대답 안 하면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야. 진짜 뒈진 것처럼…….”

“보현아.”

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음성이라 보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취향에 맞는 자식. 목소리라고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안 될까?”

“뭔 개소리야.”

“설명할 수가 없어. 그럴 자신도 없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괜찮았어. 내가 이겼어.”

“야, 이거 좀 놔 봐.”

그렇게 팔을 밀쳐 내도 놔주질 않더니 말 한마디 하자 스르륵 풀어 줬다. 진작 얘기할 걸 그랬다.

“네가 뭔데 괴물을 이겨? 운동을 좀 하긴 해도 슈퍼맨은 아니잖아.”

준우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봐. 내가 설명할 수 없다고 했잖아.”

“아니 그걸 왜 설명을 못 해?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되었던 건지. 그 소리는 뭐였고, 피는 뭐였는지!”

말할수록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쩌렁쩌렁 외치는 꼴이 되었다. 준우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기대어 있던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못 하는데 어쩌라고. 가끔 그런 거 없냐? 풀이 과정 모르겠는데 답 아는 거. 너 그런 거 많았잖아. 똑똑해서. 내가 물어보면 맨날 이거 답 이건데 왜 모르냐고 오히려 나한테 그랬었잖아.”

“이거랑 그거랑 같냐?”

“다를 게-”

보현은 눈을 깜빡였다.

“-뭐가 있다고.”

찰나였다. 이걸 찰나라고 부르는 것이 분명하다. 한 어절을 시작했을 때 보현의 앞에 앉아 있었는데, 문장을 마쳤을 때는 뒤에 있었다.

“뭐야. 마술? CG?”

“나한테 농담 옮으면 안 되는데.”

준우는 보통 사람처럼 천천히 걸어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보현은 그가 어떤 식으로 괴물을 잡을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능력이 있으면 뭐라도 시도할 수 있었겠지.

어쩌면 그 피가 괴물의 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억울함이 밀려왔다. 미안하고 분하고 화나서 괴롭던 그 짧은 순간이 아깝기도 했다. 보현은 준우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가 불시에 그를 퍽 쳤다. 예전만큼 아파하진 않는다. 몸이 튼튼해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를 때린 보현의 손이 더 아프다. 보현은 자기 손을 주무르며 횡설수설했다.

“괴물들이 튀어나오더니 넌 히어로가 됐냐? 모르는 새에 혼자 슈퍼 거미한테 물렸어? 아니면 사실은 외계에서 날아와 입양된 뭐 그런, 아니야. 너랑 연우 너무 붕어빵이지.”

“갑자기 사람 치네.”

“더 맞아도 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내가 심장이 몇 개 있었어도 다 터져서 지금 심장 마비 왔어, 인마. 알아? 어?”

준우는 웃기만 했다. 보현은 혼자 이야기하다 납득했다. 세상이 뒤집히고 괴물이 튀어나왔다. 사람에게도 이상한 능력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보현은 자기는 뭐 없나 하고 이리저리 몸을 만져 보았다. 애석하게도 말랑하게 잡히는 옆구리 살이 다였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나는 뭐 없나? 날 수 있다거나 그런 거.”

“히어로물 나올 때마다 갖은 핑계 다 대고 뛰어가더니 뭐 이렇게 각성이 늦으셔. 사실 사건 터지면 경찰 부르면서 뛰어나가는 엑스트라 역할인가 봐. 그쪽이 안전하긴 하지.”

“뭐? 싫어! 나도 뭐 안 생기나? 괴물 나오는 데 숨어만 있고 싶지 않단 말이야. 뭐라도 하고 싶다고.”

“됐어. 혹시 필요하면 내가 할 테니까 넌 어디 나갔다가 다치지나 마. 네가 다치면 내 마음이 아파.”

“멘트 올드하다.”

“널 진짜 어떻게……. 됐다. 들어가서 잠이나 마저 자.”

그러겠다고 일어나던 보현은 우뚝 멈췄다. 그러고 보니 옷이 달라졌다. 경악하며 준우와 제 옷을 번갈아 보던 보현은 순식간에 차분함을 되찾았다. 준우네 집에 왔고, 아줌마와 연우가 있었을 테니 두 사람이 했겠지. 그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본 준우는 웃으며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남녀가 유별한데 야밤에 어디 한방에 같이 있으려고. 얼른 안 들어가?”

“내가 네 방 써서 네가 나와 있는 거야?”

“아니야. 혹시나 해서.”

외벽을 타고 돌아다니는 놈이 있는 판국이다. 거실 유리창으로 뭐가 들어올지 알 수가 없어, 쓰러진 보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안방에서 구겨 자기로 했다. 그 편이 만약의 상황이 와도 지키기도 편할 테니.

준우가 피곤해 보였기에 보현은 더 남아 있지 못했다. 머뭇거리다 잘 자, 하고 작게 인사하고 몸을 돌린 보현은 빛나는 네 쌍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문틈으로 둘을 보고 있는, 심지어 웃고 있는 눈들.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보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난리를 피웠으니 깬 건 당연하고, 괴물 때문에 불안해 못 잤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다. 보현은 내적 비명과 함께 준우 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드디어!’하는 외침과 하이 파이브가 안방에서 들렸다.

지나치게 좋아진 감각들로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준우는 픽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자기가 706호 앞에서 엉망이 된 꼴로 깨어났던 사실을 기억했다.

그리고 보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직전도. 또, 보현에게 비명이 들리지 않게 하려고 부서져라 깨물던 이가 얼얼했던 것까지도.

그러나 전할 필요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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