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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38화 (39/260)

38화

보현은 멍청한 표정을 황급히 수습했다. 한 시간 후라며? 질책하는 시선에 연우는 눈을 피했다. 한 시간이나 집에 먼저 와 있으면 우리 집 딸내미처럼 앉아 놀다 갈 거면서. 보현과 엄마가 먼저 마주치게 하면 안 된다. 오늘이야말로 언니를 새언니로.

연우의 멋진 계획을 눈치챘을 리 없는 보현은 당황했다. 침묵 끝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자 준우가 얼른 문을 잡았다. 놀란 듯 커진 눈을 보니 진짜 보현이 오는 걸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임보현.”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목소리. 보현은 아닌 척, 모르는 척, 태연한 척하며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옛다. 아줌마 거. 네가 들어.”

준우는 순순히 선물 세트를 받아 들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타과에서 졸업장을 한 번 따고 다시 입학해 공부하고 있는 탓에 준우는 아직도 학생이다. 이제는 수련의를 떼고 제 이름 박힌 면허를 가진 당당한 의사 임보현은 우쭐한 척 턱을 한껏 들었다.

“그래서, 학생 나부랭이는 어디까지 배우셨나?”

“몰라. 백수한테 설명하면 이해하냐?”

“아, 잠깐 쉬는 거라고. 면허 따고 바로 일하면 언제 쉬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복도식 아파트라 조금 더 걸어야 한다. 곁에 선 게 너무 오랜만이라 입 밖으로 필터 없는 말이 마구 튀어 나간 탓에 보현은 문이 열리기도 전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황망한 걸음을 다리 긴 놈이 성큼 걸어와 가로막는다.

“야, 멈춰 봐.”

“싫은데?”

준우는 깐족거리는 보현의 발 옆을 쿵 내리찍었다. 벌레라도 잡나 싶어 옆으로 피하려던 보현은 으악 하고 비틀댔다. 뭐야, 하고 내려다보니 풀린 신발 끈을 준우가 밟고 있었다. 그는 픽 웃으며 몸을 숙였다.

“칠칠치 못하게 진짜. 너한테 진료 본 환자들이 너 이렇게 덜렁대는 거 알면 불안해서 병원 또 오겠냐?”

보현은 입술을 비죽였다. 익숙하게 신발 끈을 묶은 준우는 보현의 발등을 팡 두드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발 부었네. 피곤하냐?”

“미친, 남의 발 사이즈 외우고 다니지 마.”

“이게 면허 따더니 자의식만 비대해졌네? 너 원래 신발 헐렁하게 신잖아, 멍청아.”

“이게 유행이야.”

“한마디를 안 지네.”

둘이 티격태격하며 집으로 향하자 연우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조용히 부르길 잘했다니까.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본 탓에 준우네 엄마는 활짝 웃으며 보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아니 살이 쪽 빠졌네. 우리 의사 선생 고생 진짜 많았나 봐.”

“야식 먹어서 살쪘어요…….”

“살은 무슨. 더 먹어야 돼.”

“아줌마, 그런 말 하시믄 가끔 여기가 우리 시골인가 생각이 든다니까요.”

“말 잘했다. 시골 가면 원래 배 두둑이 채워 가는 거 알제? 둘 다 배고프겠다. 저녁부터 먹어.”

보현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선물을 거실에 고이 내려놓곤 식탁에 앉았다. 잔칫상 부럽지 않게 차려진 음식들은 촉박한 시간 안에 내왔다곤 믿기지 않을 만큼 푸짐하다.

“아이구, 저 온다고 뭐 이렇게까지.”

“입이 쉰다?”

“옙.”

보현은 와구와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넷이 함께 식사한다. 몇 년 만의 시간이라 기뻤다. 학교 다니느라 바쁘지만 않았어도 와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병원엔 좀 괜찮은 의사 있었니?”

“아뇨. 걔네 다 멸치예요.”

연우가 빵 터졌다. 보현의 취향은 그냥 대놓고 제 옆에 있었기에 그런 타입들은 눈에 안 들어올 수 있다. 그래도 정형외과라 의사들이 체력은 좀 좋지 않니, 하고 덧붙이는 말 뒤로 준우가 말을 턱 잘랐다.

“너 좋아한다던 선배는? 실습 같이 갔잖아.”

“그런 건 어떻게 아냐?”

“애들이 떠들어서.”

입학 동기들끼리 파 놓은 단톡이 있긴 하다. 전부가 있는 건 아니고 저학년 때 영어 스터디 하려고 모인 열 명 정도가 있는 방. 여자들은 대부분 칼같이 실습 과정 밟아 대부분 졸업했고, 남자들은 이제 막 수련의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젠 과도 다 갈려 각자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렇기에 이런 소소한 가십거리가 오래 떠돌기도 했다.

“그 선배는 좀, 취향이 아니라서.”

“먹을 건 안 가리면서 은근 까다롭게 구네.”

“뭐? 먹을 것도 가려, 인마. 아줌마 솜씨가 좋아서 그렇지. 그쵸?”

“아이구, 보현이 더 먹어라. 더 먹어. 인마 너는 깨작거리지 말고 골고루 좀 먹어 이놈아.”

“걔 그만 먹여. 간식 먹여야 돼.”

“내가 무슨 주는 대로 다 먹는…….”

“A제과 케이크 있는데.”

보현은 방긋 웃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은 그의 취향을 너무 잘 알았다. 배가 부른 것도 사실이었고, 그 가게 케이크를 끝내주게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다른 취향은 다 파악하고 있는 놈이 보현의 남자 취향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는데.

눈이 마주치자 준우는 뭐 어쩌라고, 하는 눈으로 시비부터 걸었다. 당연히 맞받아치며 보현은 오늘도 글렀구나 생각했다. 하긴, 혹여나 잘 안 되면 다시 찾아오기도 민망해지겠지. 결국, 또 하려던 말을 꺼내지 못하고서, 보현은 괜히 케이크만 퍽퍽 퍼먹었다.

간식 먹고 수다 좀 떨며 수련의 생활이 어땠고, 너도 앞으로 뭘 하느니 마니 하는 소릴 마구 떠들어 대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다. 해가 긴 계절인데도 노을이 설핏 깔리는 하늘을 보니 집에 도착하면 한밤이겠다 싶었다.

“벌써 가? 아니 왜 벌써 여덟 시야?”

연우가 화들짝 놀라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시간이 한참 지났다. 시무룩해진 연우를 토닥여 주곤 보현은 잘 먹었다고 또 오겠다고 인사했다. 연우와 그 엄마는 입술 비죽 내밀곤 자고 가라고 떼를 썼으나 어릴 때처럼 다 같이 재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준우네 집은 그리 넓지 않았다.

“또 올게요. 다음엔 다른 거 사 가지고.”

“사긴 뭘 사. 몸만 와.”

“싫어요! 몸도 오고 간식도 올 거라고요!”

나가기 직전까지 투닥투닥 시끌시끌 요란하다. 보현은 편안함을 느꼈다. 부모님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으나 보현의 부모님은 늘 바빴다. 어릴 때 보현의 집에 와서 반쯤 방치되어 있던 보현을 돌봐 주셨던 준우네 엄마가 아니었으면 지금보다 더 꼬질꼬질하고 스스로 챙기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났겠지.

“야, 가자.”

“어디를.”

“캄캄하잖아. 나 같은 미인 경호 필요함.”

준우는 어이없단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톡톡대면서도 손은 챙겨 준다는 게 저놈의 매력이었다. 심지어 대단히 자상한 편이라, 가끔 보현은 그래도 이놈이 약간 정도는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정말 약간 정도.

“뭘 봐.”

“어, 잘생겨서.”

“객관적인 사실이네. 네가 인성은 없어도 안목은 좀 있어.”

준우는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다 보현에게 정강이를 까였다. 보현은 반쯤 패닉 상태였다. 하고 있던 생각이 툭 튀어 나갈 줄 저도 몰랐던 탓이다. 제발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하자고! 옆에 준우만 없었으면 머리를 팡팡 두드리며 자책했을 것이다.

아파트를 나서자 뉘엿뉘엿 가라앉은 태양이 산천에 걸려 하늘이 기묘한 그러데이션을 이루고 있었다. 예쁘다. 이런 풍경을 같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여느 때와 같은 하루.

“임보현.”

“왜.”

“너 그 선배가 불러도 나가면 안 돼.”

“그 선배? 아.”

아까도 한 번 이야기했던 그 선밴지 뭔지. 보현은 사실 신경도 안 쓰는 호리호리한 사람 이야기가 자꾸 나왔다. 정형외과에 와서는 체력도 없어 골골대는 꼴이란. 그래 놓고 여자는 티오가 없어 안 된다느니 예쁘게 보이면 인맥으로 꽂아 주겠다느니 개소리를 맨정신으로도 지껄이던 새끼였다. 보현은 그런 말은 일절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너는 멀쩡히 학교 졸업해서 취직이나 할 것이지 왜 뜬금없이 의대 오고 그러냐? 내 후배가 하고 싶었음 말을 하지.”

“뭐라는 거야. 임보현은 하는데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하는 건데.”

“뭐 인마?”

보현은 눈을 부라렸다. 물론 둘 다 의사가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옛날 드라마가 잘못했지. 다행히 보현은 공부를 잘했다. 준우는 좀 돌아오느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잘 가고 있으면 되지.

학교며 어디며 연줄 있는 선배라 당장 연락을 끊기는 좀 그랬다. 보현은 그가 자랑하던 인맥들을 떠올리며 고심했다.

“뭐, 라인 좀 잡아 놓으면 언젠가 쓸 데 있을 것 같은데 왜? 나 어떻게 하겠대? 안 통하는 타입이라고 전해 줘라.”

“남자가 보는 남자라 더 잘 알아. 혹시 부르면 나가지 마. 너 어차피 내 얼굴 좋아하잖아.”

“미친 새끼. 어디서 오는 자신감이야?”

“네가 뭘 보는지 나 말고 누가 알겠냐.”

하늘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어 다행이었다. 보현은 절대 고개를 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거 무슨 말일까. 고백 각인가? 고백하란 뜻인가? 아니면 고백하겠단 뜻인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와중에 준우가 멈췄다.

“거기 아냐. 이쪽으로 가야 돼.”

“왜? 거기로 가면 빙 돌아가잖아. 나랑 더 걷고 싶냐?”

혼란으로 복잡하던 머리에서 말이 툭 튀어 나갔다. 보현은 정말 죽고 싶었다. 멍청아 뭐라고 한 거야! 머릿속에서 자신을 타박하는데 준우가 씁쓸히 웃는 게 보였다. 그는 그냥 몸을 돌리며 손짓했다.

“임대 아파트라서, 저쪽 아파트로 지나다니는 길 막혀 있어.”

뒤돌아선 등이 넓다. 태평양 같은 어깨. 이 와중에 진짜 어지간하네. 혹시 침이라도 흘렸을세라 보현은 얼른 입가를 훔쳤다.

“거 흠, 왜 막아 놓고 그러나? 그냥 지나가는 것도 못 하게 하네. 쪼잔하게.”

“그러게나 말이다. 여기로 지나가면 몇 분 안 걸리는데. 그래도 겸사겸사 좀 더 걷자. 네 말처럼 너랑 좀 더 걷고 싶으니까.”

보현은 고장 난 것처럼 우뚝 멈췄다. 잘못 들었나? 맨날 하던 비아냥거린 것 같은 농담인데 필터 끼고 들어서 이상하게 들리나? 보현의 혼란을 뒤로하고 준우가 다시 돌아섰다.

“뭐 해, 임보현. 손 많이 가네.”

준우가 돌아와 보현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꿈이야. 아니, 꿈 아니야! 보현은 기겁해 손을 뺐다.

“너 딴 놈들이랑 내기했냐?”

“뭐?”

“아까부터 무슨 선배니 뭐니 이야기했잖아. 개 뜬금없이. 나 가지고 뭔 내기했냐? 저번에 딴 새끼들 그런 전적 있어.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도준우 이놈 병 걸렸지. 아까 그거 최후의 만찬이었냐?”

준우는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보현을 쳐다보았다. 보현의 장황한 헛소리는 길어졌으나 그 이상 흑역사가 생기기 전 준우가 말을 뚝 잘라먹었다.

“내가 그런 쓰레기들이랑 같아?”

“아니.”

“그럼 뭐겠냐?”

보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곧장 떠올랐다.

왜 인제 와서?

보현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피차 힘겨운 어린 시절 보내며 컸고, 바쁜 보현의 부모님 때문에 형제나 다름없는 시기를 보내며 함께 부대꼈다. 사 자 붙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 부모님을 위해 공부 피똥 싸게 해 가며 의대도 들어왔고, 탑 클래스 한 번 놓치는 일 없이 진로 잘 닦아 놓았다. 그렇게 힘겹던 모든 삶의 순간마다 준우가 옆에 있었다.

형제였고, 친구였고, 라이벌이었으며, 첫사랑인 놈팡이가 있었다.

눈치라곤 어디 팔아먹었는지 보현의 속 보이는 모양새 다 시비며 비아냥이라고 받아치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기 일쑤였던, 그 도준우가.

“혹시 너 불치병이라도?”

“아 진짜, 임보현 이 재앙의 주둥이를 내가 어째야 하냐?”

준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보현을 노려보다 그의 손에서 가방을 휙 빼앗았다. 보현이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준우야말로 상당히 큰 키였기에 머리 위로 가방을 들어 버리자 뺏을 수가 없었다. 보현은 또 정강이를 걷어차려다 붙잡혔다.

“야, 아파!”

“가방 내 놔! 동네 사람들! 가방 도둑이에요!”

“아니, 아니에요! 얘 친구라고요! 임보현 조용히 좀…….”

준우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어쩌면 오늘은? 하고 항상 생각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자 이건 아니다 싶었다.

고백하는 생각을 하자 사귀는 모습이 상상됐고, 그러자 여느 연인들처럼 다투는 모습도 떠올랐다. 지금도 자주 싸우는데 사귄다고 안 싸울까. 그러다 어떻게든 감정의 골이 쌓이고 헤어지게 되면.

그럼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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