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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9화 (30/260)

29화

지호는 입씨름하는 대신 다른 쪽에 신경 쓰는 쪽을 택했다. 수치 대부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뭘 공개하고 뭘 비공개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동주가 예시처럼 띄워 놓은 보현의 정보에도 구체적인 숫자가 나와 있진 않다. 그래프 크기로 볼 때 이 사람의 능력 중 이것이 제일 뛰어나다는 것 정도나 확인할 수 있을 뿐.

지호는 조심스럽게 보현의 정보 창을 따라 했다. 구체적인 숫자는 띄우지 않았으며 세부 정보도 비공개로 돌렸다. 신체 사이즈 같은 것도 당연히 비공개고, 나이 같은 건 띄워서 무엇 하나. 전부 비공개를 눌러 대는 지호를 보며 동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 다른 헌터가 보고 업무 협조 요청할 수 있게 좀 남겨 두지그래. 누가 악용하는 일이 없는 건 아닌데, 일반적으로는 서로를 위해 열어 두는 편인데.”

“아무나 보는 건 싫어요.”

“아무나 다는 못 봐. 정식 각성자 된 사람들만 볼 수 있고, 그중에서도 헌터들끼리만 볼 수 있어. 개인 정보 열람 불가 걸어 놔도 괜찮긴 한데, 그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도움을 제때 받기 어려울 거다.”

전체 비공개를 걸어 버리려던 지호의 손이 멈췄다. 어떻게 하나 고민하던 지호는 어쩔 수 없이 동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반적으론 어떻게 하는데요?”

“특화된 계열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는지를 메모하지. 수치를 적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상관은 없다만, 가능 범위 정도는 적어 두는 편이 피차 편해. 대규모 수색 작업에 차나연 같은 세부 감지계를 데려가면 서로 힘들어지니까.”

“아직 정확히는 모르는데…….”

“정식 등록할 때까지만 설정해 두면 돼. 교육 끝나고 바로 제출이니까 알고 있으라고. 그때도 수정할 수는 있는데 먼저 열람하는 사람들 있으면 네가 골치 아플 테니.”

어조는 퉁명스러워도 지호가 묻는 것 하나하나 세심히 답해 주는 것이 겉보기와 다르다. 외모만 보고 편견을 가진 건 아니었을까 싶어 지호는 조금 미안해졌다.

“저한테 이거 알려 주시려고 시간 내 주신 거예요?”

“그럴 거면 일반 직원 보내지 뭣 하러?”

“아니 그럼 왜…….”

부평 기능공 연합에서 명은이 해 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김동주의 정보를 열람하면서 무슨 문제아들 상대하던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려는데 솥뚜껑만 한 손이 예고도 없이 지호의 머리를 눌렀다.

“확인 좀.”

대뜸 머리를 잡힌 지호는 당황하며 버둥거렸다. 짧은 순간 벽이 무너졌다가 복구되고 건물이 정전되었다가 멀쩡해졌다. 바닥이 와르르 부서지려다 본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도 아니었다. 그보다 짧았다.

동주가 손을 놓자 미친 듯이 요동치던 주변 풍경이 잠잠해졌다. 눈물을 찔끔 흘린 지호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 몸을 웅크린 채 동주의 커다란 손과 못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흠, 이거. 평소에도 정신 방벽이 이렇게 세워져 있나? 아니면 방금 내 공격을 막으려고 의식적으로 올렸나?”

“예? 공격요?”

“무의식 쪽이군.”

동주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물망처럼 보이는 얇은 파장이 피부에 덧씌워진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장갑 같기도 하고 그냥 손 같기도 한 이상한 모양.

“자세히 보니 보이나? 감지계한테 설명할 때는 이게 참 편해. 들었을 테지만 나는 정신 계열 특화 능력자다. 간단하게는 실감 나는 환영을 보여 주는 것부터 크게는 훈련 예측 시스템 제어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쓰는 능력이지. 방금 네가 당한 건 현실 지각에 침투하는 방식의 환각이다. 뭘 봤는지는 기억하나?”

“어, 불이 꺼지고 벽이 부서지고 바닥도 꺼지고 그랬는데요.”

“그런 재난적 상황에는 즉각 반응하더군.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예?”

“이 상황 말이야. 아직 모르겠나?”

왼쪽에 앉아 있던 동주가 어깨를 으쓱이자 오른쪽에 앉아 있는 동주가 말을 받았다.

“바로 이런 상황들을 지각하는 순간 말이지. 이미 당한 것과 다름없거든.”

딱, 하는 경쾌한 핑거 스냅과 함께 동주가 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지호는 눈이 핑핑 도는 기분으로 제 얼굴을 착 두드렸다. 방금 뭐지. 뭐였지?

“일반적인 정신 계열 공격은 이런 식으로 들어온다. 자꾸 차 헌터 예시를 들게 된다만, 차나연 헌터가 출동한 균열처럼 특수한 영향을 대규모로 미치는 균열들이 있거든. 이번에야 고작 전파 방해였지만, 공기 전체가 이런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키게 하는 균열도 없던 건 아니었다. 괴물 중에도 그런 능력 가진 놈들이 가끔 있지. 기생 계열이 특히 그렇다.”

지호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동주가 내미는 물을 받아 들었다. 컵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또르르 흘러내렸다. 서늘한 감각.

그러나 컵은 이내 와르르 무너진다.

컵이 무너지면서 지호의 손도, 팔도, 몸도, 바닥도, 인지하고 있던 모든 것도 한꺼번에 무너졌다. 형체 잃은 어둠 속에서 동주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정신 방벽이 있지만 오가는 걸 막지 못해. 이래서야 있느니만 못하군.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감정 보호 정도나 할 법한 얄팍한 방벽이야.”

정신을 차렸을 때 지호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머리가 띵하니 어지럽다. 멀쩡한가? 디딘 바닥은 실체 있는 바닥인가? 한참을 떨어진 것 같았고, 고작 몇 초 정도 기우뚱한 것 같기도 했다.

“좀 괜찮나? 정신 차려 봐라. 이건 현실이니까.”

“진짜요?”

“아니라고 해 주길 바라나?”

“아뇨! 아뇨, 아뇨 아뇨. 절대 싫어요.”

감각 너머로 녹아들어 가며 현실과 유리되는 기분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최근 느낀 감정 중에 죽음 이후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동주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물컵을 내밀며 이를 드러냈다.

“미안하게 됐군.”

대답할 새가 없었다. 현실이라고 인지한 것이 와장창 깨져 버렸으니. 지호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 그렇다. 동주와 지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감각. 진짜 현실이었다.

“좀 어떤가?”

“토할 것 같아요.”

말 끝나기 무섭게 지호는 웩 하고 속을 게워 냈다. 고장 난 나머지 멈추지 않고 폭주하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레일을 서른 바퀴는 돈 것 같았다.

동주는 친절하게 등을 두드려 주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당황한 연구실 직원이 대신 지호를 챙기고 청소 도구를 가져오고 물티슈를 건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얼굴로 컴퓨터를 조작할 뿐이었다.

“이 상태로는 균열 출입은 허가받기 어렵겠군.”

“아니, 왜요……. 어떤 미친 괴물이 정신 공격으로 머리 부숴 놓고 몸에 알이라도 까요?”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군, 병아리. 정답이다. 자연은 늘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지. 계양 균열에서 정신 지배 개체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균열 진입 가능 헌터는 정신 방벽 사용 가능자로 제한한다. 다만, 이쪽 계열이 수가 많지 않아 임시 헌터 중 지원자를 차출할 예정이다. 임보현 헌터 말로는 네가 당연히 가려고 할 거라더군.”

이런 능력을 쓰는 놈이 나타난다니. 지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동주는 흐릿하게 촬영된 괴물 이미지 영상을 띄웠다.

“드론으로 찍힌 데다 송출 직후 드론이 파괴된 탓에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처음 발견되는 개체는 맞지. 현재 수도권 모든 지역 헌터들이 비상 협조 공문을 받고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을 거다. 정신 방벽 사용 가능자는 수가 적어 많지는 않을 거고. 현재 내부에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생존자는 이천여 명이다.”

생각 이상의 숫자에 지호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급성 균열이라 그렇겠지만, 한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급성 균열에 남아 분전하는 헌터들의 보고에 따르면 놈이 침식할 수 있는 개체는 한 번에 다섯가량이다. 다만 개체가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추측에 따라 모든 헌터는 조를 이루어 움직인다. 질문 있나?”

“제가 현장에 파견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들었는데…….”

“감지계는 기본적으로 정신 방벽이 약하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지. 무언가를 잘 살피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너와 같은 특수 케이스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의미다.”

지호는 아직 능력 간의 상성 같은 자세한 정보에 관해선 배운 적이 없었다. 동주는 드론으로 찍힌 영상 외에 내부에서 헌터 및 일반인들이 촬영하여 어플에 업로드한 정신 지배 개체들의 이미지를 띄우며 손을 펼쳤다.

“이 사진들을 통해 대충 만들어 본 전체적 형상은 이렇다.”

손바닥 위에 홀로그램처럼 뭔가가 떠올랐다. 인간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얼굴이 있을 자리에 커다란 입이 있고 이족 보행 하는 다리 아래로 다리가 아닌 것들이 치마처럼 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공격 태세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생명체 하나에 침식하면 촉수인지 안테나인지 모르겠는 신체 부위가 위로 떠오르지. 이놈은 현재 다섯 마리에 기생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중에는 헌터도 있지.”

“그렇게 강한 놈이면 어떻게 제압할 수 있어요?”

“부딪치지 마라. 놈을 사냥하라고 보내는 게 아니다. 사냥조는 따로 만들 예정이다. 병아리의 임무는 전투가 아니니 안심하도록. 균열로 들여보내는 것만 하더라도 보호자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으니까.”

“그럼, 유사시에 전투 가능한 감지계인 건가요?”

“추가로 정신 지배에 잠시라도 저항 가능한 헌터로 만드는 것이 단기 목표다. 질문은?”

보현이 지호의 정신 방벽을 내려 줄 때도 그랬고, 방금 대놓고 손을 펼쳐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호는 정신 계열이 자신을 침식하거나 영향을 끼치는 순간을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게, 제가 쓸모 있으려면 정신 공격을 어떤 방식으로든 감지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근데 전혀 모르겠거든요.”

“전혀?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처음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은 동주는 단념하고 펼쳐 놓았던 손을 접었다. 손바닥 위에 떠 있던 흉흉한 괴물의 이미지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아쉬운 일이군. 그러나 이 정도의 능력자가 들어갔다 세뇌당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니 병아리의 출입 제한은 유지하도록 하겠다. 보호자가 알면 좋아하겠어.”

동주의 손이 펜을 굴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러자 빛무리가 희미하게 빛나더니 허공에서 펜이 뿅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지호는 이제 놀라는 걸 포기했다. 이 사람은 마술사라고 생각하자. 그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정신계 메인이지만 구현화계도 없는 건 아니거든. 정보 공개 여부 정식 되기 전까지 제출하는 거 잊지 말고, 오늘은 온 김에 정신 방벽 조절 훈련이나 받고 가도록.”

“저는 균열 구조 센터에…….”

“명령일세. 병아리 대원.”

동주가 자신의 어깨 부근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군대와는 체계가 좀 다르지만, 이쪽 역시 계급제다. 일반적으로 관리자들과 헌터 경찰, 센터 책임자들 정도나 상급자일 거라고 했었는데.

그러나 동주의 어깨에 새겨진 마크는 선명하게 빛났고 결국 지호는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오늘도 갈 거라고 말해 놨었는데. 승찬과 형철을 비롯한 구조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어제 헌터가 와 줘서 좋다고 했었는데.

고민하던 지호는 시계와 뉴스를 번갈아 확인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뭔가를 적어 내려가던 동주는 단조롭게 명령했다.

“자리에 앉게, 대원.”

“싫은데요.”

동주의 손이 멈췄다. 거리에서라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달아났을 얼굴에 인상이 팍 찡그려지자 지호는 덜컥 겁을 먹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다시 자리에 앉지는 않는다. 지호는 주먹을 꼭 쥐었으나 시선만큼은 동주를 마주 보지 못했다.

“싫어?”

“저, 저는 아직 임시 각성자고. 헌터도 아니니까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지. 뛸까? 동주는 신체 계열이 아니니 몸으로 지호를 제압하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얼굴만으로 기선 제압을 끝내 버리는 사람이긴 했지만.

한참 대답이 없었다. 바닥무늬를 전부 셀 수 있게 되기 전에 지호는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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