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몇 시간 전 급성 균열 발생 직후에 치료 계열 헌터들이 힘을 어떻게 쓰는지는 보았다. 어떤 식으로 에너지를 움직이고 어떤 식으로 타인의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감지하는 게 지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미세한 이형 에너지 파장이 임시 각성자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형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체 강화 계열이라고 안 했나?”
“그것도 있고요.”
어렵지 않다. 침착하게. 지호는 심호흡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에너지를 흘려 넣었다. 마정석 치료기에 다리를 넣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수포와 고름이 조금씩 줄었다. 붉은 기도 천천히 가라앉자 구조대원들 모두 입을 쩍 벌렸다. 그 가운데 치직, 노이즈 섞인 통신이 들려왔다.
-통신망에 대기 중인 지휘 통제실. 통제실 응답 바람. 당소 브라보 원. 이상.
-통제실 송신. 이상.
-귀소 감명도 여하 이상
-당소 감명도 둘 둘 이상.
-수신 확인. 구호 품목에 의료 도구 요청합니다.
“다친 사람 있나 본데?”
누군지 모를 대원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지직, 잡음과 함께 브라보 팀원의 보고가 이어졌다.
-타박상 소수 찰과상 다수, 일부 염좌와 둔상에 골절 상태. 이상.
다친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대원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철은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기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애초에 뼈를 다친 것이 아니었기는 한데, 다른 대원들이 질겁하고 그를 붙잡을 상처였다.
“좀 낫군. 고맙습니다 헌터분.”
“임시예요…….”
“뭐 어때. 이런 힘이 있는데 굳이 국가 인증을 받아야 헌터라고 부를 수 있나?”
형철은 껄껄 웃었다. 그사이 다른 대원들이 황급히 구호 물품을 꾸려 넣은 가방을 찰리 팀원 방호복에 연결했다. 가방에 방해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도록 가방 자체는 얇고 넓게 펼쳐 신체에 동여매는 구조였다. 그들이 물품을 챙기는 것을 본 승찬은 고심하는 얼굴로 균열을 노려보다 무전을 켰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알파 원 부상으로 대원 교체. 알파 투가 구조에 들어갑니다. 이하 방호복 손상으로 실내 진입 불가능. 2층으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이상.”
“방호복이 없잖아요!”
-알파 팀 카피. 방호복 없는 출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찰리 팀 보조로 델타 팀 이동. 후방 대원들은 추가 신호 지점으로 이동하십시오. 이상.
“알파 투 카피 콜. 사다리나 여타 지원 없이 2층을 올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외부로 들어갈 것 아닙니까? 방호복을 입은 상태로 건물 등반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감안해 주십시오, 오버.”
-알파 팀은 지휘에 따릅니다.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십시오. 오버.
형철은 승찬의 등을 툭 쳤다. 걷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으나 달릴 수는 없었으므로 교대했으나, 지휘부와 마찬가지로 방호복 없는 균열 출입은 자살행위라는 의견을 내놓으며 형철이 무전을 가로챘다.
“로져 댓. 알파 팀 오버. 지승찬. 어쩔 수 없어. 저긴 헌터가 들어가야 한다. 고집부리지 마.”
“찰리 팀 스탠바이.”
델타 팀 역시 같이 신호를 보낸 뒤 통제부의 지시에 따라 다시 균열 앞에 섰다. 방호복을 입은 두 사람이 다시 부평 초등학교로 진입한다. 챙긴 것은 약간의 물과 식량, 그리고 의료 품목 다수.
그러나 며칠이고 버티기엔 턱없이 모자랄 물품들이다. 지휘부 측에서 브라보 팀에게 짤막한 통신을 남겼다.
-브라보 팀 카피. 내일 아침 7시, 보급품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생존자들을 잘 추스르길 바랍니다. 오버.
-브라보 원 카피 콜. 추가 괴물 정보 인폼 바랍니다. 오버.알파 팀은 균열 출입 팀이 아니었으므로 더는 무전에 낄 수 없었다. 지호가 반쯤 치료해 준 형철의 상처에 응급조치를 마친 승찬은 분한 얼굴로 차량에 탑승했다. 지호는 아예 누워 버리는 형철을 보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왜 죽으러 들어가려고 해요.”
“살리러 가는 겁니다.”
“뭐가 나올 줄 알고 그냥 들어가려고요. 민간인이시잖아요.”
승찬은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내내 펴질 못했다. 지호의 말이 맞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이 있었잖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제일 우선시해야 할 것이 구조대원 본인인데요. 소방관도 그렇고.”
“지금 지호 씨는 해 놓고 저는 안 된다는 말 하고 계신 거 알죠?”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하도 급하게 돌아가 아까 하던 대화가 끊겼던 것이 생각났다. 각성자가 되는 방법을 어렴풋이 짐작해 버린 사람. 지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승찬을 노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각성자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승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마치 동의하는 답처럼 느껴져,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왜 각성자가 되는 방법이 비밀이어야 하는지 이제 알겠네요.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쉽게 던지려고 하니까.”
“한목숨으로 다수를 구할 수 있는데, 그러고도 살아날 수 있다면 남는 장삽니다.”
“진심이세요?”
승찬은 눈을 피했다. 누워 있던 형철은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 미친놈 한 대 좀 때려 주쇼, 헌터분.”
“그럼 알파 팀 전원 무력화돼서 안 돼요…….”
지호의 농담 섞인 답에 형철은 껄껄 웃으며 다시 누웠다. 승찬은 언짢은 얼굴로 구조 신호가 들어온 다음 지역을 확인했다. 당장은 차량을 출발시킬 수 없다. 두 사람의 구명줄이 고정된 상황이니까. 혹여 형철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봐 해당 팀원들이 고정대에 바짝 붙어 무전 수신 중이기도 했고.
“승찬 아저씨.”
“거 아저씨 소리 들을 놈은 아닌데. 오빠라는 좋은 호칭 두고 참.”
형철 쪽으로 눈을 흘긴 지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승찬을 만류했다.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 어차피 살아날 수 있으니 타인을 위해 자신을 죽이겠다는 건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요?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각성자들은 어차피 잃었던 목숨 하나 더 받은 셈 친다면서 매번 무리하잖습니까.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목숨이라도 빚졌어요? 왜 죽지 못해 안달이에요. 각성자들 중에 죽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겠어요? 그런 상황이 왔을 때 그걸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겠느냐고요. 그런 일은 겪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어요. 그런 걸 경험하고 각성자가 되겠다고 뛰어드는 미친놈이 되지는 마세요. 진짜로, 너무 끔찍한 일이니까.”
“이런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생각합니다. 저도 각성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저희 모두를 기만하고 계세요.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죽지 말아 주세요. 게다가 모두가 각성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지호는 그가 병원에서 보고 또 보았던 자료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랬다. 기록에 따르면, 각성자가 되는 법이 유출되어 일부 사람들이 작위적인 각성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성할 방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 아저씨 혼자뿐이라고 생각하시진 않죠? 생각보다 많은 수가 시도했고,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했어요. 살아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 순간이 다가올 때 어떤 대처를 하는지, 어떤 판단을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는 결국 죽음을 맞닥뜨리는 본인에게 달린 거라고요. 그 순간에 후회해 버리면 어떻게 하시게요. 저승사자 앞에서 아차 하면 너무 늦는다고요.”
지호의 어조는 덤덤했다. 분노해 마땅한 이야기였는데도 그랬다. 일반적으로 각성자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죽음도 편안할 수는 없었으리란 생각에 더더욱 그러하다.
승찬은 지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어린 학생이 보이는 의연한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난……. 미안합니다.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헌터들처럼 생존자들을 구출할 힘이 없다는 게 이 순간에도 너무 답답했어요.”
“하지만 우리와 달리 여러분은 이렇게 바로바로 생존자들을 위해 움직일 수 있잖아요. 저는 이런 힘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데.”
“괴물들이 벌레 죽이듯 생존자들을 해치는 걸 볼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제게도 힘이 있으면 좋겠다고요. 그게, 그게 가끔 욱하고 튀어나옵니다. 어른스럽진 못하군요.”
승찬이 재차 사과했다. 형철은 낄낄 웃으며 누운 채로 욕설을 뱉었다.
“각성자 되는 거 결국 랜덤이라고. 아무나 죽었다고 다 살아나는 거 아니라니까.”
지호는 어떤 첨언도 없이 묵묵히 미소만 지었다.
다행히 생존자들에게 물품이 잘 전달되었다. 찰리 팀과 델타 팀이 어떻게 방호복을 입고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지만, 전달만 되었으면 방법이 무슨 상관인가.
차량이 이동하며 차 내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구출하지 못한 채 도망치는 기분이 든다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마 다들 동의하는 모양이다. 지호는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생존자 팀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전해 준 것 아닌가.
게다가 아이들이었다. 어른 하나 없이 얼마나 불안했을지 생각하면 브라보 원의 훈련된 희생정신에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음 구조 신호가 울린 장소에선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탈출했고, 한 사람은 나오자마자 상처 때문에 죽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지호의 힘이 상당히 소진되었다.
그렇게 몇 시간가량 구조 작업이 이어지고,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은 다음에야 구조대가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왔다.
핼쑥해진 임시 헌터에게 차가운 물 한 병을 내민 승찬은 이마의 땀을 대충 쓸어 닦으며 그 옆에 앉았다. 지호는 얼른 승찬의 팔부터 확인했다.
“아까 다치신 데는 괜찮으세요?”
“열 번도 더 멀쩡한 거 확인하셨잖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뿐인데요…….”
“지금은 그렇죠. 그러니 어서 임시 떼고 그 전투복에 이름 새기십시오.”
흥분한 상태에 환자까지 발생한 채로 무겁기 짝이 없는 대화를 나눈 뒤, 승찬과 지호는 서로 좀 편해졌다. 자연스럽게 대원들 틈바구니에 있을 수 있는 건, 정신없이 구조 임무에 동원되어 뛰어다니고 환자를 치료하고 길 막는 차를 공중으로 들어 차를 달리게 하는 등의 상상 이상의 활약을 한 덕분이었다. 어느새 구조대원들에게 인정받아 같은 대원처럼 간식을 배급 받은 지호에게 보급 대원이 윙크했다.
“오늘 진짜 고생했어요. 헌터가 이렇게 초기 임무에도 와 주니까 든든하고 좋다.”
“아녜요. 별 도움은 안 됐는데…….”
“이게 도움 안 된 거면 형철 반장님은 진짜.”
“아 또 뭐요. 나 뭐요!”
대원들이 옥신각신하며 다투었다. 진짜 싸우는 건 아니고 친밀감에서 오는 애정 어린 농담과 투닥거림들. 지호는 함께 웃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놀랍게 여겼다. 요 며칠,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편안함이었다.
각성자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알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것을 생각하면 이쪽은 몸이 좀 고생하긴 하지만 그런 불편은 없었다.
“도재 반장한테 구호 물품 전달됐대. 야간 순찰차 대기 신청도 해 놨고.”
“그쪽 진짜 걱정이네.”
지호가 눈을 굴리자 자연스럽게 승찬이 설명을 속삭였다.
“아까 부평 초등학교에서 생존자 그룹에 남았던 대원 말하는 겁니다.”
“아, 아! 브라보 원 분이요. 들어갈 수 있게 되면 헌터분들 바로 날아가실 수 있겠죠?”
“사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쪽보다 대학교 안에 집단 생존자들이 많이 발견됐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 대피며 대처며 나쁘진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장 음식과 물이 문제일 겁니다. 아마 헌터들이 그쪽으로 우선 투입될 것 같고요.”
“여기엔 애들이 있는데…….”
“그쪽은 백 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지호는 침묵하며 남은 초코바를 입에 밀어 넣었다.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샛별이 같은 어린애들이 학교에 남아 있다는데.
물 한 통을 순식간에 다 비운 델타 팀원이 빈 플라스틱 통을 찌그러트리며 비슷하게 얼굴을 구겼다.
“진짜 인원이 많아서 그런 거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