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어감이 썩 좋은 말은 아니었다. 각성자가 아니면서 그들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을 만한 권리를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까? 지호의 심란한 얼굴을 본 보현은 빙그레 웃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인이 금지된 정보에 목말라하는데요. 앞에 줄 세워 놓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넘겨주면서 연구에 협조해야 하는데, 그걸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 붙여 놓고 사람 모집하면 진짜 구름 떼처럼 모여들어요. 다 그들이 선택한 일이고요.”
“발설하면 어떻게 돼요? 그 자리에서 죽나요?”
“아뇨. 정보 접근 자격을 박탈당하죠. 그럼 그 이후로는 각성자가 되지 않는 한은 평생 우물 안 개구리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이외에는 큰 제재를 가하진 않아요. 아무래도 마음 여린 사람투성이라, 그런 건 싫어하죠.”
자조 섞인 비아냥거림이었다. 보현이 다른 각성자들을 너무 무르게 취급하는 것 같아 지호는 슬쩍 거들었다.
“그래도 계약은 확실하게 해야 좋지 않을까요? 누가 정보 좀 내다 팔고는 입 싹 닦으면 어떻게 해요.”
“뭐, 그런 식으로 일반인에게 정보가 조금씩 유출되어 왔죠. 하지만 괜찮아요. 언젠가는 모두가 모든 정보를 공유할 때가 오겠죠. 결국에는 각성자가 되는 방법까지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직은요.”
괴물의 시체에서 마정석을 추출하는 과정은 대단히 복잡했다. 처음에 이걸 발견한 건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고. 지호는 이형 에너지의 파장이 괴물의 몸을 샅샅이 훑어 나가는 것을 느끼며 추출 과정을 관찰했다.
쉬운 비유로 말하자면, 다 쓴 치약을 잘라 덜 쓴 것들을 짜내기 위해 몸체를 꾹 눌러 치약을 끝까지 짜내는 느낌. 죽은 괴물의 시신에서는 이형 에너지와 낯선 파장이 연기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아마 그대로 내버려 두면 오래 지나지 않아 평범한 시체가 될 것이다. 물론 그 평범한 시체조차 이곳에서는 좋은 재료가 된다.
연기가 될 에너지를 모아 고체화하는 것이 마정석 추출 과정이다. 어떻게 시도해 보면 비슷한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이것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지호에게 보현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죠?”
“예? 아니, 아뇨. 그럴 리가…….”
“모르는 척 안 해도 돼요. 기능공이 되기 위한 보조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떠한 각성자라도 이 작업만큼은 할 수 있어요. 기초 훈련에서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도 이거고요. 살아 있는 상태의 괴물에게선 더 큰 마정석을 뽑아낼 수 있죠. 반항이야 좀 하겠지만.”
“다들 할 수 있다고요?”
“그럼요.”
오래 배워야 한다는 말은 쏙 삼킨 채 보현은 생긋 웃어 보였다. 표정이 이랬다저랬다 요란하게 변하는 걸 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 탁월한 능력 덕에 지호는 지금 당장 마정석 추출을 시켜도 순도 높은 마정석을 제 앞에 내밀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좀처럼 확신하는 일 없는 보현이었으나, 그는 지호를 보면서는 드물게 확신할 수 있었다. 모두가 할 수 있으니 지호 역시 당연히 할 수 있겠지.
그러나 확신과 더불어 염려와 걱정을 동시에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스물이 다 되어 가는 나이라지만 여전히 어렸다. 스물이 뭐야. 서른이 되어도 자신을 어리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나라다. 마흔이 되어도 영 포티니 피터팬이니 하는 말로 자신의 어림을 주장하려는 자들이 많은 것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지.
그러니 정말로 어린 십 대는 어떠한가.
책임지기 어렵게 강한 힘을 쥐고서 지호는 위태위태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할 수 있으면서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옆에 선 보현의 눈치를 보고, 매사에 너무 조심스러워 오히려 좋지 않아 보였다.
“지호 씨. 둘러보니 좀 어때요. 아직도 헌터에 좀 더 관심이 가요?”
“어, 음. 여기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특히 일반인을 위한 작업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더라고요. 저도 오랫동안 이분들 덕을 본 거잖아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모두가 변호사가 되고 검사가 되면 병은 누가 고치나요? 모두가 의사가 되면 집은 누가 지어요? 각자의 자리에 높고 낮음이 없고, 하는 일 모든 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보현은 아직도 머뭇거리는 지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내 눈치 보지 말고, 헌터가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요. 어차피 이다음에는 헌터들이 어떻게 배우고 훈련하고 싸우는지 보여 줄 생각이거든요. 그러니까 둘 다 경험한 뒤에 고민해도 괜찮아요. 다시 말하지만, 어느 쪽도 상관없어요. 싫어해도 괜찮고요. 설령 일반인으로 살고 싶단 마음이 든다? 그럴 수도 있어요. 아무도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그치만…….”
지호는 망설이다가 보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치만, 제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잖아요.”
“오해하지 마세요. 비단 지호 씨라서만은 아니에요. 저는 어느 각성자건 그들이 헌터 일에 뛰어들게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게 남이 등 떠밀어서가 아니라 자기 선택으로 가는 길이라면 어떻게 반대하겠어요. 응원하면 했지.”
보현은 지호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임시 보호자이기도 했다. 미성년자이기에 배정된 관계이고, 그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상대.
지호는 보현이 해 주는 말을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받아들여 왔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의미다.
주리가 주원을 데려왔을 때 깨달았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보호자였다면 지호에게 좀 더 다양한 길을 열어 주고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현은 그러지 않았다. 지호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선택 전까지는 계속 제게 다른 길 위주의 정보를 주시겠죠? 그 길을 택하지 않기를 바라시니까. 그러니까 그 자기 선택이란 걸 확실히 하기 전까지의 제가 얻을 정보는 좀, 여러 가지로.”
지호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입 밖으로 뱉은 뒤에 종종 찾아오는 종류의 후회를 맞닥뜨린 지호는 보현이 화내거나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무표정하게 핸드폰을 꺼내는 것만 볼 수 있었다.
“그럼 헌터 쪽 정보는 박 팀장한테 부탁해 보죠. 지호 씨 말대로 저는 객관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길을 제시할 테니까요.”
보현은 지호가 보는 앞에서 연락처를 뒤졌다. 박찬민 세 글자가 보이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연결되자마자 대뜸 한다는 말이 초장부터 공격이다.
“우리 애한테 뒷 수작, 진짜 안 부렸어요?”
수화기 저편 박 팀장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지호는 쩔쩔맸고 박 팀장은 그리 크지도 않은 수화 음 너머로 지호에게 들리게 소리쳤다. 아, 왜 이래요! 진짜 아니라고요!
“그럼 왜 우리 애가 헌터에 관심을 보일까. 이렇게까지 험한 일 겪었으면 그 지옥에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기 어려운데.”
-보호자가 모르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때 임보현 헌터랑 센터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곤 본 적도 없어요!
“됐고, 여기 부평 각성자 연합이거든요. 몇 분이면 넘어올 수 있죠?”
다음 말은 소리치지 않아 지호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보현만 들은 대답.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3분 후에 봐요.”
답도 듣지 않고 뚝 끊는 모양새가 어째 무례하기 짝이 없다. 지호는 보현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났나? 어쩌면 임시 각성자를 돌보겠다고 거두는 이유가 자기 파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든지 뭐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여전히 자기 눈치를 보는 지호에게 기능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자랑하듯 손을 펼쳤던 보현은 그 과장된 몸짓을 거두며 한숨 쉬었다.
“역시 헌터가 되고 싶은 거죠. 요즘은 다 그렇죠. 사실 알고는 있었어요. 괜히 이쪽 먼저 보면 생각이 바뀔 거다 뭐다 한 거지. 언제나 뛰어난 재원은 헌터가 된다니까요. 이놈의 각성자들이란 언제쯤 자원봉사를 그만둘까. 언제쯤 자기들만을 위해서 일할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자리들을 권해요.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고요, 그냥. 그냥 더는 희생하지 않기를 바라서요.”
3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동 능력자의 파장이 느껴졌다. 한 번 경험했다고 벌써 예민하게 알아채는 자신의 능력이 조금 마음에 들어, 지호는 당당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병아리가 가슴 부풀리는 종류의 우쭐거림이란 것도 모르고.
“타인을 구할 능력 있는 사람은 그들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던지면서까지 희생하는 존경받는 사람까지도 못 되니까, 적당히 할게요. 적당히요.”
그걸 못 해서 죽었다 살아나 각성자가 된 사람의 말이었기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상기된 얼굴로 둘 사이에 나타난 박 팀장은 눈을 빛내며 지호를 돌아보았다.
“헌터에 관심 있다고요?”
“어, 예. 안녕하세요.”
“마침 시간도 얼추 맞겠다, 이동하죠! 지금 훈련 시간이거든요. 데려가도 됩니까?”
보현이 고개를 끄덕였는지 지호가 끄덕였는지 정확하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흰 복도에 서 있었다. 지각의 혼동으로 균형이 잘 맞지 않아 한참 헤맸다. 안정되기를 곁에서 기다려 준 박 팀장은 미안한 얼굴로 물을 건넸다. 보현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익숙한 사람들은 알아서 조절할 수 있는데 내가 너무 신이 나서……. 미안합니다. 장거리 이동이 원래 몸에 좀 무리가 가요.”
“여긴 어디죠…….”
“부천 헌터 협회입니다. 이번 급성 균열에서 정제된 마정석 중에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게 발견돼서 헌터들이 직접 실험 중이었거든요. 각성자 대상 실험이란 게 좀 그래요. 별다른 실험 대상이 없다 보니까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죠.”
“언니는요?”
“임보현 헌터에겐 출입이 제한된 구역입니다. 그래서 저를 부른 거고요. 이제 좀 괜찮습니까?”
“출입 제한요? 왜요?”
박 팀장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얼굴에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거짓말하긴 좀 어려운 사람일 것 같았다.
“음, 헌터라는 직업에 좋은 감정이 없는 분이라서요.”
“헌터들을 공격하나요?”
“예? 으하하하하!”
박 팀장이 너무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실험장 부근에 있던 헌터들이 두 사람을 주목하며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지호는 괜히 빨개진 얼굴로 그들을 모른 척했지만, 박 팀장은 신경 쓰지 않고 일 보라며 손을 내저은 다음 유쾌하게 덧붙였다.
“그럴 리가요! 헌터들한테 누구보다 호의적인 분이신데요. 그분부터 헌터였잖습니까?”
“방금 좋은 감정이 없다고 그러셨는데…….”
“직업에 말이에요, 직업에. 직업군에요. 다른 각성자가 헌터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신단 의미죠.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임 헌터님처럼 처음부터 강한 힘을 갖게 된 각성자들일수록 헌터직에 종사하는 걸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누군가는 균열에 들어가서 사람을 구해야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도 얻어 와야 하고. 아까 계셨던 각성자 연합 같은 경우에도 헌터들의 수확물이 있어야 작업을 할 수 있는걸요.”
그럼 뭐가 문제인가. 왜 보현이 여기 출입을 금지당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