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입구가 열리고 안쪽으로 천장 높은 내부가 보였다.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 바빠 보였다. 내부 견학 신청을 하러 왔다고 용건을 밝힌 주리는 연합 측 담당자가 내어 준 안내서를 뒤집어 빈 곳에 그림을 몇 개 그렸다. 산호와 물고기다.
“그러고 보니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상태라고 했죠. 간단한 상식 수업을 좀 하겠습니다.”
“갑자기요?”
“배움에는 늘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균열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지호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끽해야 4단계 경보가 울릴 때의 대피 방침과 흔한 괴물 몇 마리의 특징, 그리고 생존자 표식 남기기 정도나 될까. 자신 없는 답변을 들은 주리는 그럴 줄 알았다며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리켰다.
“균열은 생성된 직후 에너지가 안정되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로 며칠 유지됩니다. 그러면서 새 괴물이 나타나기도 하죠. 정확한 메커니즘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협회에서 세운 이론에 의하면 균열 내부에는 이러한 생태계 같은 것이 조성되는데 그것은 일반 균열이나 급성 균열 모두에 해당합니다. 다만, 두 균열 사이에는 열리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가의 차이가 있죠. 일반 균열은 열리기 전부터 한참 대피령을 내리니 피해가 줄었지만, 급성 균열은 여전히 재앙이니까요.”
“새 괴물이 나타나서 위험하다곤 해도, 사람들을 구하러 들어갈 수는 있지 않아요?”
“균열이 안정되는 시기가 올 때까지는 그 내부로 들어가거나 안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경계 자체가 각성자를 괴물과 비슷하게 인식하는 것 같더군요. 균열의 이형 에너지가 괴물과 각성자를 포함해 생태계를 조성하거든요. 그런데 그 경계를 각성자가 지나친다? 내부 에너지가 안정되지 못하고 다시 요동치며 더 많은 괴물이 나타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균열이 확장됩니다. 그래서 안정기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죠.”
지호가 깨어나기까지 며칠이 걸려 차라리 운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재앙 속에서 왜 헌터가 오지 않느냐고 슬퍼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겠지.
물고기들 그림 위에 커다란 이빨 가진 물고기, 그러니까 마치 상어처럼 보이는 고기를 하나 그려 넣은 주리는 혹시 바닷속 산호에게 가장 중요한 게 상어라는 걸 알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본디 바다에는 산호에 의지해 살아가는 물고기가 많습니다. 이것들은 산호를 뜯어 먹고, 산호에 숨어 포식자를 피하죠. 그 개체 수를 줄이는 게 상어 같은 포식자라, 포식자가 없으면 해조류들은 최소 생태밖에 유지할 수가 없게 됩니다. 포식자가 있을 때는 무성하게 자랄 수 있죠. 보편적으로 균열 내부 생태계에서 일반인이나 약한 괴물들이 이 해조류를 담당합니다. 각성자와 약간 강한 괴물들이 물고기처럼 해조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군림하는 포식자는 어느 균열에나 있으니 마주쳤을 시 빠르게 도주하는 쪽을 추천합니다. 놈들도 굳이 가시 많은 먹잇감에 손대진 않고 다른 괴물을 사냥하니까 크게 염려하진 않아도 괜찮다는 이점이 있죠.”
다큐멘터리를 보는 건지 환경 수업을 듣는 건지 균열 수업을 듣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이해가 갔다.
“그 강한 괴물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각성자들 투입이 늦어지는 건가요?”
“아뇨. 균열이 안정되는 과정은 그 생태계가 발생하는 과정입니다. 근데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생태계에 새로운 이형 에너지가 끼어들면 균열이 그 각성자를 최상위 포식자로 인정할까요, 아니면 더 강한 포식자를 만들어 낼까요? 경험한 바로는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사고 사례에 대한 기록을 보여 준 주리는 초창기 균열에서 일어난 재앙들을 거론하며 담담히 말했다.
“한때는 힘을 얻고 영웅인 줄 알았던 각성자들은 금방 현실을 파악하고 자기 위치를 받아들였습니다. 영화 속 히어로는 현실에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지나치게 잔인한 사진들은 빠르게 넘어갔지만, 지호의 강화된 시력은 그런 순간들을 잡아냈다. 그 잔인함을 모른 척하고 싶어 지호는 침묵했다.
지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기에 주원이 슬쩍 끼어들었다.
“균열의 법칙도 모르고 무작정 들어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진정한 지옥이었어요. 무자비한 포식자에게 많은 각성자들이 죽었죠. 초창기에는 특히 자연 소멸하기를 기다려야 할 만큼 강한 괴물들이 튀어나온 균열이 많았어요. 일반적인 균열들은 최상위 포식자를 제거하고 나면 조금씩 좁아지다가 며칠 안에 사라지거든요. 그런데 균열 발생기에 들어갔다가 생태계 자체가 상향 평준화되어 버리는 바람에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처음에 헌터 일 좀 하다가 이놈이 때려치운 건 그런 것들 때문입니다.”
“예, 뭐. 그래서 아무도 휘말리지 않는 일반 균열들에나 좀 들어갑니다. 자주 균열이 열리다 보니 아무도 살지 않게 된 구역이라든지, 예보를 잘 지켜 거의 모든 사람이 대피한 덕분에 구조 걱정 없이 괴물 사냥을 할 수 있는 균열 같은 것들요. 거기서는 헌터들뿐 아니라 일반 각성자들도 좀 편하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거든요. 비교적 마음도 편하고. 뒤에서 괴물 시체 수습하고 마정석 수거 작업에만 참여해도 되고요.”
주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종이를 도로 뒤집어 견학 안내서를 지호에게 돌려준 주리는 건조하게 덧붙였다.
“헌터가 되면 그것들과 싸워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죽음의 공포와 다시금 맞서 싸울 각오 있는 사람만 헌터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아니면 이 겁쟁이 따라 할 수 있는 일만 해도 됩니다. 언제나 각성자는 부족하거든요.”
“예. 겁쟁이 환영입니다. 목숨 아까워한다고 누군들 비난하겠어요? 앞서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경외하는 건 가능하겠지만요.”
닮은 얼굴의 두 사람이 하는 비슷한 말이다. 느낌은 전혀 달랐지만.
주리가 참고 삼아 보여 준 자료들에는 옛 균열 기록 통계들이 숫자로만 적혀 있었다. 각성자들이 일찍 투입되면 균열에 숨어 생존하던 사람들의 생존율이 0에 가까워진다는 이야기의 뒷받침이 되는 그 기록들. 지호는 주리가 보여 주는 정보들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건 어디서 찾아보나요?”
“균열 어플입니다.”
“제가 쓰는 거랑 좀 다른 것 같은데…….”
“각성자 인증하면 언락 되는 기능이 많습니다. 차후 임무 투입 시에도 사용하고, 바쁠 땐 핸드폰 들여다볼 시간이 없으니 다른 보조 도구를 지급받으실 겁니다.”
“당연히 헌터가 된다면의 이야기고요.”
“일반인에겐 제한 걸린 정보가 대부분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당장 내 가족이 균열에 갇혔으니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내 가족을 구해 달라고 하는 요청들은 언제나 있었으니까요. 일반인 정보 제한은 경험으로 축적된 역사의 산물이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헌터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각성자 접근 가능 정보는 당연히 공유받을 수 있습니다. 작전에 참여하는 때도 종종 있거든요.”
주원이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맺었다. 주리는 이런 기능이 있다며 보여 주려고 지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본디 구조 신호 전송과 균열 내에서 목격된 괴물 정보 공유와 피난처 안내 등의 기초적인 기능밖에 없는 어플 아니던가. 지호는 처음 보는 아이콘과 기능 탭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조 신호가 울리는 방향으로 다가갈수록 진동이 강해지는 각성자 전용 메뉴 같은 것도 있었다. 이런 걸로 생존자를 찾는구나.
지호가 신기해하며 주리의 화면을 이것저것 눌러 보던 중 보현에게 연락이 왔다. 주리는 기기를 넘겨받아 사무적으로 몇 마디 대답한 뒤 알겠다며 통화를 마쳤다.
“임 헌터가 요청받고 갔던 일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이쪽으로도 금방 올 거고요. 저는 온 김에 장비 점검이나 받고 가야겠군요.”
“엇, 벌써요?”
“아마 다 부수고 왔을 것 같지만요. 성격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주원은 보현의 요청에 따라 좌표를 확인하고 저쪽으로 넘어가 그를 데려왔다. 이동 능력은 편리하구나, 하고 생각한 지호는 몇 번 힘을 쓴 것만으로 해쓱해진 주원을 보며 생각을 정정했다. 희귀한 능력자라 사방에서 불러 대는 모양이었다.
보현을 데려온 뒤에도 주원을 찾는 연락이 여기저기서 왔다. 그는 먼저 가 보겠다며 자리를 떠나고, 주리 역시 일을 보러 간다고 안으로 들어갔다. 쇠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용접 소리도 들렸다. 도대체 무슨 작업들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주원 각성자도 와 있었네. 구경 잘했어요?”
“아직 설명만 듣느라 들어가진 않았어요.”
“잘됐네. 안쪽은 내가 소개할게요. 부평 각성자 연합에 온 걸 환영해요.”
문고리에서 복잡한 파장이 퍼져 나가는 순간, 지호는 그게 각성자만 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잠금장치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보현이 알았다면 또 천재니 뭐니 떠들 것이 분명한 그 직감적 분석은 곧바로 머릿속에서 휘발되었다.
낯선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이 냄새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릴 거예요. 괴물 가공하는 냄새라서 어쩔 수 없긴 한데.”
“괴물이 균열 밖으로 나올 수도 있나요?”
“사례가 없었던 건 아니죠. 몇 번 안 되지만요.”
보현은 차분하게 말하며 다듬어진 가죽을 쓸었다. 그러나 그 설명부터 했다간 오늘 여길 돌아볼 시간이 끝날 터라, 그는 우선 관람을 권했다.
“이쪽은 가공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나누는 구역이에요. 여기서 가능한 쪽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식재료나 부산물 가공, 그밖의 모든 작업으로 넘어가요. 사용 불가 판정받은 것들은 보통은 폐기하는데 일부는 비료로 쓸 수 있더라고요. 식물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종류도 발견돼서요. 하여간에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서 아직 연구 단계예요. 보통은 90퍼센트 이상을 폐기하긴 하지만요. 여기서 말하는 폐기는 각성자의 능력을 사용한 완전 소각이에요. 보통 불 계열 능력자나 중력 관련 능력자들이 우대받고 있어요.”
괴물의 크기는 다양했다. 작게는 지호의 손만 한 것부터 크게는 그 부속지가 잘려져 있는데도 크기가 건물만 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들까지 다양했다. 지호가 봤던 것도 건물만 했었지. 수희의 얼굴이 떠오르자 지호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먹을 수 있는 종류는 좀 나중에 공부하면 금방 익혀요. 자주 나오는 괴물류 중에 몇 가지만 알면 되니 금방이라 넘어가고요. 이쪽은 헌터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나 방어구 종류를 가공하는 장인들의 작업실이에요. 저쪽으로는 저도 함부로 못 넘어가요. 워낙 이형 에너지에 예민한 재료들이 많다 보니까, 늘 출입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규정이 그래요.”
“헌터들을 위한 무기나 방어구요?”
“균열에선 모든 게 쉽게 부서지거든요. 인간도 예외는 없죠. 근데 거기서 태어난 놈들은 또 나고 자라기를 단단하고 질기고 튼튼하게 자라서, 그놈들을 이용하면 덜 다칠 수 있어요. 이건 거미 갑각을 이용한 관절부 보호대네요. 많이 쓰이진 않겠지만.”
거미는 강도가 좀 약한 편이거든요, 하고 덧붙인 보현은 곧바로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지호는 그를 무력하게 하던 무수한 괴물들이 여기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것을 보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정말 강하고, 더불어 더 강해질 수 있구나.
“가공이 어려운 재료를 사용할 수 있게 다듬어 내는 기술은 정말 최근에 발견됐어요. 여기 도제로 들어가서 배우기만 해도 세월 잘 갈 거예요. 아, 그리고 이쪽은 일반인들을 위해 괴물 부산물 중에서도 대표적인 마정석을 가공하는 팀이죠. 이형 에너지만 다룰 수 있는 각성자라면 누구나 여기서 일할 수 있어요. 이쪽 연구 팀엔 일반인들도 더러 있는데, 입구를 드나들 때는 꼭 동행인으로 배속된 각성자와 함께해야 해요. 그래도 연구진에는 꼭 각성자가 있을 필요가 없어서, 각서와 발설 금지 강제 계약을 거친 연구자에 한해서만 받아들이고 있죠.”
“강제 계약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