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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5화 (16/260)

15화

지호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없어서 가계부를 쓰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 쉬는 엄마를 보아 왔고, 신선한 채소와 건강한 식재료 대신 인스턴트를 먹는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왔으니까. 유통 기한 얼마 안 남은, 혹은 타임 세일과 마감 세일에 맞추어 운 좋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 정도나 지호네 식탁에 올라왔다.

그런 빡빡하고 치열한 삶들은 다 지호네가 돈이 없기 때문이었으니까.

이제는 갈 곳도, 함께할 사람도 없다. 그러니 지호는 더더욱 돈을 벌고 싶었다. 보현은 옷을 도로 한쪽에 걸어 두었다.

“하지만 수명이 확실한 직업이랍니다. 오래 일하기도 힘들고요. 뭣보다 균열이 열릴 때마다 그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권할 수 있겠어요.”

“헌터만 돈을 많이 버나요?”

지호는 어제 공인 각성자 지원 센터인가 뭔가 하는 곳의 박 팀장과 다투던 보현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헌터 쪽 사람이고, 보현이 아마 다른 각성자 측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아뇨. 각성자가 돈을 많이 버는 거죠. 균열에서 나온 부산물을 다루는 모든 직업군은 다 각성자들 차지인걸요. 언제나 사람이 부족해요. 이쪽이야말로 재능 있는 각성자가 필요한데, 보통은 헌터가 되겠다고 뛰쳐나가기 일쑤라서요. 나중에 헌터 일 못 할 만큼 이형 에너지에 노출되어 몸이 망가진 다음에서야 이쪽 일 하겠다고 돌아오긴 하는데……. 아무래도 건강한 사람이 일을 더 잘하기도 하고, 이쪽 일도 이형 에너지에 노출되긴 마찬가지라…….”

말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던 보현은 지호를 흘깃 살폈다. 헌터 일에 관심이 있나? 사실 많은 각성자가 우선 헌터가 되려고들 하기는 했다. 워낙에 인지도가 높기도 하고, 대중들 앞에 나서는 빈도도 훨씬 높으니까.

보편적으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적 면모는 모두 헌터의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도 균열의 부산물을 함께 누리고 나눌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는 건 다른 각성자들의 몫이었다. 보현은 그걸 차분히 설명하며 조언했다.

“헌터가 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 헌터가 되는 것도 좋지요. 균열에서 사람들을 구조하는, 예전에는 소방관에게 몰려 있던 종류의 구조 인력이 되는 셈이거든요. 그밖에도 실질적 치안대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부류도 있는데, 그쪽을 원하면 경찰 시험도 보고 해야 해요.”

“경찰 일까지요?”

“구조대 겸, 잡다한 거 다 해요. 특히 균열 터지면 더 그렇죠. 헌터 경찰직이 따로 있긴 한데, 헌터들이 비상시에 현장에서 그 역할들도 겸하거든요. 위험

한데 일반인 경찰들 불러다 놓을 순 없잖아요. 물론 기본적으로 최우선 순위는 구조가 맞지요. 괴물들과 싸우고 부산물을 수확하는 건 다음 이야기고요.”

사냥이라니. 그 무지막지한 괴물들을 사냥한다니! 지호는 머리로는 헌터라는 직업을 동경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맞서는 괴물에 대한 실질적 공포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다시 그것들과 마주하라고 하면?

지호를 발기발기 찢어 버렸던 그 뱀 같은 괴물들을 떠올리면 곧장 소름부터 돋았고, 균열에서 마주쳤던 개체들 하나하나 만만한 놈이 없었다. 지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보현은 말을 돌렸다.

“우선 기초 교육 그거 다 받고 생각해요. 무작정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하고 한쪽에 속한 사람 이야기만 듣지 말고요. 아까 봤잖아요? 저는 헌터라는 직업에 좀 반감이 많은 사람이라서.”

“어……. 왜인지 물어봐도 돼요?”

“아뇨.”

보현은 그 이상의 질문을 거부하는 얼굴로 웃은 다음 이제 슬슬 잘 준비를 하라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지호는 화장실이 한 집에 하나 이상인 곳을 본 것부터 신기하다고 느꼈지만, 그 이상 모르는 티 내지 않으려고 힘차게 자기 방에 딸린 욕실 문을 열었다.

칫솔을 문 채 보현에 대해 생각한다. 1세대 헌터. 노련하고 경험 많은 사람이 분명한데 헌터 일에 부정적이다. 말한 것처럼 균열에 들어갔을 때 노출되는 이형 에너지가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단순히 그런 이유로 보기는 어려웠다. 뭣보다 보현은 지호와 샛별이를 구하러 그 균열에 단신으로 뛰어들 만큼 실력 있는 헌터다. 병원에 앉아 있으면서 그게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야기도 듣고, 보현이 가져다준 자료를 읽으며 팀으로 일하지 않는 상위 헌터들의 기록들도 열람했으니까.

지금은 헌터가 아니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직은 풀 수 있는 의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휴식은 의무. 휴식은 의무. 아무리 중얼거려도 안 오던 잠이 오는 건 아니다. 지호는 결국 눈만 감은 채 밤을 보냈다. 몸이 튼튼해진 덕에 핏발이 서고 벌게질 거라고 생각했던 눈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모두가 원치 않는 출근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집을 나서는 일상적인 시각, 새벽부터 온 연락에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고 미안한 표정을 지은 보현은 랩 하듯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도우미 이모님 오시면 지호 씨 신체 정보 등록 좀 도와달라고 해요. 현관이나 문 열고 들어올 때 써야 하니까. 이주리 헌터가 보호자로 올 거예요. 금방 올 수도 있고 좀 걸릴 수도 있어요. 있다 봐요.”

정말 급한 용건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던 건 이동 방식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아파트 고층에서 그냥 뛰어내리다니. 왜 창문을 잠그지 말라고 했던 건지 이렇게 빨리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문제다. 지호는 떨떠름한 얼굴로 저 멀리 날아가는 보현을 쳐다보다가 베란다 창이나 닫기로 했다.

현관 옆에 있는 기계도 살펴보고 태블릿PC도 들여다보며 소일하다 보니 시간이 잘 갔다. 이른 아침 도착한 도우미 이모님은 지호 신체 정보를 아파트 서버에 등록하는 절차를 도와주었고, 맞을 만한 옷도 찾아 꺼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하는 지호에게 방긋 웃으며 메시지 카드를 건넨다.

<말은 못 하지만 글은 읽을 수 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이야기해요.>

“앗, 네. 저. 감사합니다…….”

웃는 얼굴이 엄마를 닮은 사람이다. 간밤 먹은 것들을 치우고 보현이 허물처럼 벗어 놓은 빨랫감을 줍는 모습이 능숙했다. 지호는 머뭇거리다가 자기가 벗은 빨래를 빨래 통에 넣었다. 돌아오는 웃음에 더더욱 죄책감이 느껴졌다. 같이 일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지호가 잔일을 도우려고 소매를 걷어붙이려 할 때 방문객이 도착했다. 보현이 말했던 이주리 헌터였다. 무뚝뚝한 얼굴에 말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서늘한 분위기를 풍겨 대는 사람. 큰 키에 소매 너머로 보이는 근육이 탄탄해 위압적인 느낌을 주었다.

헌터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잡히는 감각 자체는 도우미 이모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터님이신가요?”

“이주리입니다. 임보현 헌터의 부탁을 받아 잠시 인계받았고요.”

“어, 음. 너무 불쾌해하지 말고 들어 주세요. 여태 만난 다른 분들은 다들 그, 다른 감각 같은 게 느껴졌었거든요. 그런데 헌터님은 그렇지 않으시네요.”

“신체 계열만 보유한 헌터라 그렇습니다. 특정 능력 가진 괴물들 정도나 탐지할 수 있어서 은신 임무에 적합하죠.”

“닌자 같네요.”

“특수 요원으로 분류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왜색이 짙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알아 두시길.”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호를 크게 싫어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보현이 부탁한 일이 있다며 동행을 청했다. 임보현이라는 이름자가 지호에게 벌써 무게가 커서, 지호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주리를 따라나섰다.

주리가 손목에 찬 기계는 시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가 패널을 조작하자 주변 이형 에너지가 일렁였다. 어제도 느낀 감각이다. 지호는 쭈뼛 서는 감각에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나타난 건 주리와 똑 닮은 남자였다.

“본디 임보현 헌터는 제게 각성자 연합 소개를 부탁했습니다만, 그런 임무에는 저보다 제 동생이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헌터지만 제 동생은 헌터가 아닌 일반 각성자거든요. 사실 현장 뛰는 입장에선 이지호 각성자가 당장 헌터 교육을 받으러 왔으면 좋겠지만, 어린 친구에게 그런 상황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저는 이 재원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입장 다른 덤을 데려왔습니다. 아마 임보현 헌터도 이럴 거라고 짐작은 했을 겁니다. 이주원. 소개해.”

“이주원입니다. 이 독재자 동생이고요. 으악!”

주원은 주리에게 뻑 소리 나게 한 대 얻어맞곤 울상을 지었다. 평범한 남매 같았다. 주리보단 웃는 상이었으나, 마찬가지로 살가운 느낌은 아닌 이주원 각성자는 최대한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근에 각성했다죠? 아직 몸이 안 나았을 때 아닌가요. 무리하면 나중에 고생해요.”

“그러니 이지호 각성자는 얌전히 따라오기만 하면 됩니다. 이주원, 가자.”

“사람이 무슨 택시도 아니고…….”

주원은 한 대를 더 얻어맞고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두 사람과 손을 잡았다. 이동의 전조. 이형 에너지가 기이하게 몸을 감싸며 눈앞이 환해진다.

아파트 앞에서 낯선 동네로 이동해 오자 불안감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나마 아주 모르는 곳은 아니다. 넓은 광장 한쪽으로 역 건물이 보였다.

“부평이네요.”

“이 근방 각성자 연합 중에서 제일 설비도 잘 되어 있고 규모가 큰 곳입니다. 기능공 연합 인천 본거지이기도 하죠. 마스터니 장인이니 하며 가끔 언론에도 나오는데, 들어 본 적 있을 겁니다.”

“제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각성자는 관계자라 괜찮습니다.”

담대하고 대범하던 균열 시절과 달리,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는 지호는 소심하고 연약했다. 정신 방벽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지호가 스스로 위험 상태라고 인식해 최대치까지 끌어 올려 무감각해졌던 그때와는 당연히 달랐다.

기능공들의 공간은 파장의 밀도가 높고 그 정도가 지독할 만큼 밀집되어 있었다. 각성자들을 감지할 수 있었던 지호는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전율했다. 놀라울 만큼 예리하게 다듬어진 사람들이란 걸 순식간에 인지했으니까.

“각성자 연합들을 흔하게는 평화주의자들 모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도 급성 균열 같은 비상사태에는 투입되죠. 전투 헌터가 아니어도 각성자라면 기본적인 전투 교육 정도는 받으니까요.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당연한 일입니다.”

“옆에 각성자님도요 여기 소속이세요?”

“아뇨. 이 녀석은 별로 쓸모가 없어서요. 말씀드렸다시피 여긴 장인들의 본거지라 진짜 실력 있는 알짜배기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연구 개발하는 곳이거든요.”

“아, 너무하네.”

“할 줄 아는 거라곤 염동력 정도가 다인 놈이라 전투에 직접적인 쓸모는 없습니다. 그래도 도망이나 생존자 구조에는 유용하니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진 않죠. 이동 능력자는 귀하거든요.”

별로 귀하게 다루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주리는 간략히 그의 쌍둥이를 평가하며 입구 카메라에 헌터증을 내밀었다. 설명을 듣던 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런 분들이 있으면 균열에 들어와서 바로바로 사람들 옮기고 구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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