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새로 온 임시 각성자분이군요?”
지호는 긴장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호보다 머리 하나쯤 키가 큰 남자가 있었다. 호의적인 미소. 능숙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뻣뻣하고 부자연스럽다. 잘빠진 얼굴에서 살짝 접히는 눈이 여우 같다.
지호는 보현과 박 팀장이 들어간 방 쪽을 흘깃 보며 몸을 움츠렸다.
“어, 네. 누구세요?”
“저도 임시 각성자거든요. 얼마 전에 각성자가 되었고요. 그게, 음. 정말 얼마 전에요. 이 근방 급성 균열에서……. 아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죠. 저 말고 다른 미등록 각성자가 왔다길래 반가워서 잠깐 얼굴이나 뵐까 하고 왔어요.”
“예…….”
“서상원이라고 합니다. 그쪽은요?”
“이지호……. 라고 합니다.”
눈치를 살피던 지호는 상원이 내민 채 기다리는 손을 오래 내버려 두지 못했다. 머뭇거리다가 잡아 오는 손을 단단히 움켜쥔 상원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여러모로 자기 얼굴을 잘 쓰는 사람 같았다. 그는 지호와 잡은 손을 마주 흔들며 조잘거렸다.
“저 혼자인 줄 알았는데 반갑네요. 저는 다른 센터에서 교육을 따로 받다가 균열 닫히고 나서 여기 정상 운영된다는 말 듣고 온 거라 혼자예요. 제 담당 헌터님이 바쁘시거든요.”
분명 수상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불안해 보이는 표정과 순해 보이는 인상 때문에 지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약간 놓았다. 급기야 담당 헌터가 자리에 없단 사실을 듣고는 상원을 동정하고 말았다.
보현 역시 급성 균열이 완전히 닫힌 다음에야 지호를 보러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나마 여기에 같이 와 준 게 큰 호의였던 것은 아닐까. 보현이 자신을 오지랖 넓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떠올리면 상원의 경우가 일반적인 것일지도 몰랐다.
“저는 보호자님이랑 같이 왔어요. 지금 잠깐 다른 것 때문에 자리를 비우셔서…….”
“어, 아녜요. 그분한테 관심 있던 건 아니고 그냥 같은 처지에 있는 비슷한 분 있다고 해서 지호 씨를 보러 온 거예요. 원래 비슷한 시기에 각성한 사람들은 같이 교육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지호 씨랑 저도 아마 같은 기로 묶일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저는 아직 아는 게 없어서요.”
“배울 게 산더미예요. 그래서 다행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생각이 떠오를 새가 없어서요.”
집중하지 못하는 다소 불안정한 모습. 지호는 상원이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기 역시 저렇게 보일까 염려하며 어정쩡하게 잡힌 손을 뺄 타이밍을 노렸다.
“그, 나중에 보면 인사할게요. 힘내세요.”
“그래요. 저도 인사나 드리러 온 거긴 한데, 제 연락처 드릴 테니까 혹시 필요하면 연락 주실래요? 제 쪽에서 번호를 달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네, 뭐.”
“연락 주시길 기다릴게요. 꼭이요.”
악수 시간은 일반적인 인사보다 길었다. 찜찜하기 짝이 없는 인사다. 지호는 드디어 자유로워진 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허벅지에 손을 슥슥 문질렀다. 손바닥을 긁기는 왜 긁는단 말인가? 기분 나쁜 남자 같으니.
지호에게는 상원이 억지로 쥐여 준 연락처만 남았다. 지호는 상원이 떠나기 무섭게 연락처 적힌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절대 연락하지 말아야지.
상원이 자리를 비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현이 돌아왔다.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사이가 좋은 모양인지 투닥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이 처음보다 정겨웠다.
“잘 기다리고 있었어요? 못된 아저씨가 사탕 준다고 따라오라고 하진 않았죠?”
“못된 아저씨요?”
혹시 상원을 봤나? 아저씨라고 할 외모는 아니었는데. 느꼈던 대로 이상한 사람이 맞았을지도 몰랐다. 지호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자 보현과 박 팀장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요? 고 짧은 사이에?”
“아니 누가 왔다 갔어요. 저랑 비슷한 처지라고 하면서 연락하고 지내자고…….”
수상한 사람이 접근했나 하고 날을 세웠던 박 팀장은 지호의 설명을 듣고 머쓱한 내색을 보였다. 지호가 상원이 하던 이상한 인사법을 설명하자 더 당장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얼굴을 한 건 덤이었다.
“아, 서상원 씨가 다녀갔군요. 임시 각성자 맞습니다. 지호 씨랑 비슷한 시기에 각성했는데 지호 씨만큼 안정기가 필요하지 않은 각성자라 먼저 이것저것 배우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마 수상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제가 담당이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진짜 수상한 새끼였으면 제가 쓱싹해 줄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지호 씨가 먼저 처리한 건 아니죠? 제가 다른 사고는 좀 커버 칠 수 있는데 상해죄나 폭행죄, 그밖에 중범죄는 좀…….”
“그런 이상한 농담 좀 그만하세요.”
“아니 내가 못 할 말 했나.”
둘이 또 다투기 시작하자 지호는 둘 사이에 낀 채 안절부절못하며 아까의 데자뷔를 절실히 체감했다. 박 팀장과 지호 사이를 가로막은 채 서 있던 보현은 코웃음 치며 피보호자를 돌아보았다.
“아마 제 딴에는 좀 익숙한 방식으로 수작질을 했을 것 같은데 그게 먹히는 사람들한테 그래야지. 지금 피차 비생식자들끼리. 아 너무 웃기네. 갓 각성한 남자들이 제일 재밌어요. 나중에 막 의료진한테 자기 거 안 선다고 막 내가 고자라니! 하면서 우는 사람들 많거든요. 이게 정식 각성자 될 때쯤에나 해 주는 말인데…….”
“네? 수작질이요?”
“그 손바닥 긁는 게 아주 못된 짓거리거든요. 아, 아직 지호 씨도 모르죠? 각성자가 되면서들 죽었다 살아나잖아요. 거기서 무슨 작용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각성자들은 생식 능력을 잃어요. 일부 여자들 입장에선 꽤 환영할 일이죠. 생리를 안 하거든요.”
보현이 윙크하며 속삭였다. 저도 생리통이 좀 심했던 터라 엄청 환영했답니다.
지호는 당황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데 괜찮은가? 이래도 되나? 그의 혼란을 그대로 읽어 낸 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싫어요? 생리통이 별로 없는 타입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막 그러잖아요. 애를 못 낳으면 이거 받고 내 아들이랑 헤어져요.”
“무슨 드라만지 짐작도 안 가는데요…….”
“별로 중요한 건 아녜요. 아무튼, 갓 각성한 각성자들은 자기 힘에 도취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서요. 없던 힘도 생기고 갑자기 특별해진 것 같고 그러니까 안 그러던 사람도 막 자신감 있게 여자한테 들이대고 남자한테 들이대고 그러는 거거든요. 근데 선뜻 그런 용기가 나서 행동한다고 해도 나중에 보면 그게 참,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도통 연애로도 진도를 못 뺀단 말이죠. 아랫도리에 뇌가 있는 사람들은 특히 그래요. 이게 안 서면 안 된다 이거지. 물론 각성자들은 기본적으로 성품이 나쁘지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우는 없는데 말이죠. 거 센터 소속 각성자들 관리 좀 잘해요, 박 팀장. 애한테 집적대게 놔두면 어떻게 해요? 네가 안 선다. 씨 없는 수박이다. 그런 중요한 이야길 왜 안 해 주냐고요.”
“저한테 물어보셔도 모릅니다. 제가 교육 담당이 아니라니까요.”
“그쪽 센터 교육 체계 문제네, 문제야. 다른 센터로 보내야겠다.”
“곧장 돌아가서 교육 과정 점검하겠습니다.”
지호는 크게 웃었다. 또 보자며 인사한 박 팀장이 자리를 떠나고, 보현은 바깥으로 나가는 복도 쪽으로 지호를 안내했다. 센터에 들어오기를 이동 능력자와 동행해 들어왔기에 나가는 길은 초행이었다. 새하얗고 결벽적일 정도로 장식 없는 복도.
두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흐름대로 벽 무늬가 물결치며 변했다. 지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벽이 특이하네요.”
“각성자 센터는 다 이런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요. 아까 그 사람을 비롯해 다양한 능력자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함부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없게 해야 하니까요.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훈련장 외의 실내에서 공격 계열 능력을 쓰면 안 돼요.”
“물론 안 할 거지만, 왜요?”
보현은 싱긋 웃었다.
“반사돼요. 싱거운 자살을 원한다면 몰라도. 어, 이거 농담이니까 장난으로라도 안 해 봤으면 좋겠네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지호에게 집중된 염려와 걱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호는 어쩐지 보현을 제대로 쳐다보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요. 저를 되게 요주의 인물 취급하시네요. 멀쩡하고 괜찮은데.”
“교통사고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세요. 사고 당시에는 괜찮지만, 후유증은 천천히 오죠. 나중에서야 그게 사고로 인한 통증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일을 방지하고 싶은 거예요. 이형 에너지는 사람을 위한 힘이 아니니까.”
“안 괜찮아지면 꼭 이야기할게요.”
“좋아요. 그 말 믿어 보죠. 여기 작업은 끝났어요. 이제 지호 씨는 더 이상 미등록 각성자가 아니고 임시 각성자로 불릴 거고요. 헌터 협회에 기초 검사 자료가 올라갔으니 등록한 센터에서 적당한 교육 담당 헌터가 붙을 예정이랍니다. 이제 먹을 것 좀 사서 집에 가요. 제가 요리는 잘 못하는데, 맛집 정보는 빠삭해요.”
센터에서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동네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아파트를 향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돈된 거리. 깨끗하고 다양한 가게들. 후유증과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 하나 없는 거리가 어쩐지 낯설었다.
지호의 삶은 차라리 그쪽에 가까웠으므로.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균열 속 폐허가 된 도시의 고요와는 다르다. 활기차고 보기 좋았다. 이런 것이 일상인 사람들의 삶에 들어올 수 있어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가끔 균열 부산물로 음식 하는 곳도 있는 거 알아요?”
“예?”
“먹을 수 있는 종류가 없진 않거든요. 알아 두긴 해야 해요. 언젠가는 보급이 끊긴 채 장기전을 대비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그때 가서 연구를 시작하는 건 너무 늦을 테니까요.”
지호는 단박에 얼굴을 굳혔다. 헌터가 된다는 건 그런 괴물들을 먹는 삶을 산다는 거구나. 비장한 얼굴이 된 지호를 보지 못한 보현은 단골집에 사람이 얼마나 줄 서 있나 가늠했다. 좀 전의 화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지호는 머뭇거리다 질문했다.
“그 정도로 먹을 게 없는 상황이 올까요? 괴물을 먹어야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에이, 그 정도 위기가 오진 않겠죠. 균열 너머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부로 드나드는 건데 음식이 부족할 만큼 고립되어 위험에 처하는 헌터가 있을 리가요. 그냥 대비해 두는 거예요. 유비무환이니까요. 그래도 연구진들이 그러는데 꽤 별미래요. 근데 영양학적으로는 증명된 게 없어서 아직 안전하다곤 말 못 해요. 밝혀지는 중이니까, 연구 단계 거치면 일반인들한테 퍼질 수도 있겠죠?”
혼란스러운 저녁 메뉴 선정 단계가 끝난 뒤, 둘은 양손에 각자의 식사를 들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걷는 내내 지호는 자꾸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기 위해 애썼다. 이런 좋은 단지는 처음 들어와 봤다. 건물과 건물 사이 거리도 넓고 공원 길도 잘 조성된 데다 단지 안에 공원과 분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