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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2화 (13/260)

12화

균열에서 발생한 특이 체질 발현자의 총칭, 각성자. 그중에서도 균열에서 괴물을 사냥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헌터라고 칭했다.

각성자라고 전부 헌터직에 종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경험이 경험인지라 균열에 들어가는 것을 극렬히 거부하는 사람이 많고, 모든 능력이 전투에 적합하지는 않았으니까.

저속한 영웅 심리의 만족을 위해 헌터가 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갈 수 없다고 했다. 각성 과정의 여러 조건에 따라 발현되는 힘이 달랐는데, 저런 충동을 느낄 만한 사람들이 경험한 기억들은 다른 각성자들에 비해 난이도가 낮거나 덜 비극적인 편이었다.

죽음에 서열을 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분명, 각성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우열에는 원인이 있었다.

“이거 수치가 좀 비정상적인데.”

지호는 덜컥 겁을 먹었다. 보현은 며칠간 지호를 겪은 바, 단호하게 결론부터 말했다.

“지호 좀 세다? 탑급이네.”

“예? 제가 왜요?”

“보통 한두 가지 능력 각성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것 봐요. 신체 강화에 탐지 및 감지 계열, 정신 방벽도 약간 있네요. 이형 에너지 구현화력도 높은 데다 소질 적성이 좀 낮긴 하지만 치유계도 있어. 이게 뭐야, 사기 아니야? 1세대도 이 지경 천재는 많지 않았는데. 농담 아니고 탑 맞을 것 같아요.”

지호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굴렸다. 검사지를 보니 평균이라고 쓰여 있는 구간이 아래에 있고, 지호의 결과가 천장을 뚫을 것처럼 올라가 있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호는 모의고사에서 일등 한 번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일반계 학교에 다닐 때도 그렇게 똑똑한 편에 속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각성자들 보조하는 일반직 일에 지원하기 위해 공부하면서도 공부 머리가 없는 걸 한탄하며 아슬아슬한 점수에 매번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범생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우등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평범한 학생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탑이라니. 갑자기 꼭대기라니.

“뭔가 잘못 나온 거 아닐까요? 기계 이상이라든가…….”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세 번에 나뉘어서 세 곳의 검사를 따로 진행해요. 왜, 괜히 시키는 것도 많고 들어가야 할 곳도 많고 얌전히 있어야 할 곳도 많았잖아요.”

“그렇기는 했는데…….”

“이거 헌터 쪽에서도 노릴 거고, 각성자 연합에서도 눈독 들이겠네. 근데 너무 부담 갖지 마요. 아무도 강요하진 않아. 그냥 애원할 뿐이지. 몇 명 성가신 게 있을 거긴 한데 신경 안 써도 돼요. 원래 각성자들 다 그래요. 순둥순둥해 가지고들.”

“예?”

“호구 협회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니까. 자, 검사 결과 받았고 퇴원 수속 밟았으니까 이제 집에 갈 거예요. 뭐 빠진 거 있으면 챙기고요.”

보현의 속사포 같은 말에 휩쓸려 지호는 어어, 하는 사이 퇴원 절차를 밟았다. 의사 출신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의료진과 온갖 의료 용어 섞인 대화를 나눈 보현은 지호에게 짐 가방을 넘겨주었다.

“내가 가져온 거 말고 더 챙길 건?”

지호의 시선이 옛날 핸드폰에 닿았다 떨어졌다. 두고 가는 건 오는 연락이라곤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 줄 테니 연락하라는 모르는 어른들의 모르는 번호들뿐인 핸드폰. 사진이며 추억이며 모두 부서진 채 그런 매정함으로 끊임없이 지호를 할퀴는 그 핸드폰뿐이다.

“없어요. 다 챙겼어요.”

보현은 질문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혹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거나.

며칠 만에 병원을 나서며 본 건 파란 하늘이었다. 창밖으로 보이기는 했는데, 이렇게 햇살 아래서 제 발로 길을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고요하지 않은 길거리와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가슴을 뛰게 했다.

“간호사가 감지계 능력 관련해서 언질 주더라고요. 지금이야 아직 능숙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각성자들만 느끼는 거지, 나중에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생존자 찾고 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 거예요. 아, 헌터 일을 한다면의 전제지만.”

“언니도 헌터잖아요. 각성하면 헌터가 되는 거 아녜요?”

언니라는 칭호에 언제나 난처한 웃음을 짓곤 하는 보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칭호를 걸고 넘어갈 수 없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각성자는 선택할 수 있어요. 각성자로서의 삶과 평범한 삶. 물론 전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긴 하니까, 아닌 척하고 사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없는 건 아니랍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보통의 삶을 살아도 좋아요. 그냥 가끔 국가 소집일에 나와서 비상 대비 훈련에나 동참하고 하면 되는걸. 균열에 다시 들어간다고 생각해 봐요.”

지호는 눈만 굴렸다. 괜한 질문이다. 보현은 그의 검사 결과를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정신 방벽 내리고 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면 그때는 진짜 잘 고민해야 할 거예요. 누구도 평범한 삶을 택하는 이를 비난하지 않아요. 모두가 누구보다도 바라는 게 바로 평범한 삶이고, 우린 다 그걸 잃어 본 사람들이니까.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는 게 좋겠죠. 가족들이 살아 있고, 돌아갈 이가 있고, 뭐 그런 사람들은 특히나 더요.”

“헌터가 되지 않는 각성자들이 더 많다고 교육 영상에서 그랬어요. 전투에 적합하지 않거나 균열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그 대답을 다음 장소에서 얻을 수 있겠네요. 그리고 저는 전직 헌터지 현직 헌터는 아니에요. 보자, 예약 시간이 다 돼서……. 놀라지 마요.”

시계를 들여다보던 보현의 등 뒤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 이형 에너지의 비정상적인 파장이 지호를 기겁하게 했다. 순식간에 펄쩍 뛰어 멀찌감치 떨어진 지호를 본 보현이 크게 웃었다.

“아니 여기가 균열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질색할 필요 없어요. 이동 능력자분이세요. 인사나 해요. 얼른요.”

깜짝 등장한 새 각성자는 지호와 보현의 상당히 떨어진 거리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과 함께 보현의 손목을 쥐었다. 이윽고 또 파장이 흔들렸다. 에너지를 감지하고 있던 탓에 처음처럼 놀라진 않았으나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나는 건 막을 도리가 없었다. 보현은 배를 잡고 웃었고, 이동 능력자는 나머지 한 손을 지호에게 내밀었다.

“센터로 이동할 겁니다. 멀미가 잘 나는 체질인가요?”

지호는 고개를 떨떠름하게 저으며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을 둘러싼 파장이 이해 불가하게 흔들렸다.

이윽고는 잠시 암전.

갑자기 전깃불이 나가 주변이 예상치 못하게 어두워졌다가 돌아온 듯한 시야 교란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그보다 더 극적이다. 지호는 그가 처음 보는 곳에 와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와, 뭐예요?”

“이동 능력자들이 힘을 쓸 때면 느껴지는 파장이죠. 각성자라면 원치 않는 동행을 막을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다 나중에 배워요.”

“배울 게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남자는 빙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몸에 밴 여유로운 태도가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이지호 각성자. 본 센터는 공인 각성 지원부로, 각성자의 특수 능력을 분석하여 성격과 적성에 맞는 수학 방향을 제공합니다. 각성자에게는 늘 열려 있는 기관이며, 등록을 마친 후에 자세한 절차를 안내드리겠습니다.”

“무슨 등록 같은 걸 해야 하나요?”

“민증 만들 때랑 비슷해요. 지문 등록 같은 거. 고유 파장 등록이란 걸 해야 해서.”

보현이 옆에서 설명을 거들었다. 등록 참 좋아하네. 지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시키는 대로 서류를 작성했다. 그가 신경 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현이 병원에서 받아 온 필요 문서들을 제출했으므로, 지호는 그냥 본인 확인 절차 정도만 거치면 되는 모양이었다.

보현에게 서류를 받아 검토하던 헌터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눈웃음을 보이며 자못 다정히 말을 건넸다.

“이 단계가 제일 귀찮죠. 원래 서류 작업이란 게 다 그렇지만. 참, 저는 공인 각성 지원부 소속 박찬민 팀장입니다. 종종 뵙게 될 테니 먼저 인사드리죠.”

그의 발언에 보현이 사납게 웃었다. 지호에게 보이던 그 상냥한 미소가 아니었다.

“어린애한테 수작질하면 뒈지는 수가 있어요, 박 팀장.”

“수작이라뇨. 마땅히 해야 할 안내를 하기에 앞서 자기소개를 하는 것뿐인데요.”

둘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지호는 허겁지겁 공란을 채웠다. 얼른 마치고 여길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짐작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은 절차 내내 다투었다. 지호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다가 오늘은 이걸로 끝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얼굴을 활짝 폈다. 그 극적인 변화에 두 사람은 다툼을 잠시 멈추었다.

보현은 작성 서류를 한 번 더 검토하는 시늉을 하며 말을 돌렸다.

“좀 쓸 만한 친구다 싶으면 꼬셔 가려고 살살 밑 작업을 치는데, 상도덕이 있지. 전부 자기 부서로 데려가려고 하니까 매번 여기저기서 인원 부족으로 불만이 장난 아니거든요.”

“공인 각성 지원부가 정확히 뭐 하는 곳인데요? 그냥 등록하는 곳 아녜요?”

“등록하는 곳 맞는데, 저 사람 이중 소속이라서요. 팀장 직함도 여기가 아니라 부천 센터장 자리 때문에 가진 거예요. 여기서 어떤 각성자가 들어오는지 파악한 다음, 본래 소속지로 데려가려고 하죠. 사실 이제 막 각성한 꼬꼬마 각성자분들은 아직 아는 게 없어서, 저런 못된 사람한테 나쁜 계약 조건으로 홀랑 넘어가곤 한답니다. 다행히 제가 보호자로 왔으니…….”

“아, 임보현 씨! 제가 언제 나쁜 조건으로, 그런 적 없습니다!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지금 각성자 판 돌아가는 걸 잘 모르시니까 정보를 제공해 드리는 것뿐이죠! 그럼 그분들이 알아서 가까운 센터로 오시는 건데, 이걸 마치 제가 뭔가 속임수라도 쓴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면 제가 지호 씨한테 뭘 말하기도 전에 선입견부터 생기잖아요!”

“생겨도 돼요. 생기라고 말하는 거거든요.”

“저는 초기 각성자분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해당 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곳을 추천하는 거지, 누구를 빼 가고 하는 짓을 하는 건 아니라니까요?”

지호는 두 사람의 주변 파장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하는 걸 발견하곤 보현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보현은 찬민의 얼굴 앞에 서류를 척 내밀며 말을 끊었다.

“됐고, 균열 사태 피해자잖아요. 가족도 잃고 갈 곳도 잃고 아무것도 없어요. 뭘 할 수 있는지부터 알려 줘야지, 무슨 일을 하라고부터 권하면 안 되죠.”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생활하는 건 일상생활로의 복귀와 직결되어 있다고요.”

“그걸 택하는 건 지호 씨예요. 그렇죠?”

갑자기 둘의 얼굴이 이쪽을 향하자 지호는 저도 모르게 보현 뒤로 숨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키가 큰 편인 보현이라, 작달막한 지호를 숨기기 좋았다.

상부에서 보고받기 무섭게 눈독 들이는 인재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 줄 필요는 없다. 보현이 그의 실질적 보호자인 데다 지호가 의지하고 있는 모습까지 보이자 찬민은 일단 물러섰다.

“그럼 나머지는 임보현 헌터님께만 언질 드릴 이야기라 잠깐 시간 좀 내 주시죠.”

“지금요? 나중에 하면 안 되나?”

“급성 균열 건이라서요. 잠시만 좀 봅시다. 몇 분 걸리지도 않아요.”

보현은 투덜거리면서도 지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떠났다. 지호는 홀로 센터 초입에 앉은 채 발치만 내려다보았다. 빨리 떠날 사람처럼 박 팀장을 채근한 보현 덕에 어디 들어가지도 않고 일 처리를 하다 보니 주변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지나가던 이들의 시선에 얼굴이 점점 달아오른다. 지호는 주목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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