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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11화 (12/260)

11화

보현은 이 책자만큼은 꼭 읽어 보라며 얇은 종이를 건넸다. 각성자를 위한 안내서의 입문 안내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보현은 꺼내 놓았던 태블릿까지 함께 내밀며 조언했다.

“볼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봐야 할지 모를 거예요. 그건 진짜 필수적인 것들, 그러니까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한다는 정도의 기초 상식선의 정보를 제일 먼저 열람하도록 안내하는 책자예요. 목차라고 하긴 좀 거창하고, 이 정도 기초 지식을 쌓은 뒤에 다른 걸 보면 좀 더 수월하겠다 싶은 우선순위 정도?”

“그렇게 많아요?”

“그럼요.”

보현은 장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거 보느라 한동안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 또 올게요. 첫 페이지에 있는 것만큼은 꼭 봐야 해요. 알겠죠?”

보현의 말이 맞았다.

일반인에서 각성자가 된 뒤 지호에게 걸려 있던 정보 제한 열람이 풀렸고, 원한다면 지호는 마음껏 헌터 관련 정보를 탐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각성자가 되어 지키려고 했던 사람을 시작부터 잃고 난 다음이라 마음 붙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병실은 쓸쓸하고 외로웠다.

나중에서야 그게 각성자 보호 정책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지호에게 필요한 건 사람이었다. 나라에서 보조해 주겠다는 말뿐인 약속이 아니라.

머뭇거리던 지호는 책자를 펼쳤다. 첫 문장부터 인상 깊다. 지호는 손가락으로 안내 문구를 훑었다.

“각성자가 된 당신을 애도하고, 위로합니다.”

보현은 각성자가 되는 방법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지호는 각성자가 되는 방법이 순전히 운이라고 퍼져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부정확한 정보를 믿고 각성자가 되겠답시고 몸을 던질 사람들을 한 트럭도 더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왜 하필 죽었다 살아나야 할까? 그리고, 그 많은 죽은 사람 중에 각성자가 되어 되살아나는 사람의 특별한 점은 뭐지? 지호는 빠르게 목록을 훑었다. 보현이 말하고 간 것들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균열 내부에서 얻은 상처는 치유술이나 마석 치료기로만 나을 수 있으므로 상처를 방치하지 말고, 균열에서 나온 뒤에는 반드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 파악하지 못한 작은 상처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싶은 각성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섬뜩한 경고였다. 지호는 괜히 발목을 문지르며 다음 파일 몇 개를 확인했다. 각성자 능력에 따른 세부 분류나 에너지 조절이 미숙할 시 발생할 수 있는 위협 등. 아직은 낯선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런데도 지호는 보현이 했던 이야기를 되짚으며 몇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괴물들이 몰려들었던 순간의 끔찍함을 두 번 느끼고 싶지는 않았으니.

<이형 에너지 조절 및 사용이 미숙한 초기 각성자의 경우, 가진 에너지를 무방비하게 방출하기만 하여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미등록 각성자 중 해당 유형의 각성자 발견 시 반드시 이형 파장 차단 방벽을 설치할 것.>

아래로는 그 어려운 이름의 방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실전적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으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지호는 보현이 보여 주었던 불투명한 막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게 이거였나? 영상도 볼 수 있었고, 눌러 보니 그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보현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래서 여기 적힌 대로 괴물을 불러 모으는 힘이란 걸 마구 뿜어내기만 했다면 아마 샛별이도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 더 일찍 구조대가 도착했다면 수희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수희에게 생각이 닿자 지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씁쓸한 기분이었다. 수희는 끝까지 지호를 제대로 믿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배신하기까지 했다. 그를 용서하겠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밉지도 않았다.

힘없는 사람들이 균열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고작해야 그 정도다. 네가 사느냐, 내가 사느냐.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했기에 미움은 오래 피어나지 않았다. 지호는 자기 상황에 착착 들어맞는 안내문 읽는 것에 꽤 재미를 붙였다. 생활 체감적 지식 습득은 언제나 즐거웠다.

한참 글줄을 읽는데 어떤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각성자 중 정신적 충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 기제를 세우는 이가 있을 수 있으며, 그 경우 각성하기 이전의 자신이 할 수 없었던 행동을 이성적이고 침착하게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갈 시 피로가 누적될 수 있고, 해당 정신 방벽이 일상에 가깝도록 유지될 시 정신 병리학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지호는 본래 그렇게까지 침착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균열에서 보인 본인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 수색과 도주를 비롯해서, 시신을 수습하고 건드리기까지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모양새는 특히나 더더욱 낯설었다.

나중에 보현이나 의료진에게 상담해야 할 문제일 터. 어쩌면 이 침착함 역시 여기서 기인하는 문제일 수도 있었다.

지호는 이 각성자의 힘이라는 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지식부터 찾아 헤맸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니까.

다행히도 이제는 알 방법이 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보현이 두고 간 물건 중에는 새 핸드폰도 있었다. 예전에 쓰던 건 죽었다 살아나며 잃어버린 물건이고, 연락처를 복구할 방법도 마땅치 않아 예전 번호를 변경 번호로 인계하는 방식으로 구형 핸드폰을 연결해 놓았었다. 오는 연락이라곤 새 각성자가 된 뭣도 모르는 어린앨 등쳐 먹고 싶은 사람들뿐인 게 문제였지.

옛 핸드폰에 남아 있는 친구들의 이름으로는 다시 연락 오는 일이 없다. 그날 마트에서 그 애들을 마주쳤었다. 사망자 명단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그러니 각성하기 전의 지호를 잘 알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곤 본인만 남은 셈이다. 다른 이들은 필요치 않았다. 생각나는 사람도 따로 없어, 보현이 말한 것처럼 다른 보호자를 찾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새 보호자가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한편으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신경 써 주는 마음 씀씀이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지호의 손가락은 이내 익숙하게 새 핸드폰 화면 위를 오갔다. 누군가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감사 인사를 해야지. 지호는 그렇게 배우며 자랐다.

[이지호 : 핸드폰 감사합니다. 다른 것들도 다요.]

웃는 이모티콘 하나가 돌아왔다. 이외의 말은 없었다. 바쁜 모양이다. 뭐라고 한 마디 더 보낼까 고민하던 지호는 그냥 어플을 꺼 버렸다. 가뜩이나 귀찮게 했을 텐데,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자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완전한 고요는 아니었다. 균열에서 느꼈던 그 지독하고 끔찍한 고요는 어디에도 없다. 바깥의 소음이 조금씩 흘러 들어오고,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며,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도 느껴졌고……. 느껴져?

지호는 균열에서 그가 괴물을 느끼던 것과 비슷하게 간호사들을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사람들은 괴물이 아니고, 여긴 균열이 아니니까. 모든 사람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환자가 그렇게 많을 텐데, 이 층이나 위아래 층 정도에 있는 간호사 몇을 파악하는 게 전부였으니.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 끝날 일이 아니다. 이거 괜찮은 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너스콜과 핸드폰 사이에서 한참의 고민이 오간 끝에, 지호는 결국 용기 내어 너스콜을 눌렀다. 방금 그에게 무수한 친절을 베풀고 떠난 보현을 다시 부를 용기는 아직 없었다.

“어디 아파요? 무슨 일이에요?”

근처에 있던 간호사가 후다닥 달려왔다.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닌데, 하고 머뭇거리던 지호는 말을 더듬었다.

“저, 저기. 그게요. 제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다른 다친 데가 있었던 것 같나요? 검사 때는 뭐 못 찾았는데. 어디예요? 어디가 불편하죠?”

“아니, 아픈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제가 이상하게 간호사 선생님들을 감지하고 있거든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되게 이상한데. 균열에서도 제가……. 이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지호는 쩔쩔맸다. 각성자들의 정보가 괜히 일반인들에게 통제되고 있는 게 아닐 텐데, 간호사에게 이런 이야길 다 털어놔도 괜찮은 걸까? 그가 섣불리 입을 여는 바람에 죄 없는 간호사에게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 쓴 집단이 찾아가 번쩍! 하고 기억을 지워 버리면 어쩌지.

지호가 망설이는 걸 본 간호사는 급하게 들어오느라 닫지 않았던 문을 닫고 돌아왔다.

“자, 듣는 사람 없어요. 간호사들이 감지된다고요? 탐지형 능력이 개방되신 모양이네. 뭐 다른 거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없고요? 각성하기 전에는 없던 거면 아무거나요.”

“예?”

“여기 특별 병동이라 의료인들 다 각성자거든요. 미등록 각성자 출신들은 꽤 많이 이쪽으로 이송돼요.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지호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이 간호사가 차분히 덧붙였다. 특별 병동. 미등록 각성자 출신. 몇 가지 단어가 머리를 둥둥 떠다니다 사라졌다.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간호사분들이 감지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죠? 환자분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지금 나머지 환자들은 균열 피해를 본 일반인일 뿐이라서 그럴 거예요. 이 병원에 미등록 각성자 출신은 두 명뿐인데, 그중 하나는 검사실 들어가 있어서 이형 파장 차단 방벽 안에 있을 거거든요.”

“예…….”

“무슨 말인지 몰라도 그러려니 해요. 천천히 배우면 되니까. 능력에 관해서는 보고할게요. 그게 원칙이라서. 혹시 뭐 불편한 거 있는 건 아니지요? 감지 계열 능력자들은 처음에는 이형 에너지부터 탐지할 수 있대요. 가장 영향력이 강해서 그런가. 그러면서 차츰 세세하게 구분할 수도 있게 될 거예요. 나중에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변을 탐지할 수 있을 거고, 필요할 때는 그 능력을 거둘 줄도 알게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쉬어요.”

지호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게 지호의 침상을 확인해 준 간호사는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도 좋다며 상냥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갔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각성자가 한 건물에 다수 있는 것도 낯선 경험이었고.

어쩌면 여태 주변에 있는 각성자들을 알아볼 능력이 없었을 뿐인지도 몰랐다. 지호는 다시 태블릿을 켰다. 돌아다니는 간호사들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 덕인지 기운이 천천히 희미해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걸 인식하지 못할 때와 달리 호흡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이후가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처럼, 다른 각성자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도 꽤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니까.

지호는 다시 태블릿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데도 목이 아프지 않았다.

각성자란 본래 그런 법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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