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지호가 창밖의 생존자 표식을 가리키자 샛별이는 쪼르르 입구 옆 캐비닛을 열었다. 몇 장 남은 수건이 들어 있는 상자가 맨 아래 들어 있던 것이고, 충전기를 찾느라 훑어본 적이 있는 상자였다.
“괴물 지나가면 수건 없어져. 이제 몇 개 안 남았다.”
생존자 표식이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 괴물 때문에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건물에 다른 생존자가 있을 수 있다는 희망과 더불어 조금씩 멀어져 가는 절망 섞인 울음소리가 지호를 괴롭혔다. 괴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떨던 샛별이가 상자에서 수건을 도로 꺼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거랬어.”
사실 구조 요청은 건물 외벽 표식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샛별이 말대로, 건물 안에 걸어 두는 표시는 비슷한 처지에 있을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겠지. 지호는 아이를 꽉 끌어안은 다음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여기요! 여기예요!”
그가 소리를 오래 질러 가며 건물을 수색했는데도 아까 지나간 놈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녀석이 소리에 민감한 개체가 아니라는 뜻 아닐까?
지호는 멀어졌던 발소리가 도로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미친 듯한 뜀박질 끝에 코너를 돌아 문 열린 가게를 본 사람이 펑펑 울며 뛰어왔다. 지호는 어른이 그렇게 어린애처럼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샛별이 역시 그럴 것이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급히 문을 걸어 잠근 지호는 샛별이가 물을 한 컵 가져다주는 것을 보았다. 이 건물의 세 번째 생존자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흐느끼느라 거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어, 저기, 아저씨.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그의 울음이 잦아들 때쯤 지호가 조그맣게 질문했다. 옷깃 아래로 요란한 문신이 보였다. 혹시 무서운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면 어쩌지. 들이기 전에 해야 했을 고민을 뒤늦게 떠올린 지호는 샛별이를 슬그머니 뒤에 숨겼다. 어떻게 하지. 내보내야 하나?
“아저씨 아니다…….”
가까스로 숨을 고른 생존자가 한 첫 번째 말이었다. 허스키하고 걸걸한 목소리. 확실히 나이 든 사람 같진 않았지만……. 지호가 칭호를 고민하는 동안 샛별이가 떠다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는 남은 물을 얼굴에 확 끼얹었다.
“빌어먹을. 애들뿐이야?”
“엄마는 자요.”
샛별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들려 있던 컵을 돌려준 생존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 물 고맙다. 착한 아이구나. 엄마는 어디 계시지? 이야길 좀 해야겠는데.”
그가 일어서자 지호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물러났다. 마르고 큰 키에 옷 아래로 보이는 문신이며 사나워 보이는 인상까지. 도저히 좋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얘. 경계하려면 문 열어 주기 전에 했어야지.”
지호가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갑자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당황해 동그래진 두 아이들에게 속옷부터 보여 준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어떤 새낀지 알기까지는 열어 주면 안 돼. 안전을 확보하자마자 너희한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단 말이야. 내가 언니가 아니고 진짜 이상한 아저씨였으면 어쩔 뻔했니?”
“언니?”
확실히 안에 입고 있는 게 여자 속옷이긴 했다. 단추를 도로 채워 올린 생존자는 얼굴에 뿌린 물을 대충 문질러 닦아 대며 키득키득 웃었다. 너희만 다행이 아니고 나도 다행이다.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그렇게 위협적이게 들리진 않았다.
“언니 팔에 묻은 거 안 지워졌어요.”
“이거 지워지는 거 아니야. 안 지워지는 거로 새긴 거란다. 엄마는 어디 계셔?”
샛별이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천을 엉성하게 덮어 놓은 더미. 지호는 그 손을 잡아당겨 샛별을 제 품에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층에 정말 아무도 없어요? 다들 저렇게 되었나요?”
벌레 윙윙거리는 소리가 세 사람 사이를 채웠다. 뒤늦게 냄새를 맡은 생존자는 굳은 얼굴로 바닥만 노려보았다.
“위에서 지긋지긋하게 본 줄 알았는데. 또 있구나.”
두 사람은 어린 샛별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직접적인 단어 언급을 피했다. 지호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 거기에 맞추어 준 세 번째 생존자는 한숨과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수희라고 해. 공수희. 쉬는 날이라 늦게까지 자다가 균열 4차 경보에 맞춰서 눈을 떴지. 몇 차 경보인지를 알았어야 했는데, 원래 잠귀가 좀 어두운 편이라 상황 파악이 늦었어.”
“어떻게 된 거예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수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두 아이가 동시에 앗! 하고 소리치며 수희의 손을 가리켰다. 수희는 당황하며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 자기 주머니를 더듬거리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너네 핸드폰 없니?”
샛별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고, 지호는 작게 덧붙였다.
“꺼진 핸드폰은 있는데 충전기가 없어요.”
그마저 잠금이 걸려 있을지도 모를 남의 핸드폰이었다. 수희는 신음하다 제 머리를 팍팍 두드렸다.
“핸드폰 없는 생존자의 존재를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 건물에 진짜 나 혼자 남은 줄 알고 이대로 뒈지는구나 생각했잖아. 여차하면 2층에서 뛰어내려서 도망가든가 해야 하나 고민했다고. 입구에서 해삼 봤어?”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샛별이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수희는 우선 좀 쉬고 싶다고 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눈 좀 붙일게.”
마사지용 침대에 누운 수희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코 고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샛별이는 지호에게 속삭였다.
“저 언니 핸드폰 쓰면 안 되겠지?”
“일어나면 써도 되냐고 물어보자. 자는 사람 물건 막 뒤지고 그러면 안 되잖아.”
지호는 샛별이를 설득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도 설득했다. 수희의 배터리가 충분했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이 자는 것을 본 샛별이가 자기도 하품하며 졸리다고 칭얼거렸고, 지호 역시 잠시 정도는 쉬자는 결론을 내렸다. 수희가 잠든 동안 괴물이 한 번 더 지나갔고, 그 이상의 횟수는 모르겠다. 지호 역시 어느새 잠들어 버렸으니까.
누군가 몸을 슬쩍 두드렸다. 눈을 떴다. 고개를 이상하게 꺾은 채 잠든 모양인지 목이 아팠다. 수희가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내며 손짓했다. 옆 침대에는 샛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색색 고요를 가른다.
마사지실 문을 닫고 나온 지호는 눈곱을 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서너 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왜요?”
“사흘 동안 애기랑 이러고 있었니?”
“사흘이나 됐어요?”
수희와 지호는 서로 당황했다. 핸드폰이 없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느냐고 묻는 말에 지호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말해도 될까?
죽었다 살아났다는 말을 누가 믿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외에는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지호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흘이나 되어서 도로가 이 꼴이 되었다고 하면 그럭저럭 이해는 가는데요…….”
저는 마트에 있었어요. 경보가 울리기 시작할 때요.
지호가 두서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수희는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3차 경보 후에 뛰어나온 사람들 말을 들을 땐 욕설을 동반했다. 처음 보는 개체들이 지호를 포착했고, 거기서 엄마를 살리기 위해 다른 곳으로 뛰었다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지호는 말을 멈추었다. 수희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짧은 침묵. 지호는 대답 대신 질문을 꺼냈다.
“언니는 사흘 동안 이 건물에 계셨어요?”
“어. 나 여기 꼭대기 층 살거든. 경보 듣고 뛰어나왔다가 엘리베이터 멈춘 거 보고 욕하면서 비상구로 내려갔지.”
“왜 안 나가셨어요? 해삼 때문에요?”
“놈을 본 걸 보니 그쪽으로 들어왔구나? 하긴, 다른 쪽을 봤으면 들어올 생각을 못 했겠지.”
워낙 큰 건물이라 밖으로 나가는 입구가 여럿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호가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곤 무너져 있거나 혈흔이 가득하다는 게 수희의 설명이었다. 전혀 안전하지 않은 곳이란 의미다.
건물 전체를 살펴본 후에 생존자 표식을 발견했다면 이 건물에는 절대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의 괴물들이 아무리 위험해도 다른 표식을 찾아 떠났을 것이고, 접근조차 하지 않았겠지.
“너 정말 그거 따돌리고 들어온 거니?”
서로 질문만 던지는 대화는 피곤하다.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 살아난 부분 외에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마저 숨겨야 하는지 가물가물했으나,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
“저랑 반대 방향에서 소리가 나게 유도했어요. 생존자 표식이 있는 건 근방에서 이 건물뿐이었고요. 저는 핸드폰도 없고 그래서, 선택지가 없었어요.”
물건을 상상 이상으로 멀리 집어 던졌다고 말해도 좋을지 몰라, 지호는 대충 어물거리더니 다시금 물었다.
“왜 여기서 안 나가셨어요? 실내에 저런 괴물도 있는데. 입구가 처음부터 부서져 있던 건 아닐 거 아녜요.”
“드물게 건물 내부에서 괴물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지. 특히 이렇게 큰 건물에서는 가끔 그런 일이 있어. 누가 죽기 직전에 제보했더라. 건물 입구에 괴물 있음.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수희는 균열 어플을 켜 제보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 건물에는 총 세 개의 입구가 있어. 하나는 가운데 입구인데 괴물이 너무 몰려서 무너져 봉쇄됐고, 동쪽은 가면 안 돼. 흉악한 놈이 있어. 나도 처음 봤는데, 비상구로 내려갔던 사람들 절반 이상은 거기서 죽었을 거야. 포획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더군. 근처에 있던 놈이 비상구를 잠그지 않았으면 우리 다 죽었어.”
“비상구를 잠가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수희는 나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갈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두어 번 같은 말을 반복하며 수희는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혈흔이 낭자한 입구가 동쪽일 터. 지호는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는 수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떨쳐 내려는 듯 길게 심호흡한 수희는 멀리서 들려오는 찰박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놈이다.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는 바로 그 녀석.
“저건 소리를 못 듣나 보죠?”
“몰라. 귀가 없는 것 같긴 했어. 안 그랬으면 소리 지르는 나를 먹으러 왔을 텐데.”
“다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유도한 건 아닐까요?”
“그렇게까지 똑똑한 놈은 아니야. 접촉하는 모든 걸 잡아당기긴 하더라. 그래도 문 안에 있으면 좀 안전한데, 열린 문도 별로 없고 다른 거 하나도 같이 돌아다녀서.”
“또요?”
“그놈은 위에만 있어. 괴물들끼리 영역이 겹치지 않으니까. 여긴 차라리 괜찮지. 저게 속도가 느려서 다행이었어. 그놈한테 거의 잡힐 뻔했었거든. 안 보이는 놈을 먼저 발견하더니 슬슬 뒤로 빼더라.”
수희의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에는 총 세 놈의 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