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56화 (156/157)

00156 -CHAPTER 시드니. 숨. 유일. =========================

대신관 클레멘트는 경고했다.

*

가문에 우선할 정도로 에본느를 사랑하게 된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은애가 은애의 이유였다.

그럼에도 굳이 짚어보자면 아마도, 그녀가 쌓여왔기 때문일 것이다. 땀을 흘리며 땅을 구르는 에본느. 버티지 못하여 구토를 하면서도 다시 버티는 에본느.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동생을 토닥이는 에본느.

그에게 웃는 에본느.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그 당당한 자신감으로 빛나는 에본느.

장차 날개 아래 둘 수많은 생명들을 향한 책임을 권리로 생각하는 에본느.

두 친구를 향해 불퉁한 신뢰를 보내는 에본느.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그에게만큼은 아프다 투덜거리는 에본느.

하나하나 사랑스러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장차 포르타 백작위를 이을 사람으로서 일상 중에 받는 압박은 이제 압박도 아니었다. 피로가 일상이었다. 부친은 항시 엄격했고, 모친은 주로 영지의 본성에 머무르다 보니 점점 어색해졌다. 둘째 동생은 어릴 때부터 그를 질투했고, 막냇동생은 그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안겨 다독임을 받았다. 말했듯, 일상이었다.

그는 일상이 일상인 채로 오기에 그렇게 살아갔다.

숨 쉬는 것에 기뻐하고, 동생이 태어난 것에 기뻐하고, 친구가 생긴 것에 기뻐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인간은 숨을 쉬도록 태어났으니 그는 숨을 쉬었고, 동생은 그저 태어났고, 친구는 가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친구가 되어야 하니 친구가 되었다.

교육이 잘 못 되었을까, 아니면 천성이 그렇게 났을까.

그는 십 대에 들어서기 전부터 수많은 일에 덤덤했다. 삶에 염증을 느낀다는 둥, 살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는 둥 염세적인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냥, 세상일에 의미를 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에본느와 베르덴이 그에게 처음부터 의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를 포함하여 수많은 성인 귀족들에 비해 그는 어렸다. 신분으로는 동급일 수도 있겠으나 어느 부분에서는 동급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시드니에 비해 동생들은 어렸다.

그는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두 친구를 어느 순간 돌아보았다. 계기는, 훈련 중 복부를 얻어맞고 구토하는 에본느를 보았던 일.

그보다 세 살 어린 소녀는 물로 입을 헹구고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어린 생에서 여태 본 적 없던 치열함이었다.

그는 에본느를 돌아보았다.

돌아보고, 에본느에게 의미 있는 베르덴도 후에 느릿느릿 돌아보았다. 베르덴이 소녀에게 의미 있지 않았다면 그가 베르덴에게 의미 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에본느를 대할 때면 막냇동생을 대하며 보이는 의미 없는 다정함보다도 더 부드러운 눈이 되었다. 부드러운 표정. 풀리는 입매. 소년은 에본느가 좋았다. 숨 쉬는 것마저 기쁘고, 눈꺼풀 껌벅이는 것마저 사랑스럽고, 짓궂게 웃으며 생기를 발하는 것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살아있기에 에본느를 만날 수 있었다.

삶이 의미 있어졌다.

에본느는 그에게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년의 시야가 좁아서, 아직 어려서, 겪은 세상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러냐는 자문은 필요가 없었다. 자라가고 나이 들어가며 세상을 겪어도 에본느는 그의 마음 전부였다. 마음 온전하게 에본느다.

쥰에게 검술을 가르친 것도 쥰이 에본느에게 의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끼는 사람이기에 그는 아꼈다.

그녀가 숨쉬기에 그는 숨 쉴 수 있었다.

일상은 일상일 뿐이었는데, 그 시간을 저도 모르는 새 지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에본느가 있었던 덕분이다. 에본느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평온해졌다. 휴식. 평온함. 새로운 의미다. 하루하루 보낼수록 에본느는 그의 전부에서,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아,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

다시 한 번만 그녀에게 기회를.

에본느가 원치 않는 일은 그도 원치 않았으나,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처참하게 생을 끝내게 할 수는 없다. 그를 원망해도 좋다.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기회를.

요청하자 그녀에게 허락된 기회가 그의 손에 건네졌다.

에녹의 검을 건넨 대신관 클레멘트는 직후 경고했다.

*

눈을 뜨고 하루 뒤, 그는 어린 에본느에게 물었다.

“대신관의 이름을 아십니까?”

여섯 살 여아에게, 아홉 살의 남아가 물었다. 에본느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그가 무얼 묻는지 몰랐다. 아이답지 않은 그 에본느에게는 기억이 없었다.

시드니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죽은 그녀가 언젠가 기억을 찾으면 그를 끔찍하게 여기고 두려워할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생각한 적이 없다. 저를 원망하라는 말도 그렇기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었어도, 그도 살아있고 그녀도 살아있도록 일이 이렇게 되었어도, 그래서 그녀가 살아있는 그를 거리껴 하는 모습을 그가 직접 보게 되어도, 그래도 에본느가 그 원망의 힘으로라도 살아갈 수 있다면 좋았다.

그는 그녀에게 반드시 기억이 돌아올 것을 알았다.

그때까지 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로 하였다. 언젠가 그녀가 필요하게 될 것들. 아니, 처음부터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시드니는 알드리히와 에본느의 친밀한 관계부터를 차단하고 싶었으나, 그의 정신이 어떻건 몸은 어렸다. 어떤 조치를 할 힘을 가진 포르타의 가주는 그의 부친이었고, 에본느는 장차 라이네 공작이 될 사람이었다. 그녀는 알드리히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가까워졌다.

그 관계부터 시작하여, 기억이 있는 그로서도 손댈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희망만으로 모든 걸 성취해낼 수 있다면, 그는 애초 에본느를 죽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적인 제약 안에서 그는 미래를 준비했다.

알드리히가 방패로 삼을 사람이 필요하다면, 이번에는 그가 그 방패를 하길 원했다.

바비에르를 기어이 무너뜨려야 한다면, 이번에는 그 일을 그가 하길 원했다.

알드리히를 위해 누구를 죽여야 한다면, 이번에는 그 일을 그가 하길 원했다.

그러나 알드리히는 제 발로 엎드린 그를 이용하며, 에본느도 이용하는 길을 택했다. 항상 머리 좋고 영악한 남자였다. 바비에르는 그가 알지도 못하는 새에 알드리히와 에본느가 처리했다. 바비에르를 반드시 처리해야 했던 이유를 그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그러다 생각이 도달한 곳은, 바비에르의 땅에서 그가 수거한 적 있던 물건들이다.

들춰보지 않고 알드리히에게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 시드니는 그것들을 먼저 찾고자 하였으나, 기사단장이 멋대로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기로 했다. 당시 황제에게 먼저 요청을 올렸다. 적당히 포장한 말을 황제는 받아들였다.

기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어쩔 수 없었다. 수기는 그가 찾아냈다. 그 안의 내용이 놀라운 것들이었다. 에본느를 협박했다 하는 날의 일기가 라이네에 대해서는 마지막 일기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어째서 알드리히가 바비에르를 없애야 했는지의 단서를 알게 되었고, 그 내용이 적힌 두 장을 찢어서 품에 넣었다. 기사들의 눈이 있어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또, 어찌 이용될지 모르는 수기이기 때문에.

이대로 에본느에게 전달해줄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다른 기사가 이미 그의 손에 들린 수기를 보았다.

*

피가 검게 변할 정도로 독을 섭취했던 게 옥에서의 일이 아니라, 수십 년 꾸준히 당해왔던 일인 줄을 알았더라면 에본느의 부친에게 한 마디라도 전해주었을 것을.

자객으로만 그녀가 죽임당할 뻔했던 게 아니었다.

*

아리엘 발리앙에게 혼담을 넣은 날부터 그는 자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그랬다.

하나하나가 어떻게든 유용하게 쓰일 패였다. 그러나 포기했다. 그의 눈에는 세상에서 단 한 명, 그에게 목숨보다도 더 의미 있는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담기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도 그녀만은 선명했다.

*

-이런 역사가 없습니다. 검의 주인 아닌 사람이 있을 때 검이 나타난 적도 없고, 검의 주인 아닌 사람이 검을 쓰려고 한 역사가.

그날, 대신관 클레멘트는 경고했다.

-당신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죽을 수도 있고, 죽는 게 나을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영원, 그 무서운 영원, 끝이 없는 시간 속에 잠길 수도 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당신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든 예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독한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시드니는 손아귀에 잡힌 검을 내려다보다 뒤돌았다.

그녀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괴로움에 비할까.

-그런 고통 속에서도 라이네 공작 각하를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무얼 당하게 되어도 이 선택을, 후회치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갈 수 있다면. 그때엔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는 에녹의 검으로 에본느를 베었다.

============================ 작품 후기 ============================

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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