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4 -CHAPTER 스완.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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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런저런 일이 있어 아마도르가 스완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는 그저 단순하게 넘겨주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잊지는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마도르가 질투작전을 제안했다. 스완은 당연히 질색하며 거부할 밖에. 애초에 그에게 이 마음을 들킨 것부터가 본의가 아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열린 책 사이에 가져다 박고, 그녀는 악악 언성을 높였다.
“미쳤어? 내가 왜!”
“아, 그건 대답하기 쉽지. 네가 그를 잡지 않으면, 내가 널 잡을 테니까?”
“…….”
숨마저 우뚝 멈춰 섰다.
눈 바로 앞의 깜깜한 백지를 속눈썹 끝이 몇 번이고 쓸었다. 그녀는 천천히 책에서 고개를 들고 옆을 보았다.
그리고 책장 앞에 서서 스완과 함께 책을 찾아주고 있던 아마도르는, 그녀의 굳어버린 눈동자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너는 정말, 그 미묘한 차이를 모를 거야. 너, 에스메와 있을 때 네 표정에 생기가 얼마나 화사하게 도는지 알아? 나와 있을 땐, 글쎄,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긴 한데, 에스메와 있을 때만큼은 아니지.”
“…….”
“널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스완, 그렇기 때문에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약혼을 재촉받고 있어. 일단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면 말하라 하시는데 그랬다가는 네가 곤란해지잖아.”
“…….”
“하지만 네가 에스메와 함께 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과 덜컥 약혼할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야.”
“…….”
“나 이기적인 거 알잖아.”
남의 마음, 남의 고백을 재촉하고 종용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다. 이 멍청이가. 스완의 눈에 눈물이 돌았다. 들고 있던 책을 대충 책장에 쑤셔 넣고, 머리 위에 있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내렸다. 그리고 그 큰 손에 왼뺨을 파묻었다. 아마도르의 맨손에 작은 행복이 흘러, 고였다.
이런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다. 그녀는 정 붙이지 못한 이 세계에서 많이 행복했다.
“……고마워.”
갈라진 음성으로 인사하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에 아마도르는 작전의 개시를 선포했다. 황궁에서 열리는 황실 무도회.
‘그가 떠미니 나는 억지로 하는 것이다’고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던 마음도 잠시. 억지로 하는 것 치고 스완은 몹시도 설레하고, 고마워하고 있었다. 덜컥 드는 두려움도 실은 제가 자처한 것임을 알고 있다.
라이네 저택에 들어서서, 연무장에 있다 하는 에스메를 찾았다.
가는 길에 에스메의 동생을 만나 인사한 스완은, 그렇지 않은 척 웃고 있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했다.
아이와 잘 지내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저 아이 어릴 때부터 내심 멀리한 경향이 있었다. 아이가 자라면서는 ‘어라, 혹시 공작위를 노리는 건가?’하는 의문을 종종 가질 정도로 의아한 행보를 보이기도 하여 더 불편했다. 남의 가문 문제라 해도 어찌되었든 에스메, 그녀의 절친한 친구의 가문이다. 아직 후계자로 공표되지 않은 친구를 두고 있으니 염려가 될 수밖에.
그래도 티를 내지는 않아 왔기에 그녀와 아이는 항상 살갑고 화기애애한 관계였다. 적어도 겉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 내심을 숨기려 애쓰는 것 역시 보였다. 어린 나이치고,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이 대단했다. 그것이 잘 포장된 악의가 아니면 좋겠는데…….
역시 후계자 문제일까.
스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재 그녀 가문의 후계자인 오라비도, 다른 오라비들도 그녀를 몹시도 아껴주고 있고, 새언니도 어린 시누이를 막냇동생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오라비들에게 아직 아이가 없는 지금, 오라비들이 비극적인 사고로라도 줄줄이 사망하게 된다면 작위는 그녀에게 오겠지만, 그렇다 하여 작위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작위에 욕심이 있더라도 오라비들의 사망을 바라는 일 같은 건 하지 않.
“…….”
어라. 이런, 나 또.
스완은 의식적으로 오른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힘주어 찌푸린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지. 저 아이만 보면 에스메가 위험에 처한 것 같은 상상에 빠지고 만다.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지었다. 몸을 돌렸다.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치맛자락이 퍼졌다가 돌아왔다.
그녀는 에스메가 있을 연무장에 곧 도착했다.
그는 서서 바닥을 보고 있었다. 흐트러지긴 하였으나 심하지는 않다. 그녀는 잠시 그를 지켜보았다. 어쩐지 지쳐 보였다. 스완의 눈에 깊은 염려가 찾아와 깃들었다. 설령 깊이 생각할 게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생각하지 말기를.
스완은 침을 삼키고 배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지 않게 보이기를 바라며 걸음을 내디뎠다. 웃었다. 아핫!
에스메는 그제야 그녀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스완은 유심히 그를 살피다가 부러 히죽 웃었다. 놀리자, 그는 아주 나쁘지는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이봐요, 아가씨. 나보다는 당신 표정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일상적인 농담에도 가슴은 떨린다.
그는 스완을 제외하면 어떠한 여인에게도 이런 농 섞인 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완은 저가 무도회 이야기를 할 때 에스메의 표정을 보지 않기를 원할 만큼 내심에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또한, 긴장.
말하는 목소리가 혹시라도 떨림에 잠길까 할 만큼 온몸이 팽팽하게 당겼다.
그녀는 그래도 어떻게든 평소와 같이 태연한 척 에스메의 소매를 정리해줄 수 있었다. 아마도르와 함께 무도회에 갈 거라는 말에도 에스메는 덤덤했다.
“그래.”
동요는 없었다.
질투작전이라니. 그건 애초에 상대가 내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어야 통하는 게 아닌가. 스완은 그제야 깨달았다. 머리가 마비되어있던 게 틀림없다. 아마도르의 고백에 놀라고, 그가 제안한 작전의 대담성에 놀라고, 그 작전에 결국 참여한 자신에게 놀라서.
그러나 가서 아마도르를 탈탈 털 생각은 없었다.
기왕에 시작한 것,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나쁠 것은 없다. 실패하면 아마도르가 약혼이야기를 또 꺼낼지도 모르며, 그러면 그때는 그를 존중하여 독신선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상상이 어쩐지 하나같이 슬프다.
직접 고백할 용기도, 고백할 생각도 없어서 이렇다.
결혼은 아직도 겁이 나는데 이 세계에서 이 나이, 이 신분에 하는 연애는 보통 결혼을 전제로 시작하는 관계다. 도중에 헤어질 수도 있기야 하지만 그녀와 그의 가문, 체면이 있고 무게가 있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스완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슬픔을 삼켰다. 생글거리는 웃음에 마음을 담았다. 겁쟁이가 떨며 외친다.
에스메, 나를 좀 봐줘.
*
“잘, 될 거야, 스완.”
아마도르는 입장할 때부터 내내 스완을 다독여주었다.
그러나 실패할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회의적인 내심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미 아마도르에게 받은 게 많다. 위로도 흘러넘칠 만큼 듬뿍 받았다. 실패할 것이라며 슬퍼해 봤자 아마도르는 반드시 잘 될 거라고 다정한 위로를 반복하고 반복하리라.
소중한 친구인 그의 이 시간을 더 망치고 싶지 않았다.
스완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포기했다. 에스메의 질시를 받기를 기다리며 그를 외롭게 두느니, 차라리 친구로서 즐거운 이야기라도 나누자. 아마도르의 팔을 톡톡 두드리듯 쓰다듬고, 에스메가 있는 발코니 쪽을 가리켰다. 아마도르는 빙그레 미소했다.
그의 고개가 내려왔다. 귓속말? 스완은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있었다. 귓바퀴에 아마도르의 숨결이 닿아왔다.
“오래 간직하는 마음은 농 익고 깊어져서 좋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강한 독이 될지도 몰라. 속이 썩어들어간다는 말이야.”
“…….”
“겁내지 않아도 돼. 잘 될 거야. 힘내.”
아마도르가 세웠던 것은 처음부터 질투작전이 아니었다.
마음 더 깊어 더 절실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나쁘지 않다. 상대에게 은연중에 마음이 보이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작전을 실행할 만큼 한 번 대담해져본 경험, 분위기, 자포자기. 상황과 조건이 겹치고 겹치면 겁쟁이라도 불쑥 담대해질 수 있다.
같은 마음으로 스완을 보는 게 때때로 느껴짐에도 물러서 있는 에스메를 아마도르는 마지막으로 저주하고, 에스메에게 걸어가는 스완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를 마지막으로 축복했다.
그 밤, 스완은 자포자기의 후유증과도 같은 용기를 내었고, 에스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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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도 같았다.
에스메를 향한 마음은 지지 않았고, 나중에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마저 완전히 떨쳐낼 정도가 되었다.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수년 후 아이가 태어났다. 예쁜 딸아이.
그녀의 손가락 두 마디 길이도 되지 않는 짧은 손가락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그녀의 손바닥 크기도 되지 않는 발이 움직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눈을 굴리고, 침을 흘리며 울고 보채도, 이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딸의 유모로 들인 여인도 이렇게 귀엽고 순한 아기씨는 처음 본다며 감탄했다. 말뿐인 감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스완은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했다. 그렇지? 그렇지요? 우리 아기, 예쁘지요?
마냥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사랑에 불순물이 섞인 건, 아이가 태어나고 반년 후.
신전에서 스완은 기억을 되찾았다.
머릿속에 댕댕 울리는 예언서의 노래가락과 노랫말이 그녀를 휘어잡았다. 아, 애가. 애가는 그 자체로 에녹의 검이 나타나는 조건 중 하나였다. 뒤늦은 사랑의 깨달음. 혹은 어떤 깊은 후회. 기회를 바라는 이의 후회. 어느 쪽이라도 스완에게는 그 애가가 그녀의 죄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후회 자체이기도 하였다.
오래전, 에스메의 백조는 에스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그를 떠나보냈었다. 이번에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스완은 에스메를 먼저 사랑하고 먼저 다가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지를 않은가.
스완은 신께 기도했다. 감사하며 죄송하다.
후회와 슬픔의 노래를 그녀는 바꾸었다. 사랑의 노래다. 먼저 깨닫고 먼저 사랑한 자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다.
아이야. 내 딸. 사랑한다.
에스메. 당신. 사랑해.
돌아오기 전의 시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다는 걸 말해줄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새삼스러운 사랑 고백을 했다. 항상 사랑한다. 잊지 마. 진심으로 사랑해.
그리고 스완은 간절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다.
에스메의 동생이 에스메와 에본느를 어떤 경로로 중독시켰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살려야 하는데. 이번에는 살려야 하는데.
남편 모르게 사람을 고용하여 그녀의 도련님과 도련님의 애인을 살피고, 집안의 용인들도 잘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를 못하겠더라. 집사부터, 시녀, 시종, 하인, 하녀까지. 전부.
초조해져 갔다.
에스메에게 차라리 털어놓을까 고민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 누가 믿으랴. 시간을 되돌렸다는 것은 또 누가 믿고.
남편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티파티에 갔다가 먼 곳에 기사가 따라오게 두고 걸어 돌아왔던 날.
길에서 한 청년을 발견했다.
스완은 그를 알아보았다. 부집사의 아들이 아닌가. 돌아가신 시모를 대신하여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그녀는 오늘 부집사의 아들이 길에 나올 수 있는 자유 시간을 받는 날이 아닌 것을 기억해냈다. 업무상 나왔다기에는, 저 청년은 집사 수업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 직접 길에 나와야 할 일이 없었다.
하면 어째서 이곳에.
그녀는 유심히 그 청년을 살피며 따라다녔다.
청년은 어느 길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처음에 스완은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저런, 아프겠다. 안타깝게 눈살을 찌푸리는데, 뒤돈 청년이 품에 어떤 반짝이는 유리병을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청년도, 청년과 부딪힌 사람도 그녀가 서 있는 쪽으로 온다. 사람들 사이에 급히 섞였다.
저런 걸 저리 은밀하게 공급받아야 할 이유가 있나?
의아하게 그들을 보고 있던 스완은 청년과 부딪힌 사람이 낯익어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어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숨이 멈추었다.
도련님의 애인이었다.
에스메를 마음에 담았던 수많은 여인들 중 한 명이기도 하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