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CHAPTER 스완. 사랑해 =========================
처음에는 에본느가 죽었고, 일 년 후 에스메가 죽었다.
남편 시신의 소산식에 참석한 스완은 멍했다. 멍하기만 하였다. 상황은 이해가 가면서도 또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그녀의 망연하게 풀린 머릿속을 꺼멓게 도말한 것은, 평생을 함께할 친구로서 몹시도 좋아했던 에스메를 실은 진정 사랑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이제야.
이제야.
“에스메…….”
울며 중얼거려도 그에게서는 답이 없다. 늦었다.
이후 스완은 후계자를 기어이 차지한 에스메의 동생이 시부의 사망 후 공작위를 승계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도련님에 대하여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당연한 수순으로 그녀는 라이네 저택에서 나가야 했다.
그녀는 대귀족의 적녀로 태어나 귀족으로 잘 교육받으며 자라온 사람이다.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은 차라리 견디기가 쉬웠다. 스완은 덤덤하게 오드리나의 저택을 나와 오드리나의 사교계도 버리고, 다시 돌아오라 하는 친정도 물리치고, 그리고 라이네령으로 내려갔다. 무엇을 하여도 마음부터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그 마음, 접어내기 참 어렵더라.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 분명 존재했다.
에브, 예쁜, 예뻤던 우리 딸.
에스메. 아, 당신.
그리움이 사무쳤다. 날로 수척해져 가는 와중 유일하게 위안받는 시간은 중앙령 레룩스의 신전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스완은 온갖 것을 후회했다. 사랑을 일찍 깨닫지 못한 것. 사랑이 아니라며 스스로 눈을 가려온 것. 그리하여 사랑할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에스메의 마음을 받지 않은 것. 에스메는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아마 불행했을 것이다. 받을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사랑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이만큼 괴로운데, 에스메라고 견디기 쉬웠을까.
정말이지 전부 후회스러웠다.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수년을 부부로 살아왔으나, 에스메를 한 남자로 사모하여 그랬던 것이 아니었던 바.
애초에 그와 놀이친구가 되었던 것도 가문간의 관계를 위해서였다. 후에는 정말 깊이 신뢰하는 벗이 되었으나 적어도 처음 의도는 그랬다.
어차피 결혼은 그녀의 가문과 급이 맞는 가문의 영식과 하게 될 터. 아마도 에스메나 아마도르와 하게 되지 않을까 하였다. 그녀와 그들에게 따로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지 않는 한, 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러나 스완은 어느 쪽에도 회의적이었더랬다.
-너나 아마도르와 결혼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데. 그럼 과연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고. 그건 무슨 느낌일지 궁금하긴 해.
스완은 언젠가 에스메와 대화를 나누다 그런 속내를 말한 적이 있었다. 손에 턱을 괴고 느른하게 늘어져서.
서늘함을 느낄 정도로 어두운색의 눈동자는 잠시 그녀에게 닿았고, 그는 이내 짧게 피식 웃었다. 기억난다. 어이없는 것을 들었다는 반응이 그야말로 제대로였다. 빈정이 상해서 그에게 물덩어리를 던져버렸던 게 기억나.
그날로부터 오래 지난 어느 황실 무도회의 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아마도르와 무도회에 참석했고, 회장의 어느 발코니에서 에스메에게서 고백을 받았다.
지독히 당황하여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에는 미안하다며 거절했으나, 에스메는 오히려 그 자리에서 약혼을 제안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왜?
왜. 가문 때문에 이리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설핏 웃음을 비추더니 그녀의 귀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종종 있었던 일. 스완은 동요치 않고 에스메를 똑바로 보았다.
차가운 무표정을 주로 담던 날카로운 입매를 누그러뜨린 에스메는 대답했다.
-널 놓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너는 대답했었다.
“…….”
스완은 기도를 위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에스메. 우리가 차라리 그렇게 속내 다 꺼내서 보인 친구가 아니었으면 나았을까.
그래서 처음 만나기를 차라리 성인이 되어 만나고 장차 사랑할 사람으로 만났으면, 내가 이 마음 깨닫기가 쉬웠을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에스메가 죽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나,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 더는 걸음걸음마다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멍하게 넋이 나가 있다가 울음을 터트리는 일도 없다. 신전 안에 있을 때만 울고 절망하며, 신전을 나서서는 현 공작의 형수, 혹은 의연한 미망인 정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받아주지 못한, 보듬지 못한, 주고받지 못한 사랑과 에스메를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에 뒤이어 잃어버린 딸을 생각하면, 미치지 않는 게 기적일 정도.
“…….”
스완은 잇새로 젖은 절망을 흘렸다.
기적은. 그것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 이 정신을 유지하는 것 따위는 필요 없는데.
신이시여. 제게 기회를, 한 번만, 다시 주신다면.
검이 생성되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함께 나타난 대신관이 그것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지만, 설명이 없어도 그 검이 무엇인지는 깨닫고 있었다. 망설임일랑 쓸모없다.
스완은 제 시간을 되돌렸다.
*
지구, 더 정확하게는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신분제 확실한 세계는 위화감이 지독했다.
스완은 지구에서 저를 몹시도 미워했던 큰 오라비를 떠올리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얼굴은 기억나지도 않고, 그런 형제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지구에서 산 기억들의 무게를 달아보자면 행복과 기쁨보다야 가식과 위선과 불행 쪽에 무게를 둘 밖에.
그럼에도 지구의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것 보라. 앉아있다가도 갑자기 불쑥 불쑥 찾아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지구를.
이 세계는 어떻게 된 게 십팔 년을 살아도 완전한 적응이 안 되나. 심지어 이 세계에서는 참 넘칠 만큼 사랑받고 있음에도 그랬다. 결국에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지구에서 제대로 죽었다는 것을 알면, 지구로 돌아갈 일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면, 이 세계에 정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행했던 지구에서의 시간을 떠올릴수록 이 세계에는 정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데 혹 지구로 돌아가 버리면.
그때 느낄 박탈감은 이루 말할 것도 없으리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떠한 모양의 불행이든, 불행에서 굴렀던 사람은 최악의 상황을 항상 가정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그녀는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에스메를 힐끔 보고 다시금 작은 한숨을 쉬었다. 답답해. 저 턱을 괴고 있는 오른손은 그대로 두고, 왼손을 올려 눈앞 허공에 작은 진을 그려보았다. 검지로 그린 손바닥 크기의 진은 반-짝, 보라색 빛을 발하고 사라졌다.
직후 쏴아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서.
“……스완.”
잘 읽고 있던 책이 봉변을 맞은 에스메가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그는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있는 책을 무릎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칫, 재미없게. 순발력 좀 봐. 바지는 젖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대체로 너그러운 에스메는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얼핏 웃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지만, 눈을 깜박이는 새 그런 어렴풋한 표정마저도 사라졌다. 무표정하게 한숨 쉰 그는 물벼락을 맞은 책을 무릎을 조금 넘는 높이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또 어디 외출이라도 다녀오고 싶어?”
“또, 같은 말은 하지 말아 줄래? 내가 무슨 바깥으로만 나도는 망아, 마, 마, 말괄, 마, ……아, 짜증나…….”
“망아지 같은 말괄량이라고 폐하께서 널 부르시는 걸 들었는데.”
“너, 내가 피하려고 했던 단어들을 다 넣었어.”
살짝 노려보는 시늉을 하자, 그는 고개를 한 차례 까닥했다.
“미안. 그래서, 왜 그러는 건데.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더니.”
“…….”
그러나 스완은 고개를 젓고 다시 턱을 괴었다.
짝사랑은 이래서 힘들다. 널 좋아한다는 티를 낼 수도 없고, 관련된 일로는 괜스레 착잡해지거나 우울해지기도 하고, 생각이 어지러워지고.
이 세계에 와서 다시 갓난아기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자라 와서 그럴까, 전에 이십 대 후반이었던 그녀가 이 세계에서 어린 나이부터 함께 자라오다시피 한 에스메를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엔 부끄러웠고 착잡했지만 지금은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몸이 어려지니 정신도 확실히 어려진 감이 있었고, 딱히 에스메와 약 삼십 살의 나이차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열여덟이니, 최대 삼십을 더해도 마흔여덟. 그렇다고 그녀가 마흔여덟의 여인이 겪을 만한 것들을 겪으며 정신이 성숙해졌느냐? 그것도 아니라서. 받는 애정표현에 적응하지 못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것, 지구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기품을 잃은 언행을 하는 것. 이 얼마나 천방지축으로 다니는지. 생각해보면 정신이 외려 훨씬 어려졌다.
스완은 에스메에게서 시선을 비껴 멍하게 허공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스완.”
“폐하와. 내 나이차가. 얼마지?”
잠시의 정적 후 에스메가 저를 부르자마자 입을 열어 물었다.
턱을 괸 손에 입술 반절이 막혀 있었기에 발음이 온전치 않았다. 호흡하느라 뚝뚝 끊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아들은 에스메는 대답했다.
“열.”
알면서도 물었다. 답을 들은 스완은 얼굴을 좀 더 미끄러트려 입을 해방했다.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시야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는 정말 간만에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었으나, 꾹 참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황후께서는 계시지 않고.”
“…….”
“그래서 요즘 최대치로 들들 볶이고 계시고.”
“…….”
“나한테, 국혼은 어떻겠느냐고 하시더라.”
에스메의 표정은 꼼짝도 않았다. 아, 진짜 얘는 나한테 마음이 없다니까. 울 것 같은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완은 크게 웃음기 어린 한숨을 쉬고 의식적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나만한 사람이 없대. 나 이외에는 생각도 못하겠다고도 하시고. 그렇겠지, 어디 국혼이 폐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아 정치라니까.”
“그래서.”
“더 생각해볼 것도 없었어. 폐하의 진정한 사랑을 응원한다고 말씀드리고 홀랑 도망쳤지.”
“…….”
에스메는 그제야 눈을 묘하게 찌푸렸다. 웃는 것도 같았고 기가 막혀 하는 것도 같았다. 스완은 그런 그를 보고 몸을 바로 하며 씩 웃었다.
“뭐, 내가 보기로 스물여덟이면 오래 버티신 것 같아. 몇 달 내로, 알아서 국혼을 올리시겠지.”
“진심이셨으면, 어쩌려고.”
“퍽이나. 진심으로 느껴졌으면 너한테 이렇게 이야기도 않지. 폐하, 그, 이이렇게 짓는 웃음 있잖아. 그걸 짓고 말씀하셨단 말이야. 나 놀릴 때처럼.”
양 입꼬리를 손으로 삐죽 들어 올리며 흉내 냈다. 그러나 그녀 자신부터 그다지 진심으로 장난을 칠 기분은 아니었다. 우스꽝스러운 시늉은 금세 끝나고 손이 내려왔다.
스완은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끌고 들어와, 입술의 가장자리를 물었다. 더 깊은 곳으로 잠기려 하는 침묵을 끝내기까지는 그로부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잖아.”
기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지구에서, 다른 귀족 가문의 ‘훌륭한’ 청년과 결혼을 앞두게 되기까지, 그 결혼을 피하기 위하여 그녀가 했던 우아한 발악은 끝끝내 들어 먹히지 않았었다. 그것이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혼 자체에 대하여 이토록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 버렸고.
에스메를 좋아하는 지금도 아직은…….
“마음에 담은 사람이 있는 건가?”
“글쎄.”
에스메의 나지막한 질문에 그녀는 피식 웃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에스메, 우리는 애초에 훗날 혼인도 가능할 만한 가문의 자제들이기에 놀이 친구가 되었잖아.”
“…….”
“그리고 지금 우리는 많이 친하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
그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동의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스완은 한 번 옅은 웃음을 보이고, 다시 턱을 괴었다.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았다.
“그런 너나 아마도르와 결혼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데. 하물며 폐하라고.”
“……폐하와 많이 친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너희를 아는 만큼은 아니니까.”
황제를 좋아하고 있지만, 권력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 수많은 것들을 견딜 정도는 아니다. 우정과 의리로 견뎌줄 수 있는 것에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말했듯,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뚱하게 대답한 그녀는 한숨을 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메도 그녀를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가려고?”
“응. 내 기분이 좋지 않다고 너한테 투정부려 버렸어. 이게 웬 민폐야. 완전히 꽃처럼 화악 피어나서 나중에 다시 올게. 책도, 미안해.”
“그런 건 됐어. 내게 화를 내도 상관없으니, 기분을 푼다고 마법에 손대지는 말고. 또 다쳤다는 소식 들려오면 그때야말로 화낼 거다.”
……저렇게 다정한 말을, 저렇게 차분하고 차가운 목소리로도 할 수 있다는 걸 에스메를 만날 때마다 깨닫는다.
스완은 유심히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붉어지지 않았겠지. 그녀의 단단한 적갈색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황제는 반년 후 한 영애와 성대한 국혼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