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50화 (150/157)

00150 CHAPTER 11. 애가哀歌 =========================

황제는 웃는 얼굴로 멈추었다. 나를 샅샅이 훑는 시선이다. 나는 잠잠히 인내했다.

그는 곧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눈웃음치듯 가늘어지고 휜 눈이 명철하게 빛났다.

“그걸 저택으로 안 보내고 직접 줬다고?”

“예.”

“왜?”

“…….”

“왜? 도대체 어떤 가주가 그걸 직접 행차하여 직접 건네줘?”

“…….”

내 혀는 묶여 제압당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진심이 황제의 말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수치스러웠으나, 한 번은 마주해야 했을 진심이다. 나는 침을 삼키고 턱을 들었다. 눈길을 황제의 귀 옆, 두세 뼘 떨어진 왼편 허공으로 던졌다.

황제는 이제 낮게 키득거렸다.

“와. 진짜 공작, 이런 데서 짐이랑 닮았다고 광고합니까?”

“…….”

“짐은 그래도 누이에게 제대로 말이라도 했네. 버리고 내 옆으로 오라고.”

말이 섞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테지.

“이래도 포르타경이랑 결합할 마음이 없다고 할 겁니까?”

“…….”

“이래도 포르타 영식이랑 결혼한다고?”

“…….”

“이래도, 누이, 포르타경을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라이네 공작 자리를 더 사랑한다는 거지. 그렇지? 내가 이 자리를 누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듯이 말입니다.”

“…….”

“그래서 청혼서로 포르타경을 떠보았습니까?”

진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열로 데워진 것 같은 숨을 흘렸다. 내가 상상했던 것은 수치였는데, 이 감정은 수치스러움이 아니었다. 아팠다. 진심이 아팠다. 내 진심이기에 이것은 자해였다. 무언가가 심장에 와서 박히는 기분이었다. 일순. 떨어진 심장이 허망한 공간을 간직한 채로 명치에서 뛴다. 아팠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찌 견뎌. 이걸.

이런 식으로 아플 때마다 한 번씩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의문이 혀에 고였다. 얼굴을 찡그리는 나를 직시하던 황제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누이.”

내 눈이 말없이 굴러갔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를 은애합니까?”

“…….”

“그러나 그 자리를 포기하지는 못하겠고요.”

“…….”

“난 내 자존심이 있고, 자존감이 있고, 내 백성들이 있고, 나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이를 방패와 창 삼아 많은 일을 함께 해 온 거고. 그래서 누이에게 거절당했고, 나도 누이를 거절했습니다.”

“…….”

“그래서. 난 당신이 싫습니다.”

이 황제의 자존심과 자존감은 드높다.

겪어 온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내게 몇 번 말했던 ‘당신을 싫어한다’는 말은 방금 그가 말한 뜻 그대로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추가하자면, 내가 그에게 맞섰기에 더욱 날 싫어하리라고 생각한다.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가 이은 말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더 싫어. 말해볼까? 그는 발리앙보다 더 미친 자입니다.”

“폐하.”

“모욕하고자 작정하고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말한 적 있지 않나? 위험해서 잘라낼 거라고.”

“…….”

“그런데 누이를 위해서 발리앙으로 대신했습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는 반박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억합니다. 그런데 정말, 당신을 위해서인 마음도 있긴 있었으니까. 나름대로 정을 생각해 애써준 건데 완전히 부정당하는 건 나도 싫습니다.”

황제는 유들유들하게 웃음을 보였다.

일부만을 인정해달라 하는 거라면 나도 무어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 반응이 오히려 불만족스럽다는 것처럼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가, 묘하게 웃었다.

“어쨌든,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이 결합하면 내가 곤란합니다. 그가 가진 것은 버려지는 게 아니거든. 그게 누이에게 들어가면 내가 많이 곤란합니다. 나는 그를 멀쩡하게 살려주고 있는 것으로 누이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해요.”

“대귀족 가문의 가주의 생명입니다. 그 일신이 안전하고 멀쩡하게 있는 것은 폐하께서 도리 운운하실 게 아닙니다.”

“응. 그것도 그래. 그런데 누이. 나도 누이도 알고 있잖아요. 죽일 상황은 시간이 있고 여차할 시 대신 뒤집어쓸 사람이 있고 인내가 있고, 선을 기꺼이 넘을 계획자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나와 누이 같은 계획자 말입니다.”

“…….”

“션경이 내 옆에서 열심히 일해주고 있고, 그 사람도 여러 해 정예 기사단의 단장으로 일해주고 있어서 포르타가 살아남은 것도 있습니다. 그리도 충성을 보인 자들을 쳐내자니 명분도 만들어야 했고 그럴 상황도 만들어야 했고, 일이 복잡해지거든요. 그런데 눈앞에 발리앙이 있네. 자기 발로 죽을 길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발리앙이.”

“그럼에도 저를 위했다 말씀하십니까.”

“방금 말했지요. 누이를 위해서인 마음도 있긴 있었으니까.”

“…….”

전보다야 훨씬 솔직해진 속살거림이었다.

그때는 온 마음을 나를 위해 퍼부은 것처럼 말하니 몹시 기가 막혔었다. 나는 슬슬 시린 눈물이 날 정도로 따끔거리기 시작한 두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내 온순한 반응에 이번에야말로 헛웃음을 웃었다.

“피곤해진 겁니까, 유해진 겁니까.”

“예?”

“사랑해보니 세상 대하는 게 너그러워집니까?”

“폐하. 말씀, 과하십니다.”

“내가 누이에게 어떻게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었는지는 이해가 됩니까?”

“…….”

“참 밉네요, 그 사람.”

“폐하.”

“두 가지 묻겠습니다.”

그 순간 황제는 나만큼이나 웃음이 어색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 경고하려던 것을 일단 멈추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내게 충성할 겁니까?”

“……예.”

전과 상황은 많은 부분 달라져 이제 충성은 조금 미묘한 단어가 되었지만, 섬기지 않을 것은 아니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한숨 쉬듯 웃고 말을 이었다.

“적당히 세력 있으나 오드리나의 이렇다 할 살롱에 출입하는 귀족과는 비할 수 없이 한미한 가문 하나에서 황후를 고를 겁니다.”

……션 포르타를 유력한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고 들은 지 삼 주도 되지 않았다.

“션경은 그럼.”

“션경이라는 사람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선택지지. 포르타경을 견제할 수 있는 인질로도 좋고요. 포르타는 정치적으로 날 지원해줄 힘도 있는 가문이고. 다 좋은데…….”

“…….”

“일단 누이의 다음 순서로 놓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내게 청혼하겠다는 말은 아니리. 그 문제는 삼 주 전에 완전히 끝냈음을 서로 인정하고 인지했다. 국혼을 올릴 후보에 그는 조금도 나를 생각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옷깃 바로 아래, 채우지 않은 단추 한 개를 말없이 매만졌다. 맨손의 엄지가 단추를 쓸다가 꾹 눌렀다. 왼 가슴께에 놓인 나머지 손가락과 손바닥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피곤한지라 그 움직임에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그가 낮은 음성으로 나를 일깨웠을 때였다.

“내가 쥐고 있는 누이의 약점만큼, 누이가 가지고 있는 내 약점도 많습니다.”

나는 눈을 들었다. 나를 보며 황제는 미소했다.

짓궂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가볍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우리는 비밀을 공유했습니다. 여태 동행해왔던 이에게 보이는 신의의 표시입니다. 호의의 표시이기도 하고 단 한 번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축복의 표시입니다.”

“…….”

“자의로 진창에 떨어진 두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그 숨이 나를 재차 깨웠다.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푸른 어둠에 우리 몸이 잠기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리고 시각을 대략 예상해보려 하는데, 황제는 남아있던 말을 내게 전했다.

“누이가 선택한 후에 나도 선택하겠습니다.”

이 말은 아마도 나를 격려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눈꺼풀을 내리며 시선을 미끄러트렸다가 회복했다. 황제는 내 인사를 받지 않고 먼저 떠나갔다.

나는 조금 더 후원을 거닐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기사들은 수일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윌리엄이 이끄는 용병단이 제 동료의 원수를 죽이며 미로골목의 죄인 몇을 죽일 때, 내 기사들은 그들을 지원하여 나머지 죄인들을 몰살할 것이다. 이 밤에 살아남는 죄인들은 내일 아침부터 쫓기 시작할 것이며.

종국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작전 실행 명령을 받고 떠나는 기사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 늦은 시각에 손님 한 명을 맞이해야 했다. 황제께 사정을 듣고 달려왔다 하는 션이었다.

*

나는 그 늠름한 기사에게 많은 것을 들었다.

내 손에는 나도 기억나지 않는 인형이 있었다. 지금과 아주 다르지 않은 필체로 적힌 서신 수십 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누렇게 색 바랜 종이들은 전혀 뻣뻣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난 탓도 있을 테고, 자주 읽은 탓도 있을 것이다.

폐하께 듣고 왔다는 션은 이렇게 찾아온 것을 용서해달라고 먼저 말했다.

내가 차갑게 내치긴 했었나 보다. 내친 게 내가 그녀를 싫어해서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간 것 같았던 기사가 그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사과를 하는 걸 보면.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를 용납했다.

우리의 대화는 거의 션이 일방적으로 이끌고 갔다. 내가 말을 잃었고, 생각에 잠겼고, 감정에 붙들렸던 탓이다. 션이 조곤조곤 말해주고 간 긴 이야기를 전부 기억한다.

오른손 하나에 꼭 쥐이는 작은 인형은 옛날에 내가 션에게 선물했던 인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서신들은 내가 션에게 보내준 다정한 편지들이라고.

첫째 오라버니보다 먼저 퇴근해서 저택 집무실에 잠입해 훔쳐왔다고 한다.

인형은 션의 방에 남아있었지만 서신만큼은 시드니가 보관해왔다고 한다. 션이 소중히 여기다가 버리게 된 서신도, 시드니는 찾아내서 보관했다고, 했다. 그 인형조차도 너무 낡아 버리려고 할 때, 션은 첫째 오라비를 위하여 끝까지 품고 있었다고. 했다.

이후로 션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첫째 오라버니가 혹시 미소라도 짓는다면, 그건 오라버니가 볼 수 있는 곳에 각하가 계신다는 뜻입니다.

-…….

-그 표정 없는 오라버니가 각하의 서신이 와서 읽어달라 하면 얼마나 다정하게 웃으며 읽어주었는지 기억합니다.

-…….

-저는 오라버니와 각하, 제가 사랑하는 두 분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

-제가 막내라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두 분이 가주 자리든, 가문이든, 다 잠깐 놓아두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각하께서 헤르조 오라버니를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신다는 걸 폐하께 들었지만, 그건, 각하를 위한 일은 아니니까.

충동적으로 왔다는 것은 대충 느꼈다.

션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내게 인사하고 떠나갔다.

그녀가 무얼 알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와 이 간단한 물건들이 내게 많은 것을 일러주었다. 무거웠다. 많다. 나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첫째 오라버니는 언니를 보러 안 왔지?

-네.

-그럼 오라버니가 오라버니 대신 나를 보냈다고 생각해 줘. 오라버니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냥, 응. 나도 언니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첫째 오라버니도 언니를 만난 거야. 알았지?

그렇지…….

션은 나와 시드니의 관계가 도무지 어떤 건지를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내 앞에서 시드니의 소식을 전해주거나 그를 챙긴 적이 많았다. 나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손안의 인형이 흔들렸다.

죽은 기억이 없던 어린 시절의 유산이다.

기억이 없어도 시드니를 친근하게 여겼던 시절. 그는 묵묵히 준비하며 나를 보고 있던 시절.

“…….”

문득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실을 허락했다. 할리와 가엘이었다. 지금은 새벽 네 시. 피로 젖은 기사들이 내게 경례했다. 나는 인형을 책상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두 사람의 복면을 쥔 손을 힐끔 보고 그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가엘이 보고했다.

“시신 백여든아홉 구. 현장에서 확인했습니다.”

나는 평온하게 그들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몰살했다고?”

“예.”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의뢰에 나가거나 여행을 간 자들은?”

“그게…….”

할리가 애매한 얼굴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각하. 죄송합니다. 현장에 포르타 백작과 포르타의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날을 대비해 죄인들은 전부 확보해두었던 모양입니다. 저희 측이 골목 입구를 포위하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베르덴까지 죽으면 더는 필요 없는 자들. 여태껏 살려두었으니 오늘이라고 예상했나.

난, 정말. 시드니. 당신이…….

나는 입을 다물고 심호흡했다. 입가와 턱, 콧방울 옆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그럼, 이제 끝났군.”

“…….”

“용병단은? 그 남자를 죽였나?”

“예. 그리고 사망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 기사들의 손에 사망했다.

그들을 좋아했고, 그들이 라이네 공작과 관련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왔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내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미로골목을 누가 그 지옥으로 만들었느냐 한다면 그 용병단이 했고, 그러다 죄인들과 함께 죽은 것 같다는 상황으로 보일 필요도 있었고.

나는 손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쓴웃음을 웃었다.

“그동안 수고했네. 가서 쉬게.”

두 기사는 덤덤하게 예를 갖추었다.

다음날 오전, 베르덴은 참수되었다.

나는 검은 피 일색인 그 마지막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진정 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