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49화 (149/157)

00149 CHAPTER 11. 애가哀歌 =========================

나는 입을 열었다.

“……우스운 말을 하는군.”

눈을 파낼 것처럼 그를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내 답을 들은 시드니의 눈이 조금 접혔다. 시선에 금이 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무언가가 심장에 와서 박히는 기분이었다. 일순. 떨어진 심장이 허망한 공간을 간직한 채로 명치에서 뛴다. 말 자체로 자해였다. 나는 욕지기 어린 웃음을 벙긋 웃었다.

“나를 왜 기다리지?”

“…….”

“우리 사이, 많은 게 끝장나지 않았나. 서로를 믿기에는 경도 나도 겪은 게 처참하잖아. 수십 년 간극에도 잊히지 않아, 나는. 그때 그 시간이. 내 지친 목이.”

꿈꾸는 듯이 나긋하게 말했다.

내 손이 부드럽게 바닥을 가리켰다.

“누구 손에 떨어졌지?”

시드니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아, 저것은 동요다. 나는 턱에 힘을 주었다.

당신을 사랑한다.

“경이 오래전에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진정, 사랑합니다.

“원망하라고 했네.”

미안합니다.

“경은 죽고자 하였던 나를 멋대로 살리고 경을 원망하라고 했어. 그런데 나를 기다리면 아니 되지.”

오랜 기억을 짚었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엮인 시선이 넝쿨처럼 휘감겨 서로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어두운색의 눈동자에는 마치 검을 들고 마주 섰을 때처럼 섬뜩한 단단함이 있었다.

그의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손등을 내게 향하고 잔잔하게 올라갔다. 셔츠 바깥에 묶인 타이를 살짝 건드린 그 손이 접혔다. 고쳐 매려는 것처럼 움직이던 손은 매듭 위에서 우뚝 멈추었고, 고요한 들숨과 함께 머물렀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겠으나, 일순이나마 흐트러졌던 숨이 이미 내게 들렸다. 숨이 막혀 답답한 것처럼 타이를 고쳐 매려 했을까. 곧 그의 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떨어졌다.

내 눈이 반사적으로 살짝 가늘어지는 찰나, 시드니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절 원망하심으로 각하께서 그나마 마음 편하게 이 시간을 살아가실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습니다.”

“…….”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애써 욱여넣은 마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숨이 막혔다. 모든 사랑에 숨이 막힌다.

쥰이 내게 보내는 마음에도. 시드니가 내게 보내는 마음에도.

내가 시드니에게 보내는 마음에도.

나는 사랑을 하고 받는 것이 숨 막혔다. 숨 막히도록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지키는 의무에 익숙했고, 지킬 수 있다는 권리에 익숙했다. 지킴을 받고 있다는 영지민들의 우러름과 존경에 익숙했고, 내 가신과 기사들의 충성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어머니께도 받아본 적 없고, 아버지께도 아마 받아본 적이 없다.

그분은 내가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되셨을 때 쥰을 본격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하셨었다. 나는 그분에게 있어 하나 있는 딸이었으나, 후계자가 되도록 마음을 돌리기 위해 뺨을 때릴 정도로 절실한 후계자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기요트 변경 백작이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들으며 억울했을까. 그, 인정할 수 없었던 질시.

그런데 한 사람이 나를 오롯이 사랑하고 있었다.

밤하늘같이 어둡게 빛나는 눈에 내가 돋아나 있었다. 그가 책상을 돌아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주춤 물러났다. 그가 멈추었다. 시드니는 그 자리에서 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건 아니지만, 그 말씀을 드렸던 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그 말을 이유로 저를 잘라내시려는 건 원치 않습니다.”

“…….”

“……각하를 참수하였던 일로 제가 끔찍하십니까?”

그 나직한 질문이 내 죄책감을 찔렀다.

네가 날 죽이지 않았느냐며 먼저 시드니를 싸늘하게 비난한 사람은 나다. 그를 잘라내기 위해서라고 해도 괴로운 말을 그에게 시킨 것과 다름없다.

나는 이마를 누르듯 쓸었다. 참형. 기억만으로는 선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죽음 자체에 대하여 시드니를 원망한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다. 내 목 떨어지는 꿈을 꾸어 토악질을 하던 밤에도 그것은 시드니의 죄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달아난 목이 떨어져 바닥에 닿을 때의 그 감촉. 차갑고 뜨거운 그 감각이 떠올랐음에도 내 목을 자른 일 자체로 시드니를 원망했던 적은 없다. 그를 끔찍하게 여겨본 적이 없어. 내가 죽임을 당하던 그 자리에서 떨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가 죽을 각오를 하였었기 때문이고, 지쳐 있었기 때문이고, 집행인인 그가 끝까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던 덕분이다.

끔찍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 우리 겪은 일이 처참하다고 이미 말했다.

말했는데.

작금의 나는, 바닥에 박힌 것처럼 우뚝 서서 그를 보긴 보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며 시드니는 배수진을 치는 것 같이 나를 옭아맸다.

“제 욕심을 차리지 못하게 만드실 수 있는 단 하나 있는 대답입니다.”

기다렸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는 허락과 거절의 갈림길을 내밀었다. 단숨에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자리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그를 먼저 밀어붙인 사람은 나였다. 끝내기 위해 왔다. 끔찍한 일을 하는 김에 다른 끔찍한 일도 오늘 처리해버리려고 해서. 그러나 그게 내 진심이었나. 그게 과연 내 진심 전부였나.

아니면.

본격적으로 내 결혼을 추진하기 전에 이 사람을…….

“제가 여태 어떤 계획 하 어떤 행동을 해 왔건 그건 저를 위해서였다고 말씀드려왔습니다.”

“…….”

나는 어느새 멍하게 내려갔던 눈을 들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각하께서 부담스러워하실까 하여 더 말씀드리지 않았었습니다만, 이게 제 마지막 기회라면 지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

“각하께서 살아계시지 않으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하여 저를 위해서입니다.”

숨이 멈췄다.

“각하께서 건강하고 기쁘게 살아계시지 않으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하여 저를 위해서입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실 같은 숨이 흐르기 시작했다.

“각하를 보지 못하면 저는 살 수 없습니다. 하여 저를 위해서입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주저앉을 것처럼 휘청거렸다. 손끝, 발끝, 뱃속, 가슴, 명치, 손바닥, 손등, 목, 눈, 코, 입. 모든 곳이 예민하게 고동쳤다. 내가 무너지기 전에 나를 부축하여 세운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내가 담겼다.

수 놓인 나는 밤하늘 아래 서 있었다. 그는 이미 내 마음을 안다. 다정한 눈동자가 나를 쓸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

그림자 져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눈을 내려 시드니의 목을 보다가, 눈길을 더 올리며 손을 올렸다. 그 손은 뻗어져 나가 시드니의 팔목 근처 팔뚝을 움켜잡았다.

시드니는 잡힌 팔을 구부려 올렸다. 나를 부축하는 것과 같다.

요동치는 피로가 흘러내렸다. 그의 앞에서는 앉아서도 피곤에 잠겨 머리가 비어버리고는 하였고, 눈이 뜨이지 않고는 하였다. 버릇으로 인한 솔직함이었다. 마음을 인지한 이후로 나는 내가 시드니 앞에서 어떠했는지를 돌아보았다.

이 마음의 징조들을 돌아보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나의 많은 것들이. 내 주변조차 내게 그렇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이 있다고 설명하고 싶었던 건가?

가까이에서는 할리가 그랬고, 먼 옛날에는 황제가 그러했다.

-분하지만 포르타경이라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 누이의 마음은, 뭐……, 그렇다 쳐요.

돌고 돌아, 마음 가진 본인이 이토록 늦었다.

그러나 그 ‘늦음’이 기회나 확률과 관계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회는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입장이 있기에 처음부터 없었으며, 그렇기에 확률도 낮았다.

나는 지난 수 달간, 이런 식으로 마음 접어야 하는 일을 겪느니 차라리 깨닫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이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고.”

“…….”

“경을 희생시킬 생각 역시 없네. 경이 또다시 나를 이유로 무얼 걸고, 무얼 포기하는 것을 볼 생각이 없어. 전에 말한 적 있지. 내 주변이 또 나로 인해 무너지는 걸 볼 생각이 없다고.”

그를 움켜쥔 힘이 조금씩 풀려갔다.

“폐하께 이미 포르타의 현 가주와 어떤 식으로든 결합할 생각이 없음을 확인시켜드렸네. 션경이 폐하와 국혼을 올리는 것과 나와 그대가 결합하는 일이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염려하시더군. 포르타에 너무 많은 힘을 실어주게 된다고.”

“…….”

“그대를, 사랑하네.”

그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러나 더 키울 마음은 아니야.”

“포르타 백작을 버리는 게 희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제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희생한 것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각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입니다. 각하를 이유로 무너질 무언가가 제게는 없습니다.”

눈길이 떨어졌다.

“사랑합니다.”

“…….”

“기다리겠습니다.”

이만큼 마음 깊은 곳을 토해낸 적이 나도 없고, 그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나를 여태 기다려주었다는 걸 알겠다. 시작되니 그는 모래 젖게 하는 파도처럼 잔잔하게 들어와 내게 그를 남겼다.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우리는 섰다.

시드니의 옷깃 정도까지 시선이 내려왔을 때, 건조하게 마른 입술을 벌렸다.

“옛 친구로서 마지막으로 말하건대,”

“…….”

그에게서 손을 느리게 풀었다.

“경이 내가 검을 들 적의 버릇을 아는 것처럼, 나도 경을.”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젖어 들어갔다. 옛 친구로 말하는 바. 옅은 숨을 들이켜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을 압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잊어줘요. 경을 원망치 않습니다.”

내 말을 들은 시드니의 숨이 아주 조금, 정말 약간 주춤하였다. 그 정도는 들릴 정도로 지금의 우리는 가까이 서 있었다.

나는 친구로서는 끝으로 말하였다.

“내가 말했던 적 있을지 모르겠지만. 경은 참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에, 경은 나를 몹시도 슬프게 만듭니다.”

내게서 풀린 그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내가 잡혔던 겉옷 소매가 구겨진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소매 끝에 늘어져 있는 가볍게 말아 쥔 손도 함께, 보였다. 그 손은 곧 자연스럽게 펴지고 적당히 구부러졌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리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넥타이를 고쳐매고 어깨를 약간 더 폈다.

나는 이 자리의 끝을 느끼고 고개를 바로 들고 시드니와 눈을 마주쳤다.

친구처럼 대화하는 이런 자리,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가문끼리의 결합이나 가주간 필요한 대담 따위의 일로 만나는 일은 앞으로도 몇 번이고 있을 터. 막역한 친구로 남는 건 발리앙에 관한 일이 끝난 이후에도 하지 않으리라. 일이 끝난 후의 미래는 또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다.

나는 구부린 손을 더 주먹 쥐고 돌아섰다.

“조만간 포르타 저택으로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겠네.”

그의 집무실을 나서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그것이었다.

*

나는 기사단 건물을 나서서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돌아볼 수는 없는 게, 내가 등진 벽에 시드니가 일하는 집무실의 창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멈춰 서서 호흡을 정리했다.

훅 숨을 뱉으며 어깨가 함께 내려갔다. 무어 다른 것을 함께 내려놓은 것처럼 아주 잠시 머리가 가벼워졌다.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이내 막연한 막막함과 답답함, 긴장, 혼란으로 덮어 씌워졌으므로.

난 인적 드물고 풍광 좋은 곳을 조금 거닐 것을 결정했다. 노을은 더 짙어지고 흩어져 하늘이 차츰 어두운 푸른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오후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나온 참이라 밤까지 여유가 있었다.

오래도록 걸었다.

그리고 황제가 내게 윤허한 바 있는 황제의 정원에 들어갔다. 아리엘도 초대할 수 있도록 황제에게 말을 올려보겠다고 거짓을 말하며 아리엘의 마음을 살살 긁었던 그 정원이다. 오래전으로 돌아가면, 내가 바비에르의 수기를 없애는 마법을 아리엘에게 들킨 정원이기도 하였다.

노을이 완전히 가시고 물에 젖은 푸른 셔츠의 색만 온통 하늘을 덮었다.

나는 간편한 차림으로 서 있는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미소하며 내 인사를 받은 황제는 부드럽게 말했다.

“베르덴 발리앙을 만났다고 들었네.”

“……예.”

여긴 웬일이냐는 질문 한 번 없었다.

나를 만나러 왔구나.

황궁 곳곳에 황제의 눈이 있다. 내가 이 정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조금 늦게 대답하자 그는 웃었다.

“그리고 무슨 봉투를 가지고 포르타경에게 갔고.”

“…….”

“빈손이군.”

황제와 기 싸움을 할 정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당할 수도 없었다. 나는 지친 미소를 옅게 지었다.

“청혼서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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