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48화 (148/157)

00148 CHAPTER 11. 애가哀歌 =========================

마땅히 할 일을 한 시드니에게 네게 배신감을 느낀다면, 마땅히 할 일을 한 네게 내가 느낀 감정은 어떠했겠나.

“…….”

그때의 베르덴이 내 앞에 있기를 원한다.

그때의 그와 지금의 그를 이해하지만, 그때의 그가 한 번이라도 내 진심을 듣기를 바란다.

불가능한 일이지.

나는 손을 들어 철창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더러워진 뺨을 살며시 쓸었다. 장갑으로 덮인 엄지가 그의 눈가를 더듬었다.

이 베르덴이 내 위선을 깨닫는다고 해도 그 배신감만큼은 끝까지 베르덴에게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시드니에 의해 알고 간다 하는 것이 내게 족하다. 나는 오른쪽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은 아까 그것뿐인가? 경을 이해하느냐고?”

“…….”

“이해해. 항상 이해해왔네. 부디 몸 편히 가게.”

삼분지 이의 진심과 삼분지 일의 거짓이다. 몸도 마음도 괴로워하며 가라. 발리앙 후작. 한때라도 내 기사였던 경. 아리엘과 르네에게는 바란 적 없는 사과가 경의 입에서는 나오기를 바랐는데, 하지 않겠다니, 그럼 그리 가라.

마냥 실패한 가주로 가라.

나는 철창에서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굽혀 서류봉투로 손을 뻗었다.

“……염치없지만.”

아직 바닥을 향해 있던 머리 위로 그 말이 떨어졌다. 나는 일단 봉투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 묶은 갈색 머리채가 목을 타고 푹 떨어졌다. 눈을 찌푸리고 허리를 폈다. 베르덴은 움찔움찔 몸을 움직여 어떻게든 벽에서 어깨를 떼었다.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희 어머니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염치없는 말이 맞다. 예의상 부정하기도 뭐하게 염치없다.

나는 말을 잃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하려 하던 말이 이것? 차라리 자기를 이해하느냐는 물음을 마지막으로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자기 위안으로 삼으려 했다는 조롱만 내게 남더라도, 그래도 이것보다는 나았다. 다문 입의 입매에 힘을 주었다. 진한 웃음을 짓고 고개를 조금 비틀었다.

오늘 그를 만난 이래 지금만큼 또렷한 시선이 없었다.

분노로 손이 떨렸다.

식솔을 챙긴 가주로 남거나 혹은 모친을 챙긴 아들로라도 남겠다고.

이 부탁 자체는 내가 알드리히에게 쥰을 부탁한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발리앙의 가주가 될 사람도 아니므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까닭이 없다. 가족을 향한 애틋함이 이 부탁의 이유라면 베르덴, 그대, 정말 염치없다.

끝까지. 이럴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너희 발리앙으로 인해 지독하게 피해를 입은 내게.

믿고 부탁할 수 있는 권력자가 나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이토록 염치없어지도록 가족이 소중해? 죽을 때 되니 가리는 게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런 쪽으로 이러면 어떡하나. 차라리 끝까지 나를 협박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망연하게 그를 보다가, 어느 순간 헛웃음을 터트렸다. 흐핫, 하, 흐, 흐흐.

“후작.”

“…….”

“혹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전에 여기 왔을 때 아리엘이 내 목을 졸랐네.”

그의 눈이 커졌다.

나는 베르덴의 얼굴을 만져 피 부스러기가 남은 손으로 목과 옷깃을 매만졌다. 그리고 다시금 낮게 웃고 말을 이었다.

“날 죽이려 들었어. 끝까지 말일세. 후회도 없고 사죄도 없었네. 그대도 아리엘과 다르지 않군.”

목에서 뗀 손을 철창 위에 올렸다. 허리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앞으로 숙이고, 고개를 내렸다. 철창에 이마가 닿으려 했으나 기대지는 않았다.

나는 그대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끝까지 발리앙을 위하려는 그 마음, 이해하네.”

“…….”

“그러나 때로는 사죄할 필요도 있어.”

“…….”

“때로는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어.”

“…….”

“방금 그 부탁만큼은 경이 잘못했네. 가문의 죄를 씻기 위해서든, 누굴 살리기 위해서든, 때로는 기어야 할 때가 있어. 염치를 모르는 척 뻔뻔하게 나가는 게 이익일 때가 있고, 염치를 알고 입 다무는 게 이익일 때가 있네.”

베르덴의 눈에서 빛이 한결 가셨다.

나는 그래도 상냥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난 경이 쌍둥이들과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곳에서 서로 형제인 걸 보여주는군 그래. 동생들이 죄를 지었으면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한 번쯤 내게 사과를 하는 게 어떤가. 그대. 발리앙에 속한 자들이 죄를 지었으면 한 번쯤은. 장남으로서든 가주로서든.”

“…….”

“나는 그대가 입 다물고 숨기려고 한 걸 이해하지, 아리엘과 르네의 한 짓을 이해하는 건 아니네.”

“…….”

“그래도 친구라고 여겼다고 했었나, 아까? 포르타경을? 배신감?”

“…….”

사르르 웃었다.

“내가 할 말이네.”

봉투가 부스럭 구겨졌다. 나는 철창에서 물러났다. 녹가루인지 피 가루인지 모를 것이 손에서 부스스 떨어졌다.

그 손을 허벅지 옆에서 툭툭 털었다.

“경 모친은 내가 아니더라도 새로 발리앙의 가주가 될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챙기겠지마는……. 그래. 그건 알겠네. 자주 살피겠네.”

“…….”

“잘 가시게.”

발리앙 전 후작이 베르덴이 내 곁에서 보호받고 있을 때 최대한 후계자 교육을 지원해달라 했는데, 그 교육이 부족했었나. 아니면 내 기억이 지나치게 미화되어있던 건가. 내가 남의 무능을 섣불리 판단할 깜냥이 되지는 않으나, 베르덴이 무능하다는 건 알겠다.

르네가 가주되기 위해 썼던 그 머리를, 발리앙을 위해 썼다면 무서울 만큼 발리앙이 내실을 다지고 힘을 얻어갔으리라는 것도, 알겠다.

몸을 돌렸다.

걸어가는 내 뒤로 베르덴의 마지막 인사가 날아들었다.

“행복하십시오.”

나는 멈추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

옥을 나와서 가장 먼저 받은 것은 기사들의 시선이었다.

늦은 오후 노을이 내게 쏟아져 내렸다. 열린 옥 안에서 길게 불어온 바람에서는 피 냄새와 녹 냄새와 곰팡이의 냄새가 났다. 조금 더 앞으로 전진하자 문이 닫혔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 중 한 사람도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뒤돌아 확인하지는 않았다.

손안의 봉투를 내려다보고 방향을 틀었다.

한 이십 분 정도 걸었나. 그 정도 거리다.

기사단 건물의 입구에서 기사 하나가 안내자로 붙었다. 시드니는 다행히도 집무실에 있다고 했다. 나는 여기 오는 사이에 바람에 부석부석하게 마른 눈을 조금 찌푸렸다.

깊은숨이 작은 소리로 스르륵 흩어졌다.

앞서가는 기사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의식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복도의 창밖을 보았다.

-나도 사랑합니다.

그날, 우리는 닿았다.

떨어져 나온 내게 그가 다시 다가와 서로를 머금기를 여러 번.

닿고, 닿았었다.

집무실 앞에서 기사가 방문을 알릴 때 나는 눈 감고 조용히 숨을 쉬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드니가 책상 앞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문밖의 소리는 바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게 인사하는 기사의 행동을 보다가 눈길을 비꼈다. 그리고 다시 되돌렸다. 보기 어렵다는 감상에 시선이 스스로 움직이는 듯했다. 이러면 곤란하다.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경.”

“예.”

“…….”

……어렵군.

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른손을 들어 관자놀이 부근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조금씩 내려오던 손길은 귀를 스치며 뒤통수 쪽으로 이어져갔다. 그리고 완전히 떨어졌어야 했던 손은, 무의식중에 이마를 짚고 말았다.

어렵다.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숨을 가다듬고 나서 비로소 제대로 말을 시작했다.

“토벌이나 쥰의 일이나 대귀족 가문의 일이 아니면 경과 만날 일이 없어야 하는데. 최근에 만나는 일이 잦아져 민망하군.”

“…….”

“뭐, 이 일을 마무리 지으면 더 가까워질 테니 적응과정이라 치겠네.”

들고 있는 봉투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계절에 맞지 않게 차갑게 얼어있는 뺨이 느껴졌다. 시리다. 온몸이 시렸다. 그 와중에 목구멍이 건조해져 가는 것도 느껴졌기에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몸이 여러모로 위화감을 준다.

마음을 잠그고 입을 조심하는 것은 내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작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용건을, 그래도 최대한 작위적이지 않게 보이길 바라며 다른 주제의 문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주러 왔네.”

“…….”

차분한 손길로 봉투를 받아든 그가 입구의 끈을 풀고 서류를 꺼냈다. 맨 위의 종이.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드니가 멈칫했다. 숨도 일순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거칠게, 헛웃음처럼, 시작된 첫 숨.

이후로는 고요하게 정리된 호흡이었다.

오래도록 서류 위에 세워져 있던 시선은 여전히, 그의 두 손이 어느 순간 주춤 구부러졌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와 장갑 가죽이 바드득 구부러드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후에 정식으로 저택으로 보내겠네.”

“…….”

식은 게 여실히 느껴지는 눈이 올라왔다.

나는 적당히 미소를 보이고 이었다.

“라이네와의 연결고리가 단단해지는 걸세. 포르타에 있어 해 되는 일은 결코 아니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생각하는 중인가, 하였으나 그 의문은 바로 버려졌다. 나를 보고 있는 눈동자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게 아니라 나를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이다. 괜한 초조를 불러일으키는 시선이었다. 좀처럼 놓지 않는 어두운 눈길을, 버티듯 받아치며 기다렸다.

시드니의 턱이 일순 바들 떨린 것 같았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가 직후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기 때문에.

“거절하겠습니다.”

그는 싸늘하다 싶을 만큼 단정하게 대답했다. 끝이 구겨진 서류가 봉투 안으로 사르륵 들어갔다. 봉투 입구를 닫는 손이 순간적으로 떨리는 게 보였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버텨야 한다.

“……이거 의외군. 경의 생각으로는 라이네가 포르타 영식의 상대로 부족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를 상대로 청한 사람이, 방계로 빠질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공작이지. 이거 참, 기분 묘해지는데.”

객관적으로 나로서는 기분 상할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그런 이성적인 반응을 보여야 했다. 하여 흐리게 웃으면서 짚었으나,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봉투를 든 그의 손이 내려가는 것을 일별했다.

나는 두어 걸음 물러섰고, 그런 나를 잠시 보던 그가 입을 열어 물었다.

“헤르조를, 은애하십니까.”

우리의 눈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아주 얇은 호수얼음처럼 곧 깨질 것도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침을 삼켰다.

-나도 사랑합니다.

……헛소리. 그 한 단어를 떠올리는 게 순간적으로 힘겨웠다.

비틀 듯 입술을 열었다가 도로 닫고, 먼저 비웃음 어린 미소부터 지어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성공하였다. 나는 그제야 대답하였다.

“우리 같은 자들 혼인에 감정이 필요하나. 내가 그를 마음에 담았길 바라는 건가? 그래야 경 아우가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할 수 있어서?”

“…….”

“부디 대답해주시게. 라이네가, 포르타에 부족한가.”

“포르타를 위해서는 받아들이는 게 좋을 기회입니다.”

“그렇다면 거절은 좀 더 정중히 해줄 수도 있었어. 난 지금 솔직히 말하여 불쾌하네. 내가 그릿”

“저는.”

내 말을 듣기 싫다는 것처럼 그가 말을 잘랐다. 움직이던 내 입술이 멈추었다.

이 무슨 무례인가. 헛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낮게 웃음을 흘리려는데, 시드니는 하던 말을 완성했다.

“발리앙의 일이 끝나고 각하께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실 때까지 기다리는 중입니다.”

“…….”

“각하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내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눈이 빨개지지는 않았나. 떨고 있지는 않은가. 숨이 어린 새 날갯짓하듯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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