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6 CHAPTER 11. 애가哀歌 =========================
“…….”
“내가 전에 네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리엘을 사랑하냐고.”
“……각하께서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셨었지요.”
헤르조는 대답 아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눈을 살짝 찌푸리는 것을 보고 눈을 내리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슬프지 않습니다.”
“…….”
“슬프다기보다는, 참담합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질시한 말로가 저렇다는 것을 형님이 보여주려 하신 것 같아서.”
“포르타경이?”
나는 기가 막혀 반문했다.
“저건 발리앙이 저질러 왔던 악행의 말로네. 질시와는 관계가 없어. 갑자기 포르타경이 왜 나오지?”
입꼬리를 올리고 어이없어하는 어조로 짚었다. 그에 나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내 무릎 부근을 보고 있던 헤르조가 눈을 올렸다. 그는 잠깐 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질시의 말로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아리엘은 각하를 질시했고, 르네는 발리앙 후작을 질시했습니다. 르네는 자진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고 되돌아보니 참 무서운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르네.”
“…….”
“각하께서 그날 말씀해 주신대로 르네가 어째서 그런 거짓을 제게 말했는지, 어째서 오래전부터 말해왔는지 생각해보니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상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도 아마 제가 르네와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턱을 들었다. 눈을 껌벅여 고쳐 떴다. 의식적으로 어깨를 펴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어려운 고백을 하고 있었다.
하지 않아도 될 고백이기도 했다.
그의 일신을 위해서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은 고백이기도 했고.
아리엘의 처형이 그를 감상적으로 만들었나. 사람 죽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 함께 가출하여 여행 다닐 때 서너 번 보았다. 괴물들에게 습격당해 죽은 사람, 병에 걸려 죽은 사람, 사람에게 살해당한 사람. 아리엘과 르네가 그에게 무슨 의미였든지 간에 저런 고백, 나라면, 내가 헤르조였다면 결코 남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장에 올리고 있는 왼손을 굽혔다.
“죗값을 받은 것이니 슬프지 않습니다. 슬퍼할 만큼 소중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참담합니다. 무섭고, 소름이 끼치고, 또, 슬픕니다.”
“…….”
슬프지 않다 하면서 슬프다 하는 말을 막연하게 이해했다.
오른손을 올려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지그시 누르고, 귀와 광대를 눌렀다. 지그시 누르고, 뺨과 턱을 눌렀다.
지그시 누르고.
누른 채로 입을 열었다.
“내 한 가지 네게 조언하지.”
“…….”
“그런 위험한 속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
“결코 널 배신하지 않을 확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런 민감한 것은 말하지 마.”
“저는 르네에 대해 말씀해주신 각하께 감사 인사를 드린 것입니다.”
헤르조는 내 경고에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감상적이 되어 생각 없이 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턱선을 진득하게 훑고 손이 떨어졌다. 포르타의 청년은 슬프게 느껴지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번 일련의 발리앙의 일에 르네가 발리앙 후작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일을 계획했었는지는 조금도 나오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대귀족 열셋 미만의 모든 사람에게 발표된 사항으로는 그렇지요. 공식적으로 르네가 받은 죗값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런 사안을 제게 말씀해주셨으니, 제가 각하께 제공할 수 있는 정보 중 가장 민감한 정보를 드린 겁니다. 각하께서 르네에게 가진 생각이 무엇이시든 저는 그 정보에 대해서는 각하를 배신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엉뚱해.”
그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나는 툭 말했다.
헤르조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였다. 장난, 농담 좋아하며 행실 가볍게 하려 하는 그에게서 자주 보던 반응이다. 난 피식 웃었다.
“하여간 엉뚱해. 넌.”
“…….”
“내가 르네에 대해 네게 일러주었던 것은 네가 괜한 오해를 하고 어디 가서 베르덴을 고발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아무 생각 없이 네게 정보를 주었던 게 아니야.”
“…….”
“그리고 헤르조. 가문간, 가주간, 사람간, 수많은 거래가 동등하지 않다. 상대의 약점을 하나라도 더 잡으면 좋은 거야. 신의를 지키려 하지 마라.”
황제와 내 관계가 그렇듯. 나와 다른 가주간의 관계가 그렇듯. 라이네와 다른 가문간의 관계가 그렇듯.
나와 라이네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려 하고, 욕심 많게 현 황제에게 귀찮은 것을 요구하다가 결국에는 멸문에 가깝게 망한 바비에르가 그렇듯.
나는 입매에 힘을 주고 씩 웃은 후 부드럽게 그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 마음은 고맙게 받지.”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성벽 너머를 잠깐 보았다.
볕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눈이 절로 찡그려졌으나 먼 곳을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시야가 한순간에 넓어지며 가슴 속에 허망함이 고였다. 다시금 찾아온 탈력감이다. 나는 문득 쓴웃음을 웃었다.
르네가 한 짓은 내가 어떤 패처럼 쥐고 있을 것이다. 훗날 어떤 일이 생기거든 무기가 될 수 있게. 이미 르네는 죽었고, 그 죽음을 기어이 지금 당장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르네의 죽음의 진상이 없이도 베르덴은 곧 죽을 것이고 아리엘은 아까 죽었다.
황제가 발리앙 후작을 협박하여 후작이 르네를 살해하였다는 것을 나는 황제에게서 직접 들었다. 그것은 황제가 나를 떠보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내게 쥐여준 황제의 약점이다.
이번에 내가 입 다물어 주었으니 언젠가 황제가 나를 협박한다면 어떻게든 사용할 약점이었다.
발리앙을 무너뜨리고도 내 손에는 아직 몇 개의 패가 남아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발리앙과 미로 골목의 일에서 최대한 빠르게 손을 떼고 싶다 하는 건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건 내 사감일 뿐이라, 발리앙과 관련된 무언가가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면 이번에 다 내던지지 말고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현실이다.
나는 부석부석해진 것 같은 눈을 감았다.
슬며시 벌린 입술 사이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꿈틀 기어 나온 숨이었다. 곧 눈을 뜨고 헤르조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헤르조.”
“……예.”
“그때도 오늘도 나는 네게 아리엘을 사랑하냐고 물었고, 너는 대답하지 않았어. 제대로 듣고 싶다. 아리엘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시드니가 옳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아니야. 이런 데서 그를 생각하면 어떡하나. 이 자리에 주의를 되돌리고자 하여 몸을 움직였다. 아직도 여장에 올리고 있었던 손을 거두었다. 먼지가 일었다.
모래 먼지가 희게 묻은 장갑을 탁탁 털고 나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다시 그를 불렀다.
“헤르조.”
“…….”
“나는 너를 내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고 있다.”
굳건하게 서 있던 헤르조가 주춤했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오른발을 약간 옆으로 벌리고 몸을 버텼다.
여행하며 볕에 탄 얼굴. 흐리게 빛나던 눈이 내게서 벗어났다. 나를 비껴간 시선이 한참을 허공만 보았다. 나는 기다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다가 멈추는 게 보였다. 뺨을 타고 흘러 내려간 한 줄기를 끝으로 더 차오르는 눈물은 없었다.
서서히 내게로 돌아온 눈동자가 꺼멓게 빛났다.
그가 물었다.
“나를. 사랑해?”
옛 시절, 우리가 아직 친구일 때처럼 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말문이 막혔던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
그러자 그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재차 말문이 막혔다. 얼결에 눈을 찌푸리자, 그가 헛웃음을 웃듯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사랑보다, 더, 미워. 부러워. 질투가 나서, 스스로 한심해서, 그래서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아. 맞아, 그래, 에브. 나는 기어이 공작이 된 네가 싫어. 사랑해.”
“…….”
“이 지극히 정략적인 제안에라도 순간 혹했어. 그런데 네 옆에서 나는, 굉장히, 불행하겠지. 너는 날 사랑하지도 않을 테고, 나는 그저 공작의 부군일 뿐일 테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말했지. 질시의 말로라고.”
“…….”
“이 질투는 내가 설령 형을 제치고 포르타의 가주가 된다 하더라도 평생을 가지고 있을 자격지심이야. 나는 미련해서, 이 마음을 평생 버리지 못하고 평생 불행할 거야. 잘못하면 아리엘이나 르네처럼 비참해지는 질투인데, 아는데, 정말 그걸 아는데, 그런데 마음을 버리고 싶다고 단번에 버려지면 세상에 마음고생할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
떨리는 목소리가 건조했다. 물기 없이 그는 울었다.
둘째로 태어나 갖지 못하는 것을 바라온 자의 또 다른 모습이다. 르네는 움직여 쟁취할 것을 택했고, 헤르조는 외면하는 것을 택했다. 이 나이 되도록 어디 정착하지도 않고 전국을 떠돌며 사는 마음이라고 편할 것은 아닐 터다. 가주가 더는 부친도 아니고 같은 항렬의 형이면 더더욱.
어린 막냇동생이 황태자의 신임을 받는 기사에서 현 황제의 기사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오드리나에 돌아온 이후 좀처럼 수도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하고 있기에, 이리도 절절 끓는 마음을 내게 고백하는 것이리.
나는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난 베르덴이 널 죽이려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네게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렇게 비겁하게 떠났어.”
“…….”
“뒤늦게 바로잡겠다고 한 일이 네게 가서 베르덴을 말하는 일이었던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네 인생에 더 끼어들 일은 없었어. 우리가 이렇게 대화할 일도 없었을 거야. 알아?”
쥐스토코르의 끄트머리가 흩날려 오금을 감쌌다가 풀렸다. 봄바람이 조금 거셌다. 나는 더는 웃지 않았다. 오래도록 마음 삭여 왔던 사람을 향한 예의였다. 죄를 제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사람을 마주 보고 있는 나를 향한 예의였다.
그는 눈물 줄기가 닿고 지나간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더니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 인생에 더는 관여치 않아. 그러니 너도 더는 나를 흔들지 마.”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다. 사랑 운운하는 그런 걸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다. 실은, 헤르조가 말하는 가부의 여부는 상관이 없다. 내가 베르덴에게 넣은 청혼서 두 개가 아리엘과 르네의 의사와 관계없던 것처럼. 우리의 결혼은 자주 그러했다.
다시 공작과 영식의 관계로 돌아가 정중히 인사하고 몸을 돌리는 그를 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포르타 영식. 멈춰. 들으라.”
멈춰선 헤르조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냉정하게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 부군으로 들어와서 문제없이 자리를 채워줄 사람으로 네가 적격이다.”
헤르조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알 터. 네 결혼은 너희 가주가 결정하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바로 청혼서를 넣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옛정이다. 네가 마음 정리할 기회와 시간을 주는.”
“…….”
“잘 생각해봐. 곧 포르타 경에게 혼담을 넣을 예정이니 알고 있고.”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를 갈 것처럼 느릿느릿 웃었다. 목으로부터 울리며 나오는 그 웃음이 흩어져, 바닥으로 부서져 내렸다. 헤르조는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제게는 도달하지도 않을 청혼서일 테니까.”
내게 등을 보이고 성벽을 내려가는 그를 더는 잡지 않았다.
나는 눈앞에 아무도 없게 되자 고개를 들었다. 눈을 치뜨고 하늘을 보다가 목을 조금 더 뒤로 젖혔다.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벌린 입으로 뜨끈한 숨이 나왔다. 하늘을 보는 눈동자가 왼편으로 굴렀다가 오른편으로 구르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몸에 헛헛한 열이 올랐다.
목이 뜨거웠다.
“…….”
도달치 않을 청혼서라. 헤르조는 또 무얼 알고 있나.
나는 헛웃음을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먼지 묻지 않은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그러나 지독하게 불타다가 언젠가는 재만 남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라이네 공작이다.
그는, 포르타 백작이며.
우리는 가문을 이끄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