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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145화 (145/157)

00145 CHAPTER 11. 애가哀歌 =========================

그리고 짐승에게 하는 것처럼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가 마찬가지로 느리게 올렸다. 가벼운 눈웃음이 보내졌다. 황제가 말했다.

“라이네경 이야기를 하세.”

“예.”

“라이네경은 어린 나이부터 지난 수년간 황실에 충성을 보여왔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 라이네 공작의 조카 아들이자 현 공작의 사랑하는 사촌 동생으로서 기꺼이 황제의 기사로 황제를 섬겨왔다는 의미가 크네.”

“…….”

“짐 손으로 서임 부수는 예식을 해주겠네.”

“감사합니다.”

나는 삐죽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날을 억누르고 감사를 올렸다.

해야지. 응당 해야지.

다 큰 청년이 결단을 내리고 행한 일이라며 쥰에게만 화살을 돌릴 수도 없는 게, 황제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무언가를 제안하며 무언가를 종용한다면 그걸 물리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나 다른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이야 그럴 만한 힘과 자리가 있으니 일상처럼 하는 일이지만, 일개 귀족은 그게 힘들 수밖에. 더군다나 쥰처럼 혹시나 내게 해 끼칠까 하여 이제나저제나 나를 염려하고 있는 아이는 황제의 명령 같은 권유를 물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쥰의 중독은 황제의 짓이다.

괜한 원망을 돌리는 짓, 예를 들면 어제의 아리엘과 같은 짓은 하지 않으려 처음부터, 기억을 찾고 오드리나로 돌아왔을 때부터 애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화살을 황제에게 돌리는 게 옳은지를 충분히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하기를, 이는 분명 황제의 짓이라고.

나는 웃는 얼굴로 가만히 침을 넘겼다. 이미 웃고 있었으나 침을 삼킨 직후에는 양 입꼬리에 힘을 주어 더 깊이 웃었다.

황제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의 시선이 옆, 벽을 향했다. 시계다.

눈길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국혼에 대해서일세.”

“……아.”

“션 포르타를 염두에 두고 있네.”

“…….”

내 눈동자가 조용히 올라갔다. 위 속눈썹이 난 점막에 동공 가장자리가 닿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렸다.

내 시선을 묵묵히 받아치는 황제의 얼굴은 천천히 고요해졌다. 그의 웃음은 사라졌다.

“이걸 공작에게 말하는 이유는 공작에게 묻고 기회를 주기 위함일세.”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때부터 우리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시종의 알림이 오기도 전에 대담은 종료되었고,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도 우리는 이렇다 할 훈훈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황제도 나도 둘 다 눈이 한 번씩 마주칠 때마다 빙그레 웃음을 보내곤 하였으니, 둘 다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저녁 늦게 귀택한 후 나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

그리고 그날로부터 열흘이다.

데스챔프 공작의 처형은 어제였고, 오늘은 아리엘 발리앙의 처형이다. 체포당한 후부터 처형당하기까지의 기간이나 처형당하는 순서에도 의미는 있었다. 데스챔프 공작이 아리엘 발리앙보다 먼저 추포 당하긴 하였으나 겨우 하루 차이로 처형당하는 것에, 데스챔프 공작의 유족이나 가신은 치욕스럽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남은 유족이라 해도 먼 친척밖에 없으나.

“…….”

나는 황제를 위시하여 요인들이 자리한 곳에 앉아서, 말없이 처형대 위로 끌려 올라가는 아리엘을 응시했다.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온전치 않으니 기사가 질질 끌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기사가 등에 들쳐 엎어서 옮겨주었더랬다.

조용히 숨 쉬었다.

옆에서부터 들어온 햇빛이 얼굴을 가렸다. 차양처럼 드리운 지붕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손을 들어 목 뒤를 쓸었다. 나는 지금 황제의 옆에 앉아 있었다. 뺨에서부터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혔다가 뚝 떨어지는 더위가 허벅지에 고였다. 끓는 한숨을 낮게 흘리고 손끝을 구부렸다.

평온하나, 덥다.

더위를 느낄 날씨는 결코 아닌데 명치에서 온몸 곳곳으로 퍼지는 열이 상당했다. 오죽하면 몸 안에서 긴 벌레 같은 것이 여기저기로 기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까. 느릿느릿 목에서 손을 내렸다. 장갑이라도 벗을 수 있으면 좋겠다.

“…….”

내가 더위로 앓는 사이에 아리엘은 제 목 잘릴 자리에 앉혀졌다.

지난주에 보았을 때보다도 꼴이 엉망이다.

내가 완전히 부러뜨려버린 탓에 어쩌면 뼛조각이 박혔을지도 모를 팔은 여기서 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멀리서나마 샅샅이 그녀의 모습을 담던 눈을 약간 옆으로 굴렸다. 집행인으로 서는 자는 시드니가 아니었다.

나는 손을 올려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했다.

쭉 늘렸던 눈가 살을 놓고 고개를 들자, 초점이 잠시 흔들렸다.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깜박 움직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양 눈머리 사이를 눌렀다. 돌겠군. 덥고, 피곤하다.

그리고 완전히 깨끗해진 시야를 되찾았을 때, 나는 아마.

“…….”

……아마 아리엘과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멀지만 얼굴 식별을 못 할 정도로 먼 것은 아니었다. 아리엘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슬 시퍼렇다. 살기는 물론이요, 마나마저 움직인다. 마법사가 평소 다룰 수 있던 양의 마나는 숨 쉬는 것만큼 쉽게 다룰 수 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해도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밀어 보낼 수 없을 텐데도 진이 떴다.

옥에서 나와 단둘이 대면했을 때보다 훨씬 기세등등했다. 죽기 직전이라 거리낄 게 없으면 무엇이든 못할까. 내가 발리앙 전 후작이 죽기 전까지 그 사내를 경계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손으로 밀어 보낼 수 없으니 아리엘은 머리를 진에 박아서, 그대로 밀어 보냈다. 나는 그걸 보고 턱을 들었다.

“…….”

내 옆에는 황제가 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잠잠히 앉아 있었다. 진이 빠르게 밀려 들어왔다. 먼 길을 미끄러져 온 진에서 독물이 쏟아질 때까지

너는, 아리엘, 끝까지 반성이 없다. 포기치 않는 이 살의에 대해 감흥은 없었다. 저 여자의 반성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다. 르네의 반성을 바란 적도 한 번도 없다. 나는 ‘그들이 처음부터 마음을 고치고 모든 일을 포기한다면’을 염두에 둔 적도 있었으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음을 세상에 보인 이후부터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들을 자를 생각. 라이네를 위해 저들을 뿌리 뽑을 생각.

그리고 최근에야 인정한 내심이 추가된다. 나 받았던 그 비참함을 옮겨서 씌워줄 생각.

너희도 나만큼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생각.

그 길에서 저들의 반성은 필요치 않았다.

“폐하. 상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시드니가 이끄는 기사단의 기사들이다. 낯이 익었다. 청년들에 의해 생긴 그늘이 볕을 불완전하게나마 차단해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들이 내 옆자리의 황제를 돌아보며 묻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예, 폐하. 상하신 곳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옆을 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눈앞이 조금 멀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현실이 아닌 것 같다.

꿈을 꾸고 있나.

이 자리, 꿈인가.

갑작스럽게 든 망연한 감각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를 휘감았다. 고개를 바로 하고 멍하게 눈을 감았다. 황제의 손짓으로 기사들은 우리 앞을 떠났다.

진을 머리로 밀어 보내느라 중심을 잃고 널브러졌던 아리엘이 거칠게 세워졌다. 난 그 모습을 무감정하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알드리히는 나직이 말했다.

“끝내겠습니다.”

“예.”

이상하지. 그 대답을 하는 순간 꿈 같은 감각에서 깨어났다. 평온하게 대답하고 나는 앞만 보았다.

앞만.

끝만 보았다.

아리엘의 목이 떨어졌다.

*

나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력감이 지독했다. 베르덴도 아직 남아있는데, 모든 게 끝난 것처럼 손끝이 늘어졌다. 높은 곳에 하나로 묶은 머리채도 무거웠다. 아, 무언가는 끝났다. 끝이 난 것이다.

몸에 힘을 주려 노력하며 황제에게 약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그는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바로 고개를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눈 마주치는 가주들과는 눈짓,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계단을 내려오자 맨 아래에 서 있던 청년이 나를 불렀다.

“누님.”

“와 있었구나.”

“예. 괜찮으십니까? 마법이…….”

표정이 좋지 않음은 그 탓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죄인이 처형당한 것이라면 모를까, 일단은 그토록 비호해왔던 아리엘이 죽은 자리라 나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웃음도 짓지 못했다. 하여 손을 들어 쥰의 팔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괜찮단다.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 너야말로 괜찮니?”

“예?”

“사람 죽는 걸 보는 건 처음이잖아. 보기 좋은 건 아니라서 일부러 같이 오지 않은 건데. 기분은 괜찮고?”

걱정스럽게 묻자 쥰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처음은 아닙니다.”

“음?”

“설령 처음이었더라도 괜찮았습니다. 다른 자가 죽는 것도 아니고 발리앙이었으니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다. 이 아이도 발리앙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지팡이 짚고 있는 모습을 여기 수많은 귀족과 백성들, 기사 동료들에게 보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쥰을 잠깐 보았다. 그리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람 죽는 걸 보는 게 처음은 아니라는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쥰이 작전지에 가서 전투 중에 동료를 잃은 경험이 있을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미안해라.

무얼 떠올리고 생각할 힘도 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이럴 때는 말을 조심히 해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조갈증이 나는 목 때문에 몇 번 침을 삼키다가 조용하게 물었다.

“그럼 발리앙 후작의 처형은.”

“볼 겁니다.”

“그래……. 그럼 그날에는 같이 나오자.”

한봄의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다가 오른 어깨 앞으로 넘어왔다. 나는 느럭느럭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 나 죽을 때 꼴이 어떠했는지, 체포된 아리엘이 죽기까지의 과정 중 나와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살피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 연민에 잠겨 있는 것은 그만둘 시간이다.

그러나 당했던 일 자체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교훈도 있었다.

라이네 공작이라도 그리 죽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무능한 가주의 말로는 어떠한지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쥰이 타고 온 마차에 쥰을 태워 보낸 후 나는 내 마차에 올랐다.

쥰과 함께 귀가하여 침대에 몸을 뉘고 싶은 마음은 말도 못하게 간절했으나, 갈 곳이 있었다. 미리 잡아둔 약속이었다.

오드리나를 최외부에서 감싸는 외성에 도착했다. 지키는 기사들에게 인사를 받고 올랐다.

얼마 전 이 높이에서 발리앙이 수 놓인 독주머니를 몇 개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그러고 수년 전에는, 오드리나에 접근한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헤르조를 향해 마법을 지원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일 사이에, 현 황제가 기사들에게 서임하던 날, 오르리나로 돌아오는 헤르조와 눈이 마주쳤던 일이 있었다. 이 높이. 이 자리였다.

나는 오목 여장 위에 손을 올리고 먼 지평선을 보았다.

약속한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각하.”

“……왔군.”

그를 돌아보며 나는 옅게 웃었다. 헤르조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잘 닦인 평야를 왼편에 두고 그를 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처형식에는, 왔었나?”

물기 섞여 그나마 시원한 아침 햇빛은 끝나간다. 처형을 앞에 두고는 그토록 덥게 느껴졌던 날씨였었는데. 정오의 투명하고 샛노란 빛으로 넘어가는 중인 이 햇빛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명한 빛이었다.

뺨이 깎여 들어간 것 같이 그림자 진 헤르조는 쓴웃음을 웃었다.

“예.”

재킷 사이로 보이는 민무늬의 검정색 넥타이에 시선이 갔다. 나도 비슷한 것을 맸다. 나는 평소에도 단색의 타이를 주로 매고 있으므로 눈에 띄게 색다른 차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죄인의 죽음을 향한 애도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 타이가 훗날 내 발목을 잡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그저 평소처럼 타이를 맨 것뿐이라며 꼬리를 자르면 된다.

애초에 나는 아리엘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검정색 타이를 맨 것도 아니었다. 바깥에 보이는 내 모습을 관리하기 위해서지.

정신이 나갔다고 아리엘 발리앙을 추모하나. 내가.

그러나 헤르조가 맨 검정색 타이는 분명히 애도의 뜻을 밝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친구였고, 그는 아리엘을 사랑했다. 아마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그는 베르덴을 고발하러 왔을 때 순순히 르네를 고발하였다.

베르덴이 날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게 한 마디 경고도 없이 떠나갔던 걸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헤르조에게는 분명 악한 면이 있다.

또한, 결국에는 바로 잡고자 내게 와서 말하고자 하였던 면도 있었다.

그 반성을 특별히 어여삐 여길 생각은 아직 없으나, 내가 이제부터 말할 것을 결정하는 데에 많이 참작되었다.

나는 물었다.

“슬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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