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43화 (143/157)

00143 CHAPTER 11. 애가哀歌 =========================

꿀꺽, 단번에 삼켰다. 젖은 헛기침을 하고 느릿느릿 반문했다.

“……다음주?”

아까 낮까지만 해도 아무 말도 들은 게 없었다. 황제도 내게 언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눈을 슬며시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는 간단하게 덧붙였다.

“오늘 정해졌습니다.”

“…….”

오늘. 책상 가장자리에 걸쳐놓았던 왼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아리엘로 발리앙 후작을 더 압박하실 줄 알았더니 의외군.”

“…….”

“혹 오늘 있던 일이 폐하의 결단에 영향을 끼쳤나?”

“예.”

“……확답까지 바란 건 아닌데.”

황제의 심중을 섣부르게 짐작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옳지 않다. 황제의 행보에 대해 이리저리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 특히 귀족들이야 실제로는 마음 가볍게 황제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과 예상에 그치는 것이다. 이리 확신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에게 그 확신을 말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고.

그 황제가 설마 ‘라이네 공작을 다치게 하였으니 아리엘을 죽이겠다.’라는 둥의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사적인 관계를 이유로 그런 중요한 판단을 내릴 사람도 아니며, 우리 관계가 전보다 멀어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런 결정을 할 리가 없다.

비단 판단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걸 타인에게 표현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랬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끊어 없애는 이유가 사감이라고 타인에게 말하면 아니 되지. 그 황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내 표정이 묘해졌다. 시드니를 보아야 하나 하면서도 앞만 보며 버텼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아리엘 발리앙의 신문 자체는 전에 끝난 상태였습니다.”

“끝나 있었다고?”

“발리앙 후작이 르네 발리앙을 죽였다고 토설했고, 발리앙 후작이 각하의 선숙모를 마음에 담았었다는 것도 토설하였습니다.”

나는 대경했다. 그를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베르덴이 쥰의 모친을 은애했다는 걸 토설?

전에 대귀족 회의에서 기요트 변경 백작이 아마도 헤르조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이미 말했던 바 있는 내용이지만, 그걸 아리엘이 인정했다고? 신상 모를 다른 가문의 영식이 그리 말했다 하는 것과 집안 내의 혈족이 인정하는 건 무게가 달랐다.

시드니가 아직 받치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책상에 기대는 걸 보며 탄식하듯 물었다.

“그 무슨.”

“들어야 할 것은 전부 들었습니다. 신문이 계속되었던 것은 자성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기회?”

“예.”

“고문으로, 기회를 주었다고? 강요겠지.”

“예.”

시드니는 담담하게 내 말에 긍정했다.

애초에 아리엘과 베르덴을 신문하였다 하는 그 신문은 고문을 동반한 신문이었으며, 신문할 이유가 없었다면 그저 고문이다. 고문을 위한 고문인 것이다. 아리엘이 고문을 당한 것에 마음 아프지는 않다. 당해야지. 족히 당해야지.

나는 입가와 턱을 감싸고 누르며 쓸어내렸다.

“폐하께서 하명하신 것이었나?”

“예.”

“경은 동조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행한 거고?”

“저는.”

그가 검이 든 직사각형의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검병 부근이다. 열린 상자에 걸쳐진 손의 손끝이 살짝 구부러졌다. 손에 가려 그늘진 검병, 그 손잡이를 나는 눈길을 내려 말없이 보았다.

잠시 후 시드니가 나직이 음성을 퍼뜨렸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나는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검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드니의 옆얼굴이 들어왔다. 이를 사리물었다가 풀었다. 감정이 응축되었다. 폭발할 것처럼 흔들리던 게 단숨에 그렇게 되었다. 모이고 모여서 순도 높은 작은 덩어리가 되었다.

아, 난 오늘 시드니를 만난 이래 가장 잔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옅은 한숨도 없이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그들이 고통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경.”

“오랜 시간을 거쳐서 마침내 각하의 손에서 추락하고 떠났으니, 이제는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경이 괴물들만을 상대하길 바랐네.”

아리엘의 팔을 부러뜨리고도 냉정한 얼굴로 있던 그가 떠올랐다.

상자를 짚느라 아주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던 그의 몸이 바로 섰다. 시드니는 이렇다 할 대답 없이 뚜껑을 다시 끌어와 상자를 닫았다. 나는 그 손길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말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건.”

“…….”

“사람을 고문하고. 사람을 죽이는 건 나 같은 사람만, 기왕에 하던 사람만 하길 바랐어. 나나……, 폐하나……, 아리엘이나 르네 같은 사람 말일세.”

이 자리에 황제와 발리앙 쌍둥이를 가져왔다.

그를 보기 위해 돌리고 있던 목이 슬슬 뻑적지근해져 와서 다시 앞을 보았다. 당겨져 있던 뒷목 근육이 풀어졌다.

내게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정면의 책꽂이를 보며, 물었다.

“내 죽음이 경을 이렇게 만들었나?”

“…….”

“나 때문이야?”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하라고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그러자 그가 차분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제가 발리앙에게 원한을 가지도록 발리앙이 움직인 것이 각하의 탓입니까?”

“…….”

잔을 쥔 손이 흔들렸다.

귀에 익은 말이었다. 혹은 이 혀에, 익은 말이다. 나는 의미 없이 잔을 올려 술을 마셨다. 아니, 아니군. 동요를 어떤 식으로든지 가리고 싶어 하는 본능이다. 가만히 있자니 헛헛함이 몸을 달게 해서.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나를 다치게 했다며 내게 사죄하던 내 어린 동생이 앞에 나타났다.

-누님께서 저 대신 찔리시게 된 것.

-그게 어째서 네가 내게 입힌 피해지?

그리하여 말문을 열었더랬다.

-하나 물어보자.

네 잘못이 아니라고.

-기사의 잘못이야? 아니면 애초에 내 기사들을 공격했던 괴물들 잘못이야?

네 잘못이 결코 아니라고.

-내게 자객이 들었다 치자. 마침 보고하러 왔던 할리가 나와 함께 자객을 상대하다가 다칠 뻔했다고도 해 보자. 나는 할리를 구했지만 대신 다쳤어. 그건 할리 탓이야, 자객 탓이야?

나는 눈을 열며 헛웃음을 푸스스 웃었다.

“……내가 저번에 아리엘에게 찔렸을 때, 그걸 쥰은 제 탓이라고 했어.”

“…….”

“나는 그래서 방금 경이 한 그 질문을 아이에게 했네. 이 자리에서 나는 쥰이 되었던 걸지도 몰라. 그 아이가 어떤 심정으로 날 보고 죄책감에 잠겼는지를 방금, 비슷하게 경험한 것인지도 모르겠네.”

“…….”

“쥰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아이야.”

뜬금없이 들릴 말이지만 덧붙였다. 그리고 몹쓸 것을 본 것처럼 눈을 찡그렸다. 어여쁜 것을 본 것처럼 그 찡그린 얼굴로 슬쩍 웃음기를 내보였다. 결과적으로는 쓴웃음이다.

반은 충동이요, 반은 이성이었다.

시선이 조금 내려갔다. 고개도 따라 내려갔다. 나는 잔을 감싸고 있는 엄지를 더듬더듬 움직였다.

“기요트 변경 백작이 몇 달 전 회의에서 말했던 걸 기억하나? 발리앙 후작이 쥰의 모친과 정을 통한 바 있다고. 친분 있는 영식이 증언했다 했지.”

“…….”

“나는 헤르조에게 그게 오해라고 말했었네.”

베르덴은 날 죽이려 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았었다.

설령 내가 사실이라고 했다 하더라도, 그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내용인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떠한 때라도 그래. 그걸 헤르조가 모를 리가 없고, 포르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닌 기요트 변경 백작에게 앞뒤 상황 파악하지도 않고 가서 말했을 리 역시 없다. 기요트 변경 백작의 발언을 들은 직후에도 생각했듯. ……그런 논리로 시드니의 공조를 짐작해냈듯.

나는 잔 아래를 받치고 있는 새끼손가락을 더 구부렸다가 폈다. 술이 가운데에서부터 원을 그리며 흔들렸다. 그 파동을 보며 입을 움직였다.

“헤르조가 자기 멋대로 기요트 변경 백작에게 가서 말했을 리가 없어. 경을 거쳤겠지. 경이 변경 백작에게 직접 말했건 헤르조가 가서 말했건.”

“…….”

“경은 베르덴 그 사람이 쥰의 모친과 정을 통한 적 없다는 것을 나만큼이나 잘 알 테고.”

자연스럽던 들숨 날숨 중 그는 조용히 들숨을 길게 늘였다. 동요했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려는 때 내가 자주 하는 것 같은 그럼 긴 숨이었다.

나도 어깨를 펴고 숨을 들이켜며 술잔을 올렸다.

“폐하의 가정대로 베르덴이 나를 염려하여 쥰의 모친을 죽인 적도 없어.”

그 여자는 아버지께서 죽이셨다. 시드니에게라도 할 수 없는 말이지만.

단언의 끝에서 술을 입안에 흘려 넣었다. 힘에 겹게 삼키고 애써 말을 이었다.

“헤르조가 말한 것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기요트 변경 백작에게 증언을 넘겼다는 인정이, 평온했다.

“데스챔프 공작이 전에 미로 골목에서 나를 봤다는 둥 거짓 증언을 해서 나를 몰아세웠던 것은 기억해? 경이 말했던 누명이야.”

“…….”

“그와 똑같은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나? 해도 내가 할 일이었네. 이래도 내가 경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고?”

“아닙니다.”

마지막 물음을 던지며 그를 보자, 잠시간 나를 보던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오래전처럼, 우리가 맨손으로 서로를 잡던 그때처럼 웃었다. 짧게, 옅게 스치고 지나간 웃음이었으나 나는 보았다.

마냥 담담하게만 보였던 어두운색의 눈동자에 내가 고였다.

떨림이 나를 스쳤다. 버티기 위해 새삼스럽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시드니는 단정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약속드리건대, 저는 각하께 거짓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

“각하께 영향받아 이런 행보를 보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경.”

“저를 항상 좋은 사람으로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베풀어주시는 호의대로 좋은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각하의 시간을 돌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가 짚은 부분은 어쩌면 우리 관계에 있어서 가장 모질게 난 가시 같은 부분이었다.

시드니는, 내 뜻에 반해 에녹의 검을 썼다. 내가 죽고 라이네가 흔들리는 일 같은 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주변을 경계하며 날을 세우고 예민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되돌렸다.

좋은 사람이었다면, 내 뜻대로 그저 숨을 거두고 안식에 들게 두었을 거라는 뜻인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내 마지막 뜻대로 날 죽게 두고 그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인가.

“폐하께서는 이 검에 대해서는 각하께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으실 겁니다.”

“…….”

“이번에 쓰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가지고 계시다 언젠가를 대비하시면 좋겠습니다.”

“미로 골목 거주자들의 명단을 내게 주게.”

말을 돌려 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반쯤. 확신에 가깝지만 그렇기에 확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까 그 죄인이 내게 찾아와 션 포르타가 무어라 말하며 행동했는지를 들었을 때부터, 죄인들이 파악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어쩌면 황제의 기사로 미로 골목에 간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심장이 호흡하는 것처럼 가슴께가 파드득 떨렸다.

긴장. 떨림.

떨림. 설렘. 떨림.

“귀가하면 바로 션을 보내겠습니다.”

“…….”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당신이.

당신이, 맞구나.

눈을 감고 다섯 모금. 잔이 비었다. 앞으로 뻗고 있던 왼 다리를 구부렸다.

내가 격노하여 쓸어버린 미로 골목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발리앙과 데스챔프에게 붙어 나를 모함했던 바 있다. 그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으며, 감히 비천한 것들이 라이네를 쉬이 보고 모함한다는 분노도 겪었다. 밑바닥 죄인들이 쥰의 모친을 지원해 나를 죽이려 해왔던 역사는 잊고 내가 저희를 죽이려 한다는 분노에 젖어서 라이네 공작을 모함했다.

이번에는 내 아버지도 발리앙 쌍둥이와 저희 죄인 손에 돌아가셨음을 나는 알고 있다.

말살해야 할 놈들이다. 단지 이번엔 결코 내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내가 직접 움직일 일도 없을 것이며 내 기사들도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개중에서도 반드시 죽여야 할 놈들, 예를 들면 지금 내 방에서 할리의 감시를 받고 있을 남자와 그 남자의 무리만 다른 자의 손으로 확실하게 죽이면 된다. 그날에 살해할 수 있을 만큼 살해하게 하고, 도망가는 몇 명이나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다른 용건으로 미로 골목에 없던 자들에게는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몇이나 도망갔는지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니 찾아낼 방도가 없으니까.

그런 불완전한 말살이라도 빠른 시일 내에 이루고 미로 골목을 잊으려 했는데.

그런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태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몸을 떼며 물었다.

“내가 그자들을 죽이려 들 때를 위해 준비했던 건가?”

기울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베스트 밑단을 아래로 잡아당겨 구겨진 옷을 폈다. 시드니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예.”

“……경을 이해할 수가 없어.”

“…….”

“내가 죄를 짓는 걸 바라는 건지, 막으려는 건지를 모르겠네. 철저하게 죄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준비까지 해주는데, 또 무슨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

묻고 싶은 게 많다. 아리엘에게 원한이 있다 하면서 그 여자에게 청혼은 왜 했던 건지. 많다. 많아.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이것부터 묻기로 하였다.

“발리앙을 적대하는 게 경을 위한 일이라 했었지. 그럼 이건.”

“저를 위한 일입니다.”

그 대답을 하는 데에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체하지 않은 차분함과 침착함, 그 평온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어깨를 펴며 들이켠 숨을 파하 흐트러뜨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아흐흐.

-말해. 어째서 발리앙을 그리 적대하고 고발했나.

-저를 위해서입니다.

흐흐.

-각하께서는, 어째서 물러나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나 역시 나를 위해서네.

그가 발리앙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과연 어찌 살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구해냈기에 나를 위해서라 하였다.

“그리고. 바라지 않습니다.”

흐.

“조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울음처럼 천천히 일그러져가던 내 웃음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나는 둥그런 입구를 손끝으로 잡은 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각하께서는 라이네 공작이 져야 할 의무에 대해 항상 긍지 높으셨습니다.”

“…….”

“지켜야 할 것 없고, 해야 할 것 없고, 갚아야 할 것 없는 분이셨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입니다. 그 의무를 권리로 생각하지 않는 분이셨다면 제가 처음부터 전부 처리했을 겁니다.”

“…….”

“각하께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한순간도 바란 적이 없습니다.”

“……그래.”

안다.

조용히 수긍한 나는 손을 뻗었다.

“한 가지 묻겠네.”

정적인 눈이 살짝 커지는 게 보였다. 그러나 내 두 손에 담긴 얼굴은 순순히 내게로 끌려왔다. 나는 속삭이며 물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나?”

그의 동공 가장자리가 또렷해졌다. 베일처럼 덮어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말을 꺼내면 겉핥는 듯한 설명, 어느 정도 설명을 했다 하면 돌려버리는 주제. 그도 나도 준비할 시간 길었던 자리지만, 그도 나도 어느 선에서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마음 더 깊어지지 않기 위해서였고, 그는, 이 사람은, 이 사람도 어쩌면.

-제가 당신의 생명을 거둡니다.

-예.

-원망, 하십니까.

-아니요.

-해 주십시오.

어쩌면 내게 더 다가오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우리는 정리해야 한다.

내가 칭찬하던 이 눈. 밤하늘을 닮아 찬연한 두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마지막 시간이 아마 옥에서였던가. 그 눈을 보며 나는 떨리는 입술을 다물고 애써 미소했고, 나를 보던 시드니가 나직이 대답했다.

“예.”

“나도.”

우리는 정리해야 한다. 그래도 한 번만. 그러기 위하여 한 번만.

하여 대답하노라.

“나도 사랑합니다.”

가뭄 든 땅처럼 갈라져 한숨처럼 밀려나온 작은 고백의 끝.

나와 그가 닿았다.

짧고 옅은 접촉이었다. 불안정한 온기가 서로를 적셨다가 떨어졌다.

나는 그의 뺨을 감쌌던 두 손을 내리며 쓴웃음을 웃었다.

“허락으…….”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이런 짓을 하여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려던 입이 우뚝 멈추었다.

머리 뒤를 감싸는 손길이 있었다.

아까 풀어내렸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마른 가지처럼 말라가기 시작한 심장이 휩쓸렸다. 사과를 위해 벌렸던 입술이 그에게 가만히 덮였다.

깊은숨이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담고 있는 그의 눈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아.

입, 맞추고 있구나, 우리.

============================ 작품 후기 ============================

다음은 이번주말이나 그 다음주 초 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날에 완결까지 한번에 올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스무편이든 서른편이든 한 번에 타다다닥 올릴 수 있기를.

한주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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