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CHAPTER 11. 애가哀歌 =========================
웃는 입 모양 그대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여태 미로골목에 손대지 않은 이유.
그렇지. 아리엘과 르네를 죽이는 데에 어찌 이용될지 모르니 남겨두었다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를 꼽아보자면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 한 번 섣부르게 미로골목을 쓸었다가 감당해야 했던 그 후유증이다. 내게 유감을 가진 죄인들이 내게 맞설 수 있는 권력자에게 붙어 나를 모함했다.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할 수 없으니 때가 되면 남의 손을 빌려서 온전치 않게라도 미로골목을 뒤집을 작정이었다.
수년 시간을 가지며 미로골목에 거주하는 죄인들을 전부 파악한 후에 완전히 죽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발리앙의 일이 마무리되면 미로골목에서도 최대한 빠르게 손을 떼고 싶었다. 죄인들과 교류한 시간은 지금까지로 족하다. 공작을 잇지 않고자 할 때 미로골목을 드나들기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나는 공작이었다.
내 미래를 위해서도 이 자는 죽어야 했다. 라이네 공작이 죄인과 친분 있다는 게 드러날까 하여.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려 들었던 이 무리만이라도 죽으면 된다.
“그래.”
누구의 손에라도 죽으면 된다.
“해서 언제 죽인다 했지?”
그래서 윌리엄이 이끄는 용병단의 거취를 보고받아왔고. 그들 용병단의 용병을 죽이고 달아난 이 자, 그들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한 포기이고 타협이었다.
나는 작은 환희에 잠겼다.
저들이 전부 파악되어 몰살을 장담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그 명단만 확보하면 내가 손수 쳐도 된다는 뜻이다.
후환이 남지 않도록 전부 몰살시킬 수 있어. 명단만 확보하면, 남김없이 죽일 수 있다. 이 어찌나.
“곧.”
“곧?”
마음이 죽을 것 같은지.
눈꺼풀이 조금 내려갔다. 곧 죽이러 오겠다고 했다고……. 곧.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구부리고 있던 손을 폈다. 허벅지 옆으로 떨어졌다. 환희에 잠겼으나, 눈앞의 환희에 눈멀어 있지는 않다. 정리하고 확신할 시간이 필요했다. 섣부르게 살의를 보여서는 아니 된다.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잠시 여기 저택에 머무르라.”
“어? 뭐? 왜?”
“지금 당장 긴 대화 나눌 시간은 없으니까.”
“우리가 긴 대화 나눌 게 있어? 아, 어찌 살릴지……, 뭐 그런 거? 살릴 계획 같은 거 조율하려고?”
나는 가볍게 음, 하는 소리로 긍정했다.
그리고 차분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오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리와 시드니다. 포르타 백작이 방문하거든 응접실이 아니라 집무실로 모시라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이겠으나 때가 마땅찮다. 공작의 집무실과 방은 같은 층에 있었다. 방 앞에 서 있기만 하는 내게 보좌는 의아해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나는 일단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두 사람을 향해 몸을 틀었다. 웃었다.
“왔군. 피곤할 텐데 미안하네.”
할리의 뒤에 서 있던 시드니의 눈길이 방문을 향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스르르 내게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피곤치 않습니다.”
“다행이네. 아, 먼저 가 계시게. 나는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
“……알겠습니다.”
“경은 이 사람을 안내하고 여기로 오게.”
“예, 각하.”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걷기 시작한 할리의 뒤로, 시드니는 잠시 멈춰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서로를 휘감았다. 내가 먼저 끊었다. 끊으려 했다. 그의 눈이 움직였다.
그가 먼저 내 머리 너머를 보았다. 따라오지 않는 그를 돌아보고 있을 할리가 보이리. 시드니가 걸음을 옮겼다. 나를 지나치며 일어난 옅은 바람이 일렁였다. 아니, 아니다. 내 숨이 일렁였다. 심장이 일렁였다. 내려앉는 느낌에 나는 입을 슬며시 벌리며 눈을 내리떴다.
이 감정을 후회하면 시간이 돌아갈까. 후회하면, 사라져?
세상, 누굴 사랑하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텐데, 다른 이들은 이 힘겨운 감정을 어찌 버텨내고 있나.
손으로 두 눈을 짚었다. 손바닥에 눌린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시렸다.
할리가 돌아올 때까지 평온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데 생각을 지우지 않으면 마음도 지워지지 않았다. 머리를 비우고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
내 뒤에 선 할리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알고도 수십 초를 더 지체했다. 압박에서 벗어난 눈은 한참 시야를 확보하지 못했다. 하얗게 번진 앞을 보며 문고리를 잡았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태 가만히 있던 왼손으로 양 눈꼬리를 매만지며, 오른손으로는 방안을 가리켰다. 할리가 다가와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좌는 어둠에 잠긴 남자를 발견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경. 이 자를 지키고 있게.”
“그리 하겠습니다.”
명령의 까닭을 묻는 것도 나와 단둘이 있을 때나 하는 일이다. 남 앞에서는 두말없이 명을 받드는 기사에게 웃으며 나는 먼저 방안으로 들어섰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시중 없이 상의를 갈아입고 나왔다. 방 곳곳에 날붙이를 숨겨둔 것이야 할리도 잘 알고 있다. 알아서 경계할 것이다. 아쉬운 쪽은 저쪽이니 설마 미쳤다고 내 사람에게 덤벼들겠느냐마는.
“불 켜러 오는 사람은 적당히 돌려보내도록 하고.”
“예.”
“그리고……. 이 남자는, 미로골목의 죄인이야.”
“말해버리네, 그걸 또.”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달빛만 받으며 히죽 웃었다.
“그럼 더 말해. 내가 언니를 얼마나 죽이려 했는지도.”
“뭐, 그런 악연이지.”
할리의 손이 벨트에 걸린 검병으로 갔다. 나는 성큼 다가가 검병 끝을 눌렀다. 덜걱거리며 한 마디 정도 검집에서 벗어난 검이 쑥 닫혀 들어갔다.
“지키면 되네.”
“……예.”
대답을 들었으면 되었다. 몸을 돌렸다.
그새 밤에 적응되어 있던 눈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마자 빛을 버겁게 느꼈다. 잠깐의 일이다. 문을 닫고 집무실을 향해 방향을 잡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생각은 시드니를 만나며 사라져서, 잡히는 대로 입은 셔츠에 허리를 조이는 베스트까지 제대로 입고 있었다. 넥타이 매듭을 고치며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뱉기를 반복했다.
집무실의 문은 열려 있었다.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디 그랬다. 다만 타인만 집무실에 넣어두는 일은 자제하는 편이 옳았다. 특히 가문 밖의 사람이라면. 그러나 나는 허락했고, 내 명에 따라 시드니만 남겨두고 돌아온 할리는 아마 놀랐을 것이다. 죽은 전 집사가 일부러 고용인 명부를 보게 하였을 때처럼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대단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라서.
나는 문 앞에 서서 수많은 촛불로 노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안을 잠시 보았다.
거기에 시드니가 있었다.
나는 일그러지게도 웃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는 마냥 까맣게 보이는 두 눈, 이제는 피하지도 못하였다. 엉망이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목소리는 내심과 다르게 덤덤했다. 긴 한숨이 깊은 곳에서부터 나와 흩어졌다. 마침내 다리를 움직였다. 문을 닫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준비해두었던 술병을 들고, 마찬가지로 준비해두었던 잔 두 개에 차례로 따랐다. 노란 액체가 담긴 두 잔을 들어 올리며 책상에 걸터앉듯 기댔다. 하나를 그에게 내밀자, 그는 받아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잔을 입에 대었다.
넘어가는 술은 아주 순하지는 않았다. 목이 적당하게 젖었다. 잔을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
“쥰은.”
흔들리는 숙성주만 눈에 담았다.
“폐하의 기사로 돌아가지 않을 걸세. 그리 알고 있으면 될 거야. 폐하께도 다시 아뢰겠지만, 서임 깨는 절차를 준비해주시면 되겠네.”
“알겠습니다.”
“그날. 내 의사에 상관없이 그날 발리앙을 흔들 생각이었다고 했었지. 기억하나?”
불쑥 물었다. 앞뒤 이어지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기억을 되짚는 기색 없이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사죄하지 않겠다 했다. 잘못이, 없다고도 하였다.
포르타를 발리앙과 엮어 진창에 버리려고 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도 했다.
나는 숨을 잠시 고르게 정리했다.
우리는 이 자리를 가지기까지 시간을 길게 가졌다. 할 말을 고르고 물어야 할 것을 고를 시간이 길었다. 오늘은 뜬금없이 이리저리 주제가 튀어오르는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훅 숨을 뱉은 뒤 물었다.
“어째서 그러려 했나?”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답을 고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차분하게 대답했다.
덩달아 나도 차분함에 차분함을 덮는 기분이라, 이 집무실에 들어설 때보다야 훨씬 평온하게 다시 물었다.
“날 비호하다 경과 포르타가 잃었던 것들을 말하는 건가?”
“…….”
“…….”
……이쪽이 훨씬 더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 아니었나.
시드니는 묘하게도 이 질문에 침묵했다. 나는 그가 무어라도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목이 금방 말랐다. 힐끔 그를 보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한 모금. 삼키는 사이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제가 그때 잃었던 것들이 무엇입니까?”
“……글쎄. 기사단장 자리. 대귀족 가문에서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미래. 내가 모르는 다른 피해도 필시 있었겠지.”
“각하.”
그는 나를 불렀다.
내 시선을 바라는 것 같은 부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말을 무안할 정도로 차게 쳐내고자 부른 것도 아니고. 나는 물끄러미 술잔만을 내려다보았다. 시드니는 잔잔하게 내게 말했다.
“당시 제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잃은 분은 있어도, 잃은 것은 없습니다.”
그 순간이다. 잔이 흔들린 것은.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젖혀가며 잔을 단번에 비웠다.
“해서 그게 원한인가? 고문받다 죽은 공작?”
“…….”
“그 무능하고 미련한 공작을 경 멋대로 원한의 이유 삼았다고?”
“…….”
“원한을 가져도 내가 가질 죽음이고, 갚아도 내가 갚을 죽음이네. 경이 원한 가질 까닭이 없어. 말해보게. 그게 경이 가진 원한인가?”
“예.”
내 준비되어 있던 거친 비꼼에도 시드니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 나온 것은 기대치 않았던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
“…….”
“……저번에는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니.”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멋대로 각하를 원한의 이유로 삼은 것은 각하께서 기분 상하실 일이니 그에 대한 사과입니다.”
“…….”
나는 옆을 더듬어 병을 들었다. 빈 잔에 술을 쪼르르 따랐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씩 따라 마시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잔의 반 이상으로 눌러 담으며 말했다.
“경. 책상에 있는 상자를 열어보게.”
그새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시드니는 아직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술의 잔을 내가 기대어 있는 책상에 내려놓았다. 가만히 상자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손길을 보지 않았다. 여태껏 그랬듯 정면만을 보며 병을 옆에 내려놓았다. 덜걱.
입술에 살짝 잔이 닿았을 무렵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내게 몇 년 전에 하사하셨던 검일세.”
“…….”
유리잔에 고이는 음성이 쨍 울렸다. 한 모금 마셨다. 액체 넘어가며 젖게 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에녹의 검을 기억하나?”
“…….”
“이 검, 경이 폐하께 맡긴 것, 맞아?”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날 보는 시선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검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 방에 촛불 빛의 정적이 앉았다. 건조하고 가벼웠다. 이내 내가 술을 홀짝이며 삼키는 소리로 정적이 끝났다.
잔을 들고 있는 팔꿈치가 몸통에 붙었다. 왼손을 책상 모서리에 걸쳤다. 나는 천천히 물었다.
“경은 내가 그 검을 정말 쓸 거라 생각했나?”
“쓰시길 바랐습니다.”
“…….”
“직접 움직이지 않으시기를 바랐습니다.”
“경은. 그래, 그렇지. 그때 정원에서. 저 죄는 내가 지을 게 아니라며 막아섰었지. 아리엘을 추락시키는 게 죄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누명을 씌우는 것은 죄입니다.”
“……경 청렴한 건 알고 있네.”
“그런 게 아닙니다.”
시드니는 차분하게 나를 반박했다. 나는 내 왼편에 서 있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도 검에서 눈을 떼고 내게 시선을 주었다.
“저는 청렴했던 적이 없습니다.”
“…….”
“제 독선입니다. 황제를 살해하려 했다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각하께서 직접 움직이지 않으시기를 바랐습니다.”
오래전, 나와 라이네를 연신 덮치고 있던 노도. 그것의 정점을 찍은 누명이었다.
반역을 제외하면 가장 치명적인 죄가 황제 시해다. 그러나 미수에 그쳤고 내 사람들도 내가 마법사라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에, 내 몸만 괜찮았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가 라이네이고 내가 공작인 덕분에 살아남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일개 영애와 영식에 불과한 자들이 일으킨 시해 미수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못했을 터.
발리앙을 거기에 끌고 들어가는 건 일단 베르덴이 동생들을 잘라내느냐 마느냐에 따라 수위가 달라졌을 것이다.
달라지는 수위는 비참함의 정도다. 망하고 망하지 않고는 선택지에 없다. 나는 베르덴과 쌍둥이, 발리앙을 필히 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각오와 그런 경계였다. 라이네를 위협할 자들은 마땅히 제거해야 하므로.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데에 황제 시해 미수죄는 좋은 누명이다. 전에 쌍둥이에 의해 내가 당했던 순서대로 이번에는 발리앙이 몰리고 있었고, 시해 미수죄를 씌우는 건 그런 일환이기도 하였다. 한데 어째서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일‘에서만큼은’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여 물었다.
“왜.”
“…….”
“왜. 내가 그리하면 발리앙 쌍둥이와 똑같은 인간이 될 거라 생각해서?”
“아닙니다.”
“아니면.”
거듭 캐물었으나 시드니는 말하지 않았다. 대답은 비교적 순순히 하고 있지만 설명 자체가 제한되어 있다. 나는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 벅차서, 이만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앞을 보았다.
잔 입구를 입술에 눌렀다. 기울이지는 않았다.
내가 고개를 돌려도 내게 머물러 있던 시드니의 눈이 다시 그의 앞을 향하는 게, 눈꼬리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등진 창문 밖을 보고 있을까. 나는 그대로 있다가 잔을 기울였다. 약간 연 입술 사이로 시원한 것이 흘러들어 왔다.
그 술을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식도로 넘기기 시작했을 때, 시드니가 가만히 말했다.
“다음 주 중에 아리엘 발리앙의 처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