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41화 (141/157)

00141 CHAPTER 11. 애가哀歌 =========================

“후에 건강 회복하시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잘랐다. 내가 느끼기에도 탐탁하지 않을 정도로 싸늘했다. 잘라내는 와중에 인지했으므로, 나는 바로 빙그레 웃었다.

“되도록 오늘 만나면 좋겠네. 나는 괜찮아. 하지만 목, 이 모양을 하고 다니기는 좀 그렇군. 혹시 오늘 시간 괜찮나? 퇴근 후에 들러주면 좋겠는데.”

“각하.”

“경도 바쁘다는 걸 아네. 밀어붙여 미안하이.”

거절해도 괜찮다는 말은 붙이지 않았다.

그를 마주하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담대함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 순간에도 그랬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하고 있었고, 언제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이 일렁이는 노도처럼 느껴졌다. 답답하였다. 목이 틀어막힌 것처럼 숨이 막혀.

시드니와의 사적인 만남은 빠르게 끝맺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난 두 달, 이 사람과 언젠가는 만나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 필요성으로 시달렸다. 일하다가도 불쑥 찾아오는 그 묵직한 의무감과 긴장, 떨림은 내가 오랜 시간 감내하기 어려운 부류의 것이었다. 오랜 시간 만남을 미루며 사감에 시달리기에는 나는 매일 할 일이 많았다.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다른 일들이 산더미와도 같다.

나는 라이네를 통치하는 공작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 역시.

포르타를 통치하는 백작이다.

나는 스스로 세뇌하듯 내심 소리 없이 되뇌었다. 나와 같은 가주. 그것도 대귀족 가문의 가주다. 우리 둘 다 가주될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어른들에 의해 소개받았고 친구가 되었던 바. 우리는 서로를 친구 이상으로 사랑하며 감정을 나누려 친구 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다.

그러니까, 우리는 둘 다 가주다.

완전히 엉켜 인과관계를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나를 가라앉혔다.

수십 년이 지나 깨달은 마음이다. 지난 시간을 지나온 내가, 여기까지 살아온 내가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가 갈릴 정도로 가슴이 무겁게 울리게 하는 이 마음, 이 두려움을 지금보다도 더 어리석은 시간의 내가 느끼지 않아서, 실로 다행이었다.

사람을 믿다 멸망한 내가 기묘할 정도로 시드니를 단단히 믿어왔던 까닭이 나도 몰랐던 사랑을 기반으로 함에 근래 느끼는 허탈한 자괴감이 상당하였다.

나는 옅은 웃음을 덧씌운 얼굴로 시드니를 기다렸다.

그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사실을 전달해왔다.

“퇴근이, 오늘 많이 늦습니다.”

“아네.”

오늘만이 아니라 거의 매일 늦지.

발리앙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이래 이 사람이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살롱에서도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고 가주들이 혀를 차며 이야기했고. 포르타 백작으로서의 사교활동마저 줄일 정도면 상당히 바쁜 모양이라.

대꾸하자 그가 눈길을 약간 아래로 내렸다.

내 목이다.

내 몸에 대해 염려 당하는 건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어야 한다. 나는 손을 들어 목을 가볍게 감쌌다. 그리고 차게 미소했다.

“이미 염려해도 될 선을 넘었네, 경. 전에는 넘어갔지만 오늘도 이러면 곤란해.”

“죄송합니다.”

그는 담담하게 사과했다.

마땅한 대응이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처음으로, 누구의 무례를 지적한 것에 잘게 떨리는 숨통을 느꼈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럴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버텨야 했던 적이 몇 번 있는데, 그건 황제의 앞이었지 다른 귀족의 앞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

아. 그렇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그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반걸음 주춤 물러났다. 시드니의 눈이 멈칫, 짧은 순간에 커졌다가 돌아왔다. 스치고 지나간 그 변화마저도 내 눈에 잘 들어왔다. 들어오고, 박혔다.

하나하나 의미 있어지는 중이다.

그의 하나하나, 내게 의미 있어지는 중이다.

“경을…….”

왈칵 올라온 목소리가 그렇게 새어나갔다. 나는 이를 사리물었다.

경을 내가.

정말 많이.

실로 깊이.

……이미 지독하게.

명치부터 느릿느릿 퍼지는 어떤 것 때문에 숨이 후드득 나왔다.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몇 번이고 고쳐 떴다. 아, 이거 곤란하다.

뭐하는 짓인가, 에본느 라이네. 정말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잘 알겠다. 각오가 섰을 때 만나야 함을. 또 미루면 그때는 지금까지 필요했던 각오보다 더 큰 각오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을 존중할 수가 없어. 피곤해도 오시게. 저녁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으니 와. 기다리겠네.”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서 비켜나 있었다. 쉬다 만 것 같은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듯하다가 같지 않았다. 나는 목을 감싼 채로 몸을 돌렸다.

*

나는 귀가한 뒤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고, 멍을 가리는 화장까지 하고 나서야 영지 일을 살피는 데에 매진했다.

글자를 읽어야 하는 눈동자가 흔들려서 멈추지 않을 때까지 보고서만 들여다보았다. 봉신가문의 영지는 각 가주들이 영지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라이네의 중앙령인 레룩스는 특히 잘 살펴야 한다. 내려가지 않은 지 오래 지나 실정이 염려되기도 했다.

이번에 총집사가 노환으로 숨을 거두고 나면 새로 그 직무를 이어받을 이를 내가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쥰을…….

쥰을 보내면 좋겠지만,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감정적으로 걸리는 점이라 다른 방법이 없다면 추진했겠으나, 다른 방법이 있었다.

내가 결혼하여 남편 되는 사람을 블린성에 상주하게 하면 된다 하는.

나는 주로 오드리나에 머무르고 있어야 하니, 발리앙의 일이 끝나면 속전속결로 결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곤란하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귀가하고 나서 아득바득 일에 매달린 것에는, 시드니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는 감도 있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없애려 애쓰다 보면 반드시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혼인할 때까지는 없앨 수 있는 건가? 정략결혼이라 하더라도 상대에게 예의는 지켜야 할 텐데.

나는 쥰과 함께 한 저녁 티타임 이후로 읽기 시작한 책장을 넘기면서도 수시로 책 내용과 상관없는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리 긴장하며 기다린 손님은, 저녁 아홉 시쯤 왔다.

“…….”

시드니가 아니었다.

몸을 조이는 차림으로 오래 있다 보니 슬슬 답답해져서 베스트를 벗고 있어도 될 셔츠로 갈아입고자 하여 내 방에 들렀을 때였다. 첫 문을 열자마자 이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다. 기척을 죽이고 있어 누군가 방 안에 있는 것도 몰랐다.

약간의 피로를 느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서며 말했다.

“약속, 지켜줘, 언니.”

“……아.”

애매한 탄성으로 대꾸했다. 이번에는 공격 한 번이 없이 용건이다. 아직 촛불을 전연 켜지 않은 방. 이 문을 닫으면 내 맞은편에 보이는 발코니의 창에서 들어오는 달빛에만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 있기로 하였다.

두피가 따끔거려 막 풀어 내린 참인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었다.

뒷목 바로 위까지 파고든 손가락이 두피에 닿았다. 거기서부터 길게 머리칼을 빗어냈다. 손가락 사이를 거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의외군. 나는 네가 거래를 후회하고 있을 줄 알았다.”

황제의 기사들이 두 번 움직인 일이 없으니까. 괜히 거래를 청했다고 후회하고 있어도 이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만에 라이네 저택 안으로 기어들어 와서 하는 말이 살려달라는 말이다.

경계가 고개를 들었다.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리엘과 르네에 비하면 원색적인 죄인에 가깝다 할 수 있는 남자는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왔어.”

“뭐가.”

“기사가.”

“…….”

“션 포르타가 왔어.”

머리카락의 마지막 뭉텅이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몸 옆 허공에서 멈춘 손을 허리춤까지 내리며 오른 눈을 웃듯 찌푸렸다.

황제가 기사를 움직였다고?

웬일로 여태 아리엘을 신문하면서 미로골목을 뒤집어엎지 않더니 오늘에서야?

이미 잡아들여 쥰을 중독시키는 데에 이용했던 죄인 중 하나가 고신 끝에 죽어 나간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마른 입안에서 뜨끈한 한숨을 흐드드 흘려보내며 목소리를 열었다.

“해서.”

“…….”

“그 ‘왔다’하는 건 너희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너를 찾아왔다는 말인가.”

“찾아왔지.”

“너희를 말살하겠다고 예고라도 하던가?”

“…….”

조롱하듯 물었는데, 발끈한 기색도 없었다. 어떠한 대꾸 역시 없었다. 어라……. 내 웃음이 더 짙어졌다.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도주하여 몸을 숨기기가 용의치 않은 명사들도 아니고, 미로 골목의 죄인들이다. 누가 있는지, 몇이나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으니 도망가면 추적하기 힘든 자들. 너희를 곧 죽일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하면 저들 중 누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랴.

이는 무슨 미친 짓이지?

나는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를 뚫어지라 살폈다. 표정이 깔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숨 쉬는 소리마저도 실마리가 된다. 이 남자의 호흡은 잔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에 내게 거래를 청하러 왔을 때도 빈정거리고 놀리며 상하관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던 자다.

두려워도 두렵지 않은 척을 할 줄 아는 자라는 뜻이었다.

“……이해할 수 없군.”

천천히 말했다. 자다 일어난 것처럼 약간 잠긴 목소리가 남자에게로 기어갔다.

“말했듯, 나는 네가 거래를 후회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게 목숨을 보장받는 것보다야 네가 직접 도망하는 게 살 확률이 높은 걸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

“…….”

“그래, 그때는 두려움에 머리가 마비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내게 달려왔다고 쳐 보지.”

“…….”

“오늘은 뭐지?”

열린 발코니 문으로 마침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뒤통수에서 잠시 눌렀다.

이 자가 생각 못 한 때에 내게 온지라 경계심이 있었다. 내가 마음 놓고 조치하기 힘든 거물이 엮여, 이미 이 죄인과 미로골목은 대귀족과 황제 간 알력 다툼의 일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포르타와 황제, 혹은 포르타, 라이네와 황제의 기 싸움이다.

황제에게는 이 자가 죄인의 신분으로 나를 방문했음을 끝까지 부정했으나 방문한 사실 자체는 이미 황제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오늘의 방문도 황제에게 보고될지 모르는 일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리라. 이번에는 또 무어라 변명해야 하나. 이 자가 미로골목의 죄인임을 몰랐다고 발뺌하는 것도 딱 저번까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공허하게 끓으려는 속을 연신 내쉬는 옅은 한숨으로 다스렸다. 기다렸다. 기다리며 나도 생각을 하였다. 어찌하여 도망을 택하지 않고 내게 달려왔나.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

오랜 시간을 내줄 수 없다. 시드니가 언제 올지 몰라. 또한 이 접촉이 길어질수록 황제에게 잡히는 약점의 크기가 커진다. 그러나 재촉지 않은 것은 무언가 막연한 것이 떠오를락 말락 하였기 때문이었다.

도망하지 않는 걸 선택한 게 아니라, 도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며.

뒤통수에서 조금씩 떨어지던 손을 다시 눌렀다. 잠깐. 도망치지 못하는 다면, 도망치지 못할 이유가 무언가. 내게 목숨을 보장받아야 할 이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아. 잠깐.

“……너.”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기억을 되찾았다면, 충분한 시간을 바라보며 착수했을 일이 하나 있다.

아주 가끔 생각하기도 했던 바. 미로골목을 쓸어버리는 일을 섣불리 시작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남자가 있는 정면을 다시 보며 말을 이었다. 목이 메었다.

“너희, 파악되었나?”

“아니야, 그런 거.”

돌려 물었음에도 그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 득달같은 부정이다. 머리에서 손이 흘러내렸다. 다시 허리춤. 단검 하나 차고 있지 않은 허리춤. 그러나 손은 검병을 잡은 것처럼 둥글게 구부러졌다.

나는 내가 느끼기에도 섬뜩하게 입을 쪽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파악되었군.”

“…….”

“말살이라 했으니 너희 전부 파악되었겠지. 어디로 도망쳐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을 거야. 그렇지?”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그 기사가 너희에게 그런 예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이리 달려왔을 리가 없다. 네놈이.”

“아니야, 언니.”

거듭 부정한다. 나는 웃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이 자를 살려둘 생각은 호리만큼도 없었다.

거래에 응할 당시에도 물론, 그따위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 자는 죽을 것이다. 의뢰에 응하여 내게 자객을 보내고 독을 허락하고 아버지의 사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도, 그러고도 내게 목숨을 보장받을 생각을 했다는 것이 처음부터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거래에 응했던 것은 이 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전과 같이 나를 모함하는 일을 피하기 위했던 것에 불과했다.

나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살려 달라고 왔으면서 내게 약점은 잡히고 싶지 않다는 건가? 살아 있어야 약점도 약점이 된다.”

“우리는 거래를 했어, 언니.”

“…….”

“정보를 주었으니 이제 받을 차례야. 날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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