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CHAPTER 11. 애가哀歌 =========================
“이 고통의 반쯤은 네 남동생이 받아야 했을 몫이라 생각하면 된다.”
잡았던 곳에서 손을 위로 미끄러트렸다. 그리고 팔목 위, 팔꿈치 아래의 팔을 잡고 힘을 주자 아리엘이 겁에 질린 얼굴로 도리질을 쳤다.
어차피, 어디 모서리에 내리쳐서 부러뜨리는 게 아니면 내 힘으로는 이 뼈를 부러뜨릴 수 없다. 시늉만으로도 숨이 넘어가려 하는 모양이 슬플 정도로 우스웠다. 우습고, 기가 막혔다.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한참 그녀를 들여다보다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는 상체가 내게로 기울어졌다. 나는 그녀의 귀 옆에 대고 속삭였다.
“쥰을 염려해줘서 고맙네. 하지만 다시는 입에 담지 말도록 해. 혀를 자르면 많이 아플 거야.”
“…….”
“이것도 안 당할 수 있었던 걸 왜 자초해서. 르네로 기분 상하게 했다고 쥰을 가져다 대면 안 되지.”
“우읍.”
몸을 바로 세우며, 시드니와 나에 의해 두 번 부러진 부근을 툭 건드렸다. 그녀가 굳었다. 입을 놓자 아리엘은 바닥으로 떨어져 구토를 시작했다. 내가 고신 받다 고통을 이기지 못했을 때처럼.
아,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저러했었다는 뜻이다.
나는 양손 장갑을 가볍게 털어냈다.
시드니가 부러트려 놓은 곳에 손을 댄 것뿐이니 어떻게든 포장이 되겠지. 아리엘이 날 고발해도 황제가 처리할 것이다. 내게 옥 열쇠를 먼저 준 이는 황제이니만큼. 쓸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아리엘이 쥰을 건드릴 줄 알았겠나.
잔잔한 숨을 들이켜며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다시 자물쇠를 걸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잠시 안을 보았다. 토사물의 색은 정상적이었지만, 양이 적고 대부분이 위액이었다. 비리고 시큼한 냄새가 곧 나 있는 곳까지 왔다. 아마 저 죄인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쓰지 못할 손으로 눈길을 옮겼다.
……더는 용건 없다.
내가 저를 죽일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그 근거가 있을 테지만, 글쎄, 저 상태로 있는 사람에게서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시드니에게 귀띔해두는 게 차라리 나으리.
구부린 손을 코밑에 대고 헛기침했다. 공기가 역하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연달아 만나고 나니, 베르덴의 모양을 보고 부족하다 느꼈던 것이 무엇인지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다. 내 사감 섞인 복수 또한 원했었다는 건 르네 죽던 날에야 확실하게 깨닫고 인정했던 바. 발리앙이 라이네에게 다시는 해 끼치지 않도록 뿌리를 잘라버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진행해온 시간이 더 길었다.
권력 다툼이 막 나가기 시작하면 도덕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어느 정도의 도덕이 있었다.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따라서 쌍둥이가 해온 일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때를 잡아 나를 몰고 갔던 데스챔프 공작도 그때 당시 선을 넘었다. 반역은, 아니 될 일이다.
나는 라이네와 내게 해를 끼쳤던 이들이 생전에 고통스럽고 처참하고 비참하기를 바라나, 또한 그러다 전부 죽기를 바랐다.
죽어서, 도 넘은 일을 할 만한 자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막무가내로 폭주하였던 이들이 전부 죽기를 바란다.
베르덴은 내 입장에서는 죽을죄를 지은 게 아님에도, 그럼에도 죽어야 함은 동생들을 잃었다는 슬픔에 라이네를 적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 대한 미련을 오늘이 되도록 완전히 놓지 못했던 것은 일말의 미안함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베르덴은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내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마도.
그러나 그는 처형당해 죽어야 한다.
그를 위시하여 모든 직계가 죽고, 발리앙은 무너져야 한다. 가주가 죄인으로 죽는 것만큼 가문의 힘이 약해지기 쉬운 방법이 없다.
혹 베르덴이 라이네를 향한 적대감 가득한 문서를 남겨두고 와서 다음 가주가 복수할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감히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발리앙은 무너지고 힘을 잃어야 한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라이네나 되는 유서 깊은 가문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기막힌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해.
나의 라이네. 이 옥 안에서 끊임없이 반추했던 역사. 내 날개 아래 품은 수많은 생명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무게.
발리앙에게서 지키는 것은 거의 다 완성하였으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아리엘이 얌전히 죽으면 좋겠다.
에녹의 검 없이 숨이 끊어지면, 좋겠다.
그래야 한다.
사람 일은 당장 내일 일도 몰라 지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아리엘은 에녹의 검 없이 죽어야 한다. 나는 잠시 멈춰서 반쯤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끝에 아리엘이 있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딱딱한 웃음이다. 보이지 않는 모습을 떠올리며 잔잔한 콧숨을 흘렸다.
아리엘. 넌 죽어야 한다.
그게 내가 라이네 가주로서 원하는 일이고.
아리엘. 넌, 르네가 당해야 했을 비참함까지 떠안고 죽어야 한다.
그게 내가 나로서 원하는 일이다.
후자의 중요도가 전자보다 끝까지 높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저 상태로 죽어도 괜찮겠다 하는 것이다. 이제는 저 여자의 빠른 죽음이 내게 족하다.
발에 힘을 주고 몸을 되돌렸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다가 베르덴 있는 방 앞을 지날 때에는 웃음을 지웠다. 베르덴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시드니는 감옥 입구, 그러나 복도 안에 서 있었다. 내가 옷매무새, 특히 목 주변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다가가자, 그는 잠시 나를, 내 턱이나 목 즈음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숨을 옅게 들이켜고도 가만히 있더니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입은 도로 닫혔다.
잠시 후 그는 얼어붙은 것 같은 한숨을 흘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이번에는 내 눈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음?”
시드니의 손이 다가왔다. 무심결에 흠칫 몸을 긴장시키는데, 그는 심지어 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가볍게 잡고 올린 내 손을 언뜻 내려다보고 한 차례 꼭 쥐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내 손을 움직여 내 목에 닿게 만들었다. 일단 가만히 두긴 하였는데 무슨 해괴한 행동인지 모르겠다.
“경?”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의아함을 정중하게 물리친 그가 문을 열었다.
바로, 기사가 보였다. 아하. 그가 이끄는 기사들은 아니지만, 최정예 기사단 소속이 아니라고 무력을 무시할 수 있는 기사는 거의 없다. 문 앞에서 속삭여도 저들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그나마 옥 안에 있는 기사들은 내 방문을 위하여 잠시 치워둔 상태라 이렇게라도 할 수 있었을 터.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내게 인사했다. 내 뒤로 나온 시드니에게도 그리 했을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고 수십 보 걸어가며 목을 가리고 있는 손을 슬쩍슬쩍 움직였다. 목에 무슨 조치를 해야 했던 이유가 있나. 아리엘이 쥐었던 것에 문제가 생겼을까.
모퉁이를 돌아 기사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싶었을 때 멈추었다. 한적한 곳이었다. 내 옆에 와서 멈추는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옷깃 위로 멍울이 올라왔습니다.”
“아.”
잠시 살갗에서 멀어졌던 오른손이 완전히 목에 붙었다. 머쓱하게 그에게 물었다.
“심한가?”
“……예. 심합니다.”
“이런…….”
말을 흐리고 고개를 조금 돌렸다.
이런 기대하지 않은 일도 일어난다. 쓸 만한 부상이었다.
이 목을 누구에게라도 실수인 척 보이면 좋겠는데. 누가 좋을까. 살롱에 나가는 건 지나치다.
훅 한숨을 쉬고 물었다.
“해서, 용건은.”
황제에게 허락받은 방문이다. 그러나 시드니에게도 보고가 들어갔으리. 시드니가 나타났을 때부터 내게 용건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수십 걸음 걷기까지 나를 따라왔으니 심증은 더욱 굳어지고.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또 나중인가.”
“또, 상하셨습니다.”
가볍게 흐른 말이 억눌린 것처럼 들렸다. 어째서인지, 아리엘의 뼈를 부러뜨리는 걸 주저하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해냈던 조금 전이 떠올랐다.
내 몸이 낫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던 그 상황의 반복이다. 나는 내가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지 않았던 사람을 보다가 눈을 고쳐 떴다. 시렸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나와 받은 햇빛이 이제 와 잠시 버거웠다. 숨을 짧게 들이켜고 턱을 조금 더 들었다. 아, 시드니를 보는 게 이런 식으로 껄끄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보는 것 자체가 이리도 힘이 드나.
금방이라도 눈길을 거두고 싶은 것을 인내하며 버텼다.
“나는 괜찮네…….”
그 말을 하며 기척을 인지했다.
우리의 옆쪽에서 황제가 오고 있었다. 흘끔 그쪽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황제가 가까워지자 긴장이 훨씬 풀렸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놀아나지 않기 위해 항시 긴장하고 만나야 했던 분이 외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나는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는 게 이토록 기꺼울 줄이야.
“폐하.”
“공작. 경.”
알드리히는 싱글거리며 나와 시드니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작. 무언가 더 말해보게.”
“……예?”
굉장히 뜬금없는 말이다. 얼떨떨해하며 웃는데, 그가 손을 들어 자기 목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아차 했다.
“셔츠 위로 멍, 들었는데. 목소리는 또 왜 그러나.”
“…….”
“어제만 하더라도 괜찮았잖아?”
윤허를 어제 알현하며 받았으니 그 말이 옳다.
멍을 보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보이고자 하여 보인 건 아니었다. 깜박하고 손을 내려서. 나는 멋쩍어하는 척 웃으며 목을 슬쩍 가렸다. 나를 물끄러미 살피던 그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리엘 발리앙인가?”
“…….”
“그 여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걸 그냥 두었나? 공작은 괜찮고?”
“……괜찮습니다.”
나는 황제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이 시간이 지나도록 시드니가 내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조금 늦게 대답하자, 황제는 사르르 웃었다.
“원하면, 공작, 공작이 죽여도 되네. 언제라도.”
“그럴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말씀 올리고 있지만, 그녀는 제 친구입니다.”
“죽이려 달려들어도 친구라는 그 말, 들을 때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말인지는 알고 있나?”
“…….”
“이 자리라서 하는 말인데, 공작의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공작과 짐이 나눈 게 참 많잖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동요치 않고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쳤다.
그에 황제의 시선은 내 옆에 있는 시드니를 향했다. 잠깐 기사를 보던 황제는 눈길을 되돌리며 피식피식 웃었다.
“됐네. 이런 말을 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공작도 그만 말하는 게 좋겠군. 목이 더 상할 걸세.”
“저는 괜찮습니다. 어디에 행차하던 중이셨습니까?”
“공작을 만나러 왔네. 어제 깜박 잊었지 뭔가. 쥰 라이네경 서임. 겸사겸사 같이 산책도 할까 하였는데 그런 목으로 있을 줄은 몰랐네.”
“괜찮습니다.”
“아니야. 후에 하세. 복귀 기한을 미루어주려고 하니 이야기를 좀 길게 나눠야 할 것 같네.”
“죄송합니다, 폐하. 그 아이, 근시일 내로는 폐하의 기사로 복귀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이대로 정말 부수겠다고?”
“포르타경과 서임 부수는 절차에 대해 논하고 그대로 진행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런가…….”
알드리히의 반응은 자연스러웠고 덤덤했다. 그러나 특별히 기뻐하거나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들었다는 느낌이다.
사이로 바람이 번졌다. 나는 황제와 마주친 눈을 조금 접었다. 쓴 눈웃음이다. 일부러 어색하기 짝이 없게 만든.
“마음 써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쥰도 크게 기뻐할 겁니다.”
“…….”
그리고 그의 웃음이 미묘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순간, 황제는 회복했다. 빙긋 웃는 얼굴이 화사하였다.
“그래요, 그럼.”
그건 아마도 습관 때문에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십칠 년, 십팔 년 정도를 누이라 불리며 존대 받아 왔던 나나 존대해 왔던 알드리히나 서로 멈칫했다. 한두 달 듣지 않았다고 이리 어색하나. 내가 모르는 척 옅게 웃는 사이, 황제도 생그레 웃고 입을 열었다.
“그럼 며칠 내로 연락하겠네, 공작. 경은 근무 끝나고 짐을 만나고 퇴근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주실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시드니와 나는 각각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는 황제를 전송하며 난 조용히 시드니에게 말을 걸었다.
“해서 용건은.”
“…….”
“…….”
“뵙고자 왔습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예사롭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왜 만나려 했냐고 물은 건데.”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우리는 아직 황제의 행차를 눈으로 따라가는 중이었고, 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틀어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보고, 우수수 경련하며 떨어지는 숨을 쉬었다. 뜨거웠다. 눈을 잠시 감고 침을 삼켰다. 목이 젖었다.
무어라 반응해야 하는지 길을 잃었다.
또, 잃었다.
해야 할 말을 잊어버렸던 지난번의 반복이다.
애써 머릿속을 정리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시드니는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