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39화 (139/157)

00139 CHAPTER 11. 애가哀歌 =========================

진정 죽음의 위협을 느낀 것은 아니었음에도 몸은 정직했다. 잔뜩 조였던 숨길이 한순간에 뚫리는 건 퍽 아팠다.

토해낼 것처럼 기침을 이어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거 상상외로 아프다. 머리가 아찔하기까지 했다. 바깥에서 보일 모습은 결코 아닌지라, 나는 시드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숙였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기침이 잦아들기까지 한참 걸렸다.

마지막으로 앓는 소리를 길게 흘리고, 색색 밭은 숨을 쉰 뒤 얼굴을 폈다. 자세를 바로 세웠다. 시드니는 내가 몸을 추스르는 동안 두어 걸음 물러나 있었다. 소란스러운 걱정은 없었다. 나는 이편이 좋다.

짧게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고마…….”

목소리가 완전히 나가 있었다.

아리엘이 강하게 잡았어도 그 힘만으로 이렇게 된 것은 아닐 터다. 마나가 함께 움직여서 이리 되었지.

나는 입을 닫았다. 셔츠 깃으로 가려진 목을 감싸듯 하고 조금 더듬거렸다. 살갗에서 열이 느껴졌다. 시드니는 내가 말을 멈추고 나서도 잠시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죄인의 관리가 세심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평온한 어조다. 조금 전 아리엘의 팔을 부러뜨린 일은 아예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담담하게 보이고, 담담하게 들렸다.

그가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보았으나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다정한 성정 때문일까. 저 차분하게 닦여 있는 표정이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아, 그랬다. 조사의 책임을 맡는다는 건 신문도 책임을 지고 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죄인들의 신문을 위해 고문하는 것도 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책임자가 직접 고문하는 일은 없겠으나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조사를 맡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드니를 낙마시키려는 페레즈 백작을 막았는데, 내가 무얼 밀어붙인 건지 이제야 인지할 수 있었다.

이런 건 나 같이 사람의 피와 끔찍한 모습이 익숙해진 이가 해야 했을 일이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손을 쓰는 게 얼마나 끔찍한 감상을 남기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창살 너머의 아리엘을 보았다.

그녀는 부러진 팔을 가지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울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시드니를 힐끔 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갔었는지 그도 아리엘을 보고 있었다. 어스름이 진 쪽빛, 자색, 흑색 섞인 저 눈이 이 순간 몹시도 어둡게 느껴졌다. 선명하고 날카롭지만 탁하고 흐리다.

내 느낌에 불과하리.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

시드니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기에 그가 나를 보기 전에 다시금 아리엘을 보았다.

설 수 없는 아리엘과 다시 눈높이를 맞추고자 하여, 또 몸을 굽히고 앉았다. 이미 붉은 녹이 많이 묻어 있는 손이다. 철창을 잡았다. 내려앉는 기사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죄인을 불렀다.

“아리엘.”

“어흐흐흑. 아으.”

제대로 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녀의 주의를 억지로 잡아 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나는 옅은 숨을 내쉬고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아직도 쉬어 있는 음성이지만 최대한 밟아 눌렀다.

“아리엘. 입을 조심해요. 당신 오라비를 끝까지 지켜야지. 당신을 지키려 그 사람이 무얼 희생했는데.”

희생?

아니다.

베르덴은 희생한 게 아니라 선택한 것이다. 일찍이 살려 제지하든가, 산 채로 멈추게 할 수 없었다면 죽여 제지하여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동생들을 도와 나를 처리하는 방법도 있었다. 선택지는 많았다. 그러나 그는 입 다물기를 선택했고, 아마도 동생들이 언젠가는 잠잠해지리라 믿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건 믿음을 가장한 외면임을 몰랐을 테고, 결국 부친이 자식에게 죽임당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나고, 그리고, 일은 여기까지 진행되어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베르덴의 어리석음이 아주 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말했잖은가, 이해한다고.

적어도 그는 나보다는 덜 어리석었다. 나는 하지 말아야 했을 일, 인즉 사람을 믿는 일을 하다가

최대한 가문과 가족 양쪽 전부를 지키려 한 노력은 잘한 일이었다. 나라도 그리 했을걸. 그 노력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까 베르덴에게 마지막으로 말한 것처럼, 그는 하나를 버려야 했었으나 버릴 때를 놓쳤다. 르네를 조금 더 일찍, 알드리히의 협박 없이 죽였으면 그에게는 좋았을 것이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르네를 잃은 것은 매한가지라 그때도 내 속에서는 불이 일겠지만.

쓰다. 나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리고 이만 일어나려는데, 아리엘이 눈물 얼룩진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부러진 팔을 매만지지도 못하고 환부 주변 허공만 더듬거리던 손도 우뚝 멈추었다.

그녀가 울먹였다.

“이입, 조심?”

“…….”

“오라버니가 르네를 주, 죽인 거요?”

……그러니까, 입, 조심하라고 했는데…….

바로 앞에 신문 책임자를 두고 그런 말을 하면 어찌하나.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창살에서 뗀 손으로 시드니의 손목을 잡았다. 시드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경은 물러나 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시드니는 순순히 대답했다.

놀라운 증언을 들었다는 반응이 아니었다. 내 시야에서 곧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알고 있었나. 속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배신감, 의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를 믿는다. 사전에 알았다면 막지 않았을 리 없다. 일이 일어난 후에 알게 되었겠지.

사람을 믿다 망해놓고도 여전한 믿음을 새삼스럽게 인지하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래서, 내가 베르덴보다 더 미련하고 어리석다 하는 것이다.

아리엘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리엘이 이렇게 머리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이 떨어질 정도로 고통스럽든지, 그 정도로 베르덴을 향한 원망이 크든지. 혹은 발리앙이 망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 중 무엇이 진실이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그렇게, 으흐흑, 그렇게, 상냥한 척하지 말아요. 속 좋은 척하지 말아요.”

“그리고. 아리엘. 이제는 나를 죽여도 당신은 폐하 곁에 설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황후나 비가 될 일은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내가……. 당신 때문에 르네가……. 너 때문에 르네가 죽었어. 알아?”

“……이런. 그게 어째서 나 때문입니까?”

오돌토돌한 바닥에 누워 끌려가는 것 같은 목소리 정도로 회복되었다. 중간중간 숨이 새어나가며 길을 이탈하는 부분도 있었지마는.

느릿느릿 목소리를 눌러가며 묻자, 아리엘은 다친 팔을 굽힌 채로 숨을 헐떡였다. 눈빛이 시퍼렇게 살아났다. 이제 악만 남은 듯했다. 내게 제압당하여 목에 칼이 들어가기 직전, 자객이 보이던 눈빛이 겹쳐 보였다.

모든 원망을 내게 돌리고 싶어하는 죄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나는 가만히 물었다.

“아리엘. 르네가 나와 베르덴을 죽인 후에는 당신을 죽이려 했던 걸 압니까?”

씨근덕거리는 숨이 약간 작아졌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미소했다.

“예. 승계가 그렇게 되지요. 당신 아버지, 베르덴, 당신, 르네.”

“무슨 소리야.”

“르네가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당신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까?”

“…….”

“르네가 당신 아버지를 죽인 것은, 압니까?”

“……어?”

“지금 당신 오라비가,”

말을 멈추었다. 목이 아팠다. 목소리는 더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약한 통증 때문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침을 삼키고 이었다.

“르네의 독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압니까?”

너는, 아리엘, 너는, 그토록 사랑하고 믿고 있는 르네에 대해 크게 흔들리고 죽어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부정하고 부정하다가 죽길 바란다. 믿음이 갈가리 부서진 후에 죽으면 더더욱 좋다.

힘겹게 고개를 떨고, 흔들고, 부정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꼼꼼하게 살폈다. 잊지 말아야 할 광경이므로. 저 성하지 않은 몸, 저 눈물, 살 썩는 냄새, 고통에 잠긴 목소리, 공기, 그림자, 죄인의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날 죽이려 한 선택.

“…….”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쩡하는 통증이 왔다가 물러났다. 피가 도는 느낌이다. 무릎 위를 한 번 주무르고 허리를 세웠다.

불신자도 저런 고신을 받다 보면 신을 찾게 될 것이다. 마법사인 아리엘이 이 감옥에서 절실하게 신을 찾게 된다면, 신께서 에녹의 검을 주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문을 황제에게 맡기긴 하였으나, 내가 요구하면 아리엘을 죽일 수 있다. 그녀가 살의를 가지고 나를 찌른 이래, 생사는 내게 달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친구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또한 그녀가 고통받기를 바랐다.

르네에게 내가 주지 못한 몫까지 충분하게 당하기를 바랐다.

세상에 드러나는 나를 보호하며 아리엘에게 고문과 병행하는 신문을 받게 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황제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어 이리 맡겼지마는, 그건 아리엘이 에녹의 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한 선택이었다.

“…….”

이 사람이 고문을 극한까지 받아도 설마 내게 족하겠느냐마는, 저 상태의 몸이라면 이대로 죽어도 내가 억울해지지는 않겠다.

이제는 어떤 결정이 빠르게 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리엘을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걸으며 왼손에 몰아 쥐고 있던 장갑을 착용했다. 이대로 우리의 만남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저 여자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날 일은 없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아리엘이 내 뒤에 대고 아득바득 소리칠 때까지 그러했다.

“쥰……! 쥰 라이네가……!”

멈췄다. 턱을 들고,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당신 때문에!”

나는 태연하게 돌아섰다. 다시 아리엘이 갇힌 방까지 가는 동안, 그녀는 악을 쏟아냈다.

“벼……, 병신이 된 건 당신 때문이에요. 알아요?”

“…….”

익숙지 않은 단어 쓰느라 고생이 많다. 문을 단단히 잠가둔 자물쇠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은 아리엘이 억지로 방긋 웃었다.

“왜요. 들어오게? 들어와서 나 죽이게?”

“…….”

“죽일 수, 있지?”

“아.”

외마디 소리를 뱉고 나는 상냥하게 폭 웃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합니까?”

내 가출은 헤르조, 베르덴과 유력한 가주들 밖에 알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헤르조와 베르덴에게 비밀로 해줄 것을 약속받았지만, 르네와 친했던 헤르조가 나와 자주 함께 했던 여행을 르네에게 말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르네가 이끌어왔던 계획에서는 내가 칼을 쓸 수 있다는 걸 드러내려 했던 일이 없어서, 아마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는 있다.

고개를 가볍게 돌리고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나만 넣어두었으니만큼 물건은 바로 잡혔다. 어제 황제가 선물이라며 주었던 열쇠는 자물쇠에 딱 맞았다. 철컥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린 자물쇠를 창살에 걸어두고 문을 열었다.

나는 열린 문 앞에 서서 다시 물었다.

“말해봐요. 아리엘. 내가 왜, 어떻게 당신을 죽이려 하겠습니까?”

“……흐으.”

피차 거칠게 갈린 목소리로 묻고 신음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안으로 한 걸음 디디자 아리엘의 눈이 흠칫 커졌다. 아래턱을 바르르 떨면서도 그녀는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혔다.

완전히 깨부수어진 두 다리가 기괴하게 덜렁거렸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굽히는 척을 했다. 아리엘이 다시금 놀랐다. 긴장으로 굳은 어깨와 얼굴이 보였다.

“정말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내가 왜.”

“그런데도 입을 닥치지 않네요.”

내가 피식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아리엘의 부러진 팔을 들고, 그녀의 입을 막았다. 부러진 부분을 눌렀다. 막은 손안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새어나갔다. 나는 그대로 밀어서 의자를 벽에 붙였다. 그러자 입을 막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허리를 굽혔다. 상냥하게 속삭였다.

“내가 널 죽이지 못해 안 죽이는 게 아니야.”

“아읍!”

꺾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굳어버린 몸과 멈춘 숨을 느끼며 부드럽게 웃었다.

“항상 그랬지.”

내가 기억을 되찾자마자 텔레포트하여 아리엘을 죽이고 나오는 방법도 있었고, 르네를 알고나서도 바로 그리할 수 있었다. 발리앙 저택에 텔레포트로 침입해서 무력 전무한 두 사람을 죽이는 것쯤은 별것 아니었다.

그러나 발리앙을 꺾어놓아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아는 흐름으로 바비에르의 소문 등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일을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그때 이미 내게는, 적어도 나 당한 만큼 너희도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하고 비참해져 보아야 한다는 복수심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래도 그 복수심, 외면하고자 하였던 때.

그때 이들이 얌전히 숨죽였다면 나는 아주 조금 더 너그러울 수도 있었다.

“아리엘 발리앙. 너는 황후가 될 수도 있었다. 날 질시하고 죽이려 할 것이 아니라 내게 협력을 구했다면. 나는 널 상당히 귀애했거든.”

“아으, 으, 으으.”

거짓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너그러울 수는 없었다. 위험성을 가진 이를 내 윗전에 올려둘 수는 없노라.

꺾은 손을 아주 천천히 밀어붙였다. 엄지로 살살 쓰다듬으며 계속. 계속.

계속.

“네가 널 멸망케 했고 르네가 널 멸망케 했다. 감히 내게 화살을 돌리지 마라. 내 손으로 너흴 죽이지 않으려 하는 내 속을 생각해봐. 르네를 그리 허망하게 잃었을 때의 내 심정도 좀, 생각을 해봐.”

우두둑. 완전히 뒤로 꺾여서 접혀 들어갔다.

고통으로 초점 흐려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전조도 없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이었다. 장갑이 불쾌하게 젖어 들어갔다. 나는 웃는 얼굴로 눈을 찡그리고 짧게 한숨 쉬었다.

“울지 마. 남은 죽이려고 들었으면서 이것도 못 참으면 어찌해. 내 마음이 다 아프군.”

“꺼으. 끄.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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