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36화 (136/157)

00136 CHAPTER 11. 애가哀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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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이른 아침, 아리엘이 시드니에게 넘어갔다.

나는 3층에서도 현관이 보이는 창가에 서서, 아리엘이 라이네의 마차에 올라 떠나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내내 아무 생각도 없었다. 든 감상이라곤 ‘아, 네가 가는구나,’ 하는 정도였던가.

다쳤던 장기에 남아있던 피로는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갔다. 어제는 종종 고통스럽더니 오늘은 어제보다 나았다. 덕분인지, 내가 공격받은 이후 쥰이 한 번도 산책을 나가지 않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재활운동은 꾸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방을 경계하며 쥰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산책은 오늘도 내 신경줄이 견디지 못할 것 같더라.

산책하는 중에 공격이 있었으니만큼 쥰에게 홀로 밖에 나가 산책하는 것을 허락하는 건 어려웠다. 기사를 뒤에 두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 두고 산책하는 건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쥰이 거절하였다.

아이는, 제 재활을 위한 산책에서 내가 부상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괜찮다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쥰은 어여쁘게 웃으며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하였다.

“회복하고자 노력했지만, 회복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각오했었으니까요. 누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몸이 되어도, 설령 죽어도 좋았습니다.”

반사적으로 입가를 움찔거려 웃음을 떠올렸으나, 곧바로 떠내려 보냈다. 아니지. 웃을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숨이 턱 막혔다. 숨길에 바위 하나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쥰과 대화하고 있으면 자주 이리 숨 막힌다.

아이가 만지고 있는 내 손을 슬며시 빼내었다. 쥰에 이어 내가 의식을 잃었다가 일어난 후, 쥰이 무릎 꿇고 모든 걸 설명하였던 것을 빼면 우리는 이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다, 쥰.

-복귀가 불가능하게 될 것도 처음부터 각오하였을 겁니다.

그 냉정한 설명이 사실이면 어떻게 해.

누굴 돕는다는 것에 생명을 바칠 정도로 헌신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공감하기 어려웠다. 누굴 사랑하면 이렇게 되나? 사랑하면, 이럴 수도 있게 되는 건가? 얼마나 사랑해야 이럴 수가 있나.

쥰에게 손을 내주기 위해 앞으로 내밀고 있었던 상체를 뒤로 기댔다. 허벅지 위로 떨어진 손이 자연스럽게 구부러졌다. 내 손을 잃은 쥰은 테이블 위에 여전히 두 손을 올린 채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제 육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누님께 그렇게 피해를 드리게 될 줄은 생각 못 했습니다.”

“피해?”

“……누님께서 저 대신 찔리시게 된 것.”

“그게 어째서 네가 내게 입힌 피해지?”

눈을 찡그리고 못마땅해하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웃되, 진실로 웃는 게 아니던 쥰이 나를 보았다. 더듬거리는 것처럼 내 얼굴을 살피고 살피던 쥰이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움직였다. 내 몸 추스르며 상황을 살피는 데에 바빠 여태 쥰이 이번 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건 아리엘이, 필르 발리앙이 저지른 일이야. 그게 왜 네 상태와 연결되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제가 전과 같았다면 능히 그 여자를 제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전과 같았다면, 누님이 저를 지키시다 부상할 일도 없었을 테고요.”

“하나 물어보자.”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말하는 도중 웃음을 잃기 시작하여 방금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진 쥰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배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를 우러르고 나를 지키고 내 선택에 따라서는 나를 위해 희생할 수도 있는 내 사람들, 특히 나의 기사들.”

“…….”

“킨들 라이네 토벌 중 그들이 하마터면 다칠 뻔한 걸 밀어내고 내가 대신 다쳤으면, 그건 그들이 내게 잘못한 일이야? 아니면 애초에 내 기사들을 공격했던 괴물들 잘못이야?”

“…….”

“내게 자객이 들었다 치자. 마침 보고하러 왔던 할리가 나와 함께 자객을 상대하다가 다칠 뻔했다고도 해 보자. 나는 할리를 구했지만 대신 다쳤어. 그건 할리 탓이야, 자객 탓이야?”

다물린 입술이 일견 고집스럽게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일까. 나와 전혀 다른 파란 눈동자가 움직임 없이 나를 보고 있다가, 내 웃음 모양이 더 진해지자 확 깨어났다. 막 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해 하는 아기처럼 쥰의 표정이 흔들렸다.

나는 한숨 쉬듯 웃었다.

“뭐. 그래, 애초에 너나 그 기사들이나 할리가 방심하면 안 되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내게도 방심했다는 잘못이 생기는 거지.”

“아닙니다. 저희는 항시 방심해서는 안 되는 무인이고, 누님은 아니십니다. 방심했다는 죄는 저희의 죄입니다.”

등받이에서 몸을 떼었다.

손을 뻗어 이번에는 내가 아이의 손등을 덮었다. 나를 향한 감정을 토해낼 때는 내 호흡을 흐트러트리더니, 이런 대화로 들어가면 귀엽고 기특하다.

시드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난 밤, 오늘 새벽, 아침, 이 오후까지의 시간이 잠시 잊혔다. 나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 말대로다. 그래서 내 죄이기도 해.”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버지께서 내 가출을 요양으로 포장해주셨으니 정보력 약한 중소귀족들은 날 의심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은 달랐다. 툭하면 가출을 나가 전국을 여행했던 나의 무력을 의심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을 터. 나는 항상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거든. 그러나 내가 계속 천연덕스럽게 숨길 수 있는 건, 용병들이 있는 덕분이었다. 평민들이 불가피한 여행을 하게 될 때 용병을 호위 삼아 고용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기에.

그러니 내가 에둘러 이리 말하면 쥰은 추측해낼 수 있다.

가만히 있던 쥰의 눈에 어느 순간 약간 힘이 들어가는가 싶었다. 직후 그는 제 손을 덮은 내 손을 보았다. 글쎄. 느껴지는 것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마냥 보드랍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다독이듯 아이의 손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기사들이 나를 지키는 것보다 더, 나는 그들을 더 지켜야 해.”

“…….”

“나는 라이네 영지민들을 통치하며 지켜야 하고. 지키는 건 권리이자 의무란다. 너는 알고 있을 거야.”

“…….”

“그런데 내가 지킬 사람 중 너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래서 그때, 반쯤은 머리가 마비되어서, 음, 그래, 반쯤은 본능으로 널 물러나게 했어. 널 잃을 수는 없어서. 또다시 나 때문에, 나를 위해 네가 다치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거든.”

나비 날갯짓처럼 살랑, 살랑,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손을 멈추었다.

톡, 닿았다. 아직 살아 움직이고는 있으나 시한부가 되었으니 이미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도, 쥰의 모친에 의한 것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음에도 끝끝내 사랑하였던 내 동생.

“물론 내 목숨은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다. 내가 죽느니 내 사람을 희생시켜서 살아남는 게 라이네를 위해서는 더 좋아. 대체로 그래. 그래서 내 생사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반드시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선택해야 할 테고.”

“…….”

“그럼에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어느 상황에, 머리가 마비되는 일이 있더군. 어쩌면 미련한 선택이었지. 만일 내가 그대로 죽었다면 역대 최고로 미련하게 죽은 라이네 공작이 되지 않았을까.”

웃기 위해 늘린 입술. 잠깐 아랫입술을 물었다.

찔리면 반드시 죽는다는 확신이 있고 내게 조금만 더 판단의 여유가 있었다면 나는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쥰이 찔리도록 했겠지. 내가 죽는 게 싫기 때문이 아니라, 라이네 공작의 거듭된 교체는 라이네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가문의 이름값에도, 명예에도, 라이네 날개 하에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도.

나는 곧 라이네이지만, 내 목숨이 항상 라이네에 앞서는 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라이네에 항상 앞서는 건 아니다.

가치의 순서는 언제나 명백했다.

굳이 이번 습격에서 쥰을 보호한 내게 잘못이 있다면, 쥰을 구하고자 움직였던 그것은 앞뒤 상황 살피고 나서 이성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다. 대신 다친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이 정도 자기 위로는 괜찮지 않은가.

어제 기어이 인정하고 말았듯, 나도 감정이 있으므로.

입을 열어 깊은 한숨을 쉬고 미소했다.

“쥰. 아가야. 이번 습격에서 너는 잘못한 게 없어.”

“…….”

“자책하지 마라. 네 자책은 널 구하고자 했던 내 그 판단이 틀렸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고,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하는 동생에게 비난받고 싶지 않아. 슬퍼지거든.”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그저 올려두기만 했던 손에 힘을 주어 쥰의 손 하나를 꽉 잡았다가 놓았다. 티타임은 끝이다. 점심 식사시간을 포함하여 벌써 넉넉히 두 시간 정도를 쉬었다. 내 수면 시간이 짧지 않았다면 곤란했을 정도로 쉰 것이다.

손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선 나를 따라 일어서려 하는 아이의 어깨를 눌렀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몸을 숙였다.

“완치될 거다. 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염려 말고, 마음 편히 회복에 집중하면 된다. ……기사단은 내 어떻게든 해 보마.”

“……예?”

도중부터 말이 없었던 쥰이 반문했다.

시드니는 어제, 나만큼이나 쥰을 잘 아는 것처럼 내게 물은 바 있었다. 쥰이 이 청탁을 원하는지 아닌지는 물어보았느냐고. 그에 내심 대답하기를, 쥰이 원할 리가 없지 않겠느냐고 했었지.

그건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내가 개입하는 것을 쥰이 원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옆에서 보아왔던 쥰은 순진한 구석이 있으며, 내가 저를 위해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것에 기함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여 이는 반쯤은 아이를 떠보는 것이고, 반쯤은 내가 무리하게 주는 기회였다. ‘기사단에 손을 써줄까?’라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테니까.

어제 시드니가 내 부탁을 물리치는 것과 동시에 내 기대도 꺾였었지만, 쥰이 원한다면 황제에게 찾아가서라도 서임을 유지하도록 해보리. 황제가 선뜻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를 협박할 심산이므로, 그렇게 되면 황제와의 감정이 더 상하겠으나.

쥰을 내려다보는 눈을 잠시 가늘게 했다가 회복했다.

한참 나를 올려다보던 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동요한 적 없다는 것처럼 명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기껍다. 그는 신중하게 물었다.

“누님께 그게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

나는 눈을 고쳐 떴다.

초점이 갑작스럽게 흔들렸기에, 고개를 들고 앞을 보며 눈을 깜박여야 했다. 단칼에 거절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무어야. 쥰의 어깨 위에 가만히 놓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나치게 신중한 질문이었다.

지나치게.

내게 도움 될 걸 생각하다 육신마저 망친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딱딱, 위아래 이가 부딪혔다. 나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더 굽혔다. 그리고 두 팔로 아이를 껴안았다. 옷과 옷이 부딪히고, 포말 부서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나는 그를 안은 채로 더 몸을 낮추었다.

낮추고 낮추어, 바닥에 무릎을 댈 정도로 낮추었다.

내게 허리를 구부리는 쥰을 안고 힘을 주었다. 아가야. 쥰. 날 살해한 자의 자식. 그래도 놓을 수 없어 사랑한 내 동생. 코로 숨을 들이켰다. 입을 벌렸다. 축축한 숨이 흩어졌다.

내 등에 와 닿는 떨리는 손을 느끼며 속삭였다.

“쥰.”

“예…….”

“혹시 폐하의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니?”

내 목덜미에 느껴지는 숨이 흔들렸다. 이야말로 동요로 하는 긍정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천장 모서리를 의미 없이 바라보며 나는 눈을 일그러트렸다.

쥰은 금세 숨결을 정돈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수많은 거짓을 상대해야 한다. 너에게서마저 거짓을 경계하고 싶지 않아.”

“…….”

“다시 물으마. 폐하의 기사가 되도록 혹시 누군가가 종용하였어?”

“…….”

“아니면, 복무하는 도중에 마음이 변하여 싫어진 거야?”

“…….”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까. 잠시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아버지께서.”

부러 거기서 끊었는데, 쥰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더 끌어안긴 나는 슬며시 눈꺼풀을 반쯤 내리감았다. ……그래. 그렇구나.

“널 강요하셨어?”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부정하던 쥰을 풀었다.

그리고 떨어지려 했는데, 나를 마주 안은 팔은 풀리지가 않았을뿐더러 외려 더 힘이 들어갔다가 머뭇머뭇 풀어지기를 반복하기 시작해서, 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이를 부르려던 입이 다물린 건, 쥰이 억눌린 음성으로 속삭인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갑작스러운 사과가 나를 당황케 했다.

쥰의 표정을 보고자 하여 다시금 몸에 힘을 주었다. 쥰은 이번에는 나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젖어있지는 않지만 젖어있다 해도 믿을 것만 같은 얼굴이다. 무엇에 한 사과일까. 묘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쥰이 입을 열었다.

“전 공작 각하를 이런 식으로 탓하는 것처럼.”

“…….”

“……욕되게 하려.”

“…….”

적당한 말을 고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낮게 웃었다.

“괜찮아.”

“…….”

“아버지께서 네게 무어라 하셨던 건지 말해주면 좋겠다. 이건 네가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도 아니고, 탓하는 것도 아니야. 내가 물어서 너는 대답을 한 것뿐이다. 편히 해.”

쥰의 두 손을 끌어와 잡았다. 무릎이 조금 아리기 시작하였지만 외면하였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을 것이다. 이 분위기를 되도록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번 시간의 에본느 라이네로 태어나 이렇게까지 몸을 낮추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일이 한 번이나 있었을까. 공작이 되었으면 더더욱 없어야 할 일이었으나, 이 순간 거리낌은 없었다.

이 나이의 청년을 이렇게 아이 달래듯 하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지.

물끄러미 쥰을 보고 있자, 쥰은 마른 한숨을 장작 타는 것처럼 후드득 흘렸다.

“제가 황제 폐하의 기사가 된다면, 그건 상당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니까…….”

“…….”

“당시, 저는 라이네 방계가 아닌 직계……,처럼 여겨졌었고, 그런 제가 황제의 기사가 되면 라이네가 황실에 충성한다는 게 더 잘 보일 테니 장차 황제 폐하께서는 누님께 더더욱 호의를 허락하실, 거라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

“혹 그게 아니더라도 제가 기사가 되는 건 어떻게든 누님께 도움이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리고 폐하의 기사가 되지 않으면 제가 후계자 위를 탐낸다는 시선이 생기리라고도 들었습니다. 그때 누님께서는 요양을 자주 다니셔야 할 정도로 몸이 약하다는 인식이 있었고……. 저 개인적으로도, 누님께서 제게 틈나는 대로 교육을 해주시니 아무래도 누님께서…….”

“후계자가 될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중간중간 눈을 찌푸려가며 어렵게 이어가는 설명의 끝. 문득 입을 열어 내가 먼저 잇고 말았다.

쥰은 뻐끔거리던 입을 마침내 완전히 다물었고, 나는 웃었다.

울지 못해 웃었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는 아예 드러내놓고 후계자 될 생각 없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었지.”

내가 아버지를 떠밀고, 아버지는 쥰을 떠미셨구나.

그리고 아무래도 내가 나 후계자 될 마음 없다고 쥰에게 이야기하기 전부터 이 아이는 그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인고로, 나는 오래전부터 쥰도 떠밀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었다.

……나도 모르는 새 쥰에게 큰 짐을 지게 했다.

미래, 장래, 원하는 것, 긴 시간 전부 버리게 만들었다, 내가. 이렇게 쥰이 복귀를 논의해야 할 일이 없었다면 나는 계속 몰랐으리. 전에도 모르고 죽었는걸. 하고 싶은 일을 내 무능한 처리 때문에 못 하게 되었다고 미안해했었는데.

잠깐 쥰에게서 눈을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위아래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눈도 꽉 감았다. 하나로 묶은 머리채가 내려와 턱을 건드렸다. 못난 표정일 것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안다. 나는 말아 넣은 입으로 꾹꾹 입꼬리를 늘려 소리 없이 웃었다. 입 열면 터져 나올 숨이 얼마나 날갯짓처럼 파드득거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 갑작스러운 통탄을 가라앉히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다가 아버지를 살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었으니 그 마음은 또 얼마나. 내게 도움이 될까 하여 기사가 되었는데, 오히려 살해 의혹을 받았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너는, 얼마나, 아가야.

감정을 조절하기가 며칠 전부터 이토록 힘들다. 르네를 잃은 이후 제정신을 차렸지만, 그래도 어디 한 구석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불쑥 나타나는 이 후유증.

진하게 끓는 속이 뜨겁고, 또 어느 한 편으로는 차가웠다.

나는 결국 고개를 더 숙여 아이의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내가, 너, 잘 살았는지라도 알아야겠다. 쥰. 네가 거기서, 건강하게 살아 남았는지라도 알아야겠어. 이후라도 네가 행복하였는지, 알아야겠어.

그래야 내가 더 미치지는 않을 것 같다…….

마른 입술을 열었다.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목이 저린 한숨이 훅 흘러나왔다. 성대가 긁힌 듯했다. 쥰의 손가락 끄트머리에 부딪힌 내 숨결이 내게 되돌아 왔다. 그러나 내가 무어라 말하기 전 쥰이 덧붙였다.

“기사가 되고 싶지 않으면 일찍이 혼인을 하여 나가는 방법도 있다 하셨지만 누님을 떠나는 건……, 안 돼서. 그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내 손끝에 걸려 있는 쥰의 손이 차가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원하는 것도 버릴 정도로 한결같은 이 애정이 내게 벅찼다. 또다시 숨이 막힌다. 그리고, 쥰을 앞에 둔 이 순간, 날 숨 막히게 하였던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어서, 쥰을 향한 죄책감과 어떤 깨달음에 몸이 젖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종종 숨 막혀 했던 게 어쩌면…….

애써 입을 움직였다.

“폐하의 기사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게 있어?”

고개를 내린 채로 나직하게 물었다.

사방에 햇빛 굵은 오후의 정적이 내렸다. 턱 옆에 내린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손안의 마디 굵은 손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걸 느끼며 기다렸다.

크게 몸을 떤 바로 직후, 쥰은 입을 열었다.

“누님의, 기사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쥰은 성치 않은 다리로 의자에서 내려와 나를 안았다. 내게 안겼다. 쥰이 나를 먼저 안은 건 아마도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금은 얼떨떨하게 쥰을 받아안는데, 그가 말을 완성했다.

“누님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귀 옆에서 마친 말을 듣고 침을 삼켰다. 울 수 없다. 나는 쥰의 등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래.”

기회를 주어도 나였다.

쥰은, 또, 당연하다는 듯, 나였다.

============================ 작품 후기 ============================

기막힌인연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D

에본느바라기인 쥰이 황제의 기사가 되었던 이유......<<

시드니는, 뭐랄까, 에브가 안전해질 때까지 물러나서 참아왔고. 이미 다가가기 시작했고....... 뭐랄까, 정말 뭐랄까. 알고보면 에브가 어느 부분에서는 더 직진할지도 모르고....... 끄아앙.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염려마십시오(진지)

아마 60-70편 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지만, 가면꽃 작가님은 핑크핑크달달한 해피엔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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