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35화 (135/157)

00135 CHAPTER 11. 애가哀歌 =========================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이번 시간은 아니더라도, 전에 그가 쥰을 얼마나 다정하게 보살피고 가르쳤는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각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사죄는 제가 각하의 의지에 반한 부분에 관해서입니까, 가주들과 사전 협의 없이 대귀족의 위상을 흔든 부분에 한해서입니까.”

“두 부분 다일세.”

“전자에 관해서는 제가 사죄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눈동자를 조이고 있는 눈꺼풀 가장자리에 힘이 진하게 들어갔다. 눈 표면이 마른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턱을 들며 헛웃음을 부수었다. 그리고 헛헛하게 몇 번 더 웃으며 턱을 다시 당겼다.

“경.”

“설령 각하의 온전한 자의로 발리앙을 보호하고자 하셨다 하더라도 저는 사죄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어찌 되었든 오늘, 발리앙을 반드시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있는 사실만을 말해준다는 것처럼 건조한 어조였다.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누이를 위해 가문도 건 포르타경이 그들을 가만히 두었을 것 같습니까?

-예.

상황이 이리되지만 않았어도 그가 잠잠히 나를 기다렸을 것이라 믿었다.

내가 황제에게 선뜻 대답할 수 있었던 그 믿음이 지금 부정당하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폭발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헛웃음을 웃다가 실낱같은 한숨과 함께 표정을 지웠다. 잠잠해졌다. 동요하였으나 폭풍 같은 동요는 아니었다. 여우비처럼 잠시 흔들리고 가라앉은 마음 구석, 어딘가에는 명치가 빈 것 같은 허탈감이 생겼지만, 르네를 빼앗겼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기가 작았다.

왜냐하면.

부정 당했음에도 믿음이 지워지지 않아서.

“후자에 관하여는 다른 가문에 보상하며 라이네에도 보상하겠습니다. 그에 대한 협의는 추후 각하께서,”

“…….”

“……통증 없이 장시간 앉아계실 수 있을 만큼 회복되시면 포르타 저택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건강이 어떠하냐는 간단한 물음도 도중에 그만두었던 얼마 전과 비교가 된다.

손을 달라 하며 걱정을 표현하던 청년과 겹쳐 보인다면, 그건 내 어리석은 그리움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의식적으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 움직일 때 느끼는 통증을 눈치챈 시드니의 눈썰미에 괜스레 감탄했다. 일부러 상기한 그 감탄이 물안개처럼 물씬 올라오는 기억들을 억눌렀다. 약식으로 고개를 숙여보이고 나를 지나쳐가려는 그의 앞에 오른팔을 뻗었다.

가로막힌 그의 상의가 내 장갑에 스쳤다가 물러났다.

시드니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가로막힌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왜.”

슬며시 터져 나온 목소리는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잠겨 있었다.

이 질문. 시드니가 꼬리를 잡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질문이다. 기요트 변경 백작에게는 선뜻 물을 수 있었던 ‘어찌하여 발리앙을 적대하나. 발리앙에 유감이 있나.’ 의문을 여태 이 사람에게 묻지 않았던 건, 시드니에게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의 기억을 내게 말할 여지도, 내 기억을 들을 여지도.

나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서로에게 토설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묻지 않으면 이상하리.

아끼는 수하를 위한 게 아니었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럼 무엇을 위해 황제에게 말을 올리기까지 하려는 거냐고 묻지 않으면, 그건, 이상할 것이다. 많은 걸 경계해야 하는 가주는 이를 마땅히 물어야 했다.

나는, 마땅히 물어야 했다.

“쥰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무슨 까닭으로 폐하께 말씀 올리겠다고 하였나.”

여기서 그쳐도 되었다. 그를 막고 있는 손이 일순 바들 흔들렸다.

그러나 여기까지 물었는데 더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 질문이 저 질문과 비슷하고, 저 질문이 그 뒤의 질문과 계속하여 비슷하므로.

하여 모래에 잠긴 것만 같이 아프게 잠긴 음성으로 계속 물었다.

“왜 오늘, 발리앙을 그리 무너뜨리려 했나.”

“…….”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나.”

“…….”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도는 있었어?”

그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기요트는 안전했으리라고 변경백이 단언하더군. 위험했던 건 포르타뿐이었다고. 그것도 내가 구해냈으니 괜찮으리라 말했네. 그걸 듣고도, 경, 그걸 듣고도 더는 내 알 바 아니니 모르는 척하려 했는데, 내가 모르는 척을 한다고 사실이 바뀌나? 오늘 경은 포르타를 걸고 미친 짓을 했네. 포르타를 발리앙과 함께 진창에 버리려 했어. 알아?”

“압니다.”

단정한 대답이 들렸다.

내내 내 눈길과 맞닿아 있던 그의 어두운색 눈동자가 조금 더 밑으로, 그리고 옆으로 향했다. 그를 막고 있는 내 손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면 후에 하고 싶습니다.”

“왜. 내 몸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예.”

비꼬듯 물었지만,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건강은 가주된 사람의 자존심이다. 회담에 자리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픈 상태인 건 결코 자랑이 아니며. 그걸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나를 건드리고 있었다. 기분이 크게 상한 건 아니었으나 나는 기막혀 하는 것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례하군, 경. 나는 피로하다 했지, 아프다 한 적이 없어. 필요하다면 대담을 지속할 수 있네.”

내 손, 혹은 그 너머 바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눈은 다시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드니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지금과 비슷한 상태로 계시다 한 달 반 만에 나타나셨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글쎄…….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건 기억하네.”

거짓을 대답한 게 아니라, 정말 기억에 없었다.

부정한 직후 성대를 살살 긁고 지나가는 연한 기침을 한 번 토해냈다. 기침 끄트머리에서 내 원래 목소리가 돌아온 게 들린 듯도 하였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제야 상기한 기억이 있었다. 불쑥 떠올랐다.

티테이블에 마주 앉은 우리 두 사람.

“…….”

눈을 감았다 떴다.

당신과 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편해진다고 했었나. 내가? 내가 하였던 말, 그가 하였던 말이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노을이 다 꺼져가는 하늘, 주홍색, 물에 젖은 푸른색, 그 어둑한 시간에 마주 앉아서 내가…….

시한부를 선고받았던 내가 말했었다.

-쉬면 된대.

……그런가.

그를 멈춰 세우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렇구나. 그때, 한 달 반 만에. 내가 한 달 반 만에 나타났었구나.

막연한 허탈함이 솟았다. 그는 나보다도 내 과거를 더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신전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 신전에서의 만남이 오래전에도 있었던 것을 나는 뒤늦게 떠올린 것과 다르게,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신전에 왔을 만큼 내 지나가는 말마저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내가 기억을 되찾은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 시드니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확신을 차분하게 내게 말하는 그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갈피를 잃고 입을 다물었다.

시드니가 원하는 것은 공유한 기억의 공감뿐인가. 아니면 기억의 공감과 관계의 개선인가.

기억의 공유와 공감이라면 나는 기꺼이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은 곧 끝이 나며, 우리가 함께 겪어온 과거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은 내 약점이 되지 못하므로.

……그럼, 기억을, 인정할까.

내가 대답한 이후 나와 마찬가지로 침묵하던 시드니가 입을 연 건 바로 그때였다.

“오늘은 각하께서 저택에 연금되셨던 날입니다.”

그의 어깨 즈음까지 내려가 있던 내 시선이 올라갔다.

보고 있던 내 손을 잃은 그의 눈길은 거의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다물었던 입술을 혀로 열며 적셨다. 내 기억을 인정할지 어찌할지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얼결에 또다시 그의 말을 부정했다.

“난 연금된 적이 없어.”

“그래서 오늘 각하께서 안전하게 계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경.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당신이 살아 계시는 이 모든 순간, 꿈이 아니라 항상 다행입니다.”

무난하게 부정하다가 이 자리를 끝내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마지막 말에 나는 숨을 멈추었다.

시드니의 눈꺼풀이 내려가서 잠시 머무르다가 올라왔다. 나를 보지 않는 그 눈동자가 다시 드러나는 걸 보는데, 숨이 떨렸다. 가슴이, 아프도록 떨렸다. 죽을 것 같았다.

이상하지.

슬퍼서. 죽을 것 같았다.

숨이 막혀. 앞만 보고 있는 저 눈에 내가 칭칭 감겼다.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던졌다. 떨리며, 끊기며, 연달아 나왔다. 내가 주의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는지 시드니는 덤덤하게 인사했다.

“쉬십시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인사로 인해 나는 크게 동요했다.

이 아득한 분위기, 나의 용기, 충동, 이 고요한 절박함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 밤, 두 번 이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세 번째, 잡기로 했다. 시드니가 나를 지나쳐갔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아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내가 이 기사를 해칠까 두렵지만, 기억을 인정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야. 나도 사람이었다. 가주도, 사람이었다. 이성을 앞설 정도로 가져서는 아니 되지만, 그래도 어찌 되었든 감정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오늘 낮의 기요트 변경 백작이 한 고백이 날 등떠밀었다.

하여 나를 돌아보는 그에게 분명하게 물었다.

“경과 포르타를 구해주었으니 들어야겠네.”

“…….”

“말해. 어째서 발리앙을 그리 적대하고 고발했나.”

그에 시드니는 잠시 나를 본 뒤 찬찬히 대답했다.

“저를 위해서입니다.”

“……그래, 알겠네. 가보시게.”

일단 들었으니 되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건 이 사람을 보내고 하자. 호기롭게 잡아챘던 팔을 놓는 건 금방이었다. 힘을 주고 잡았던 탓일까. 손목이 저리는 느낌이 났다.

그런데 그도 내게 물었다.

“각하께서는, 어째서 물러나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나는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가만히 물러나 있지 않았나. 데스챔프가 이미 엎드러진 상태에서 발리앙이 무너지고 있는데, 거기에 포르타마저 무너지면 안 된다는 계산? 있었다. 당연히.

그러나 궁극적인 이유는 내 경험에서 비롯된 불안감이다.

라이네를 위해서도 아니요, 시드니나 포르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불안감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나의 침묵과 기다림이 또 어떤 처참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불안해하느니, 차라리 나서서 구하고자 하였다.

“나 역시 나를 위해서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다.

“내 주변이 또 나로 인해 무너질까 하여 두려웠어.”

그가 혹시라도 죽는다면 내가 과연 얼마나 무덤덤한 척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를 위해서다.

시드니의 표정에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 여전한 무표정인데, 그저 내가 느끼기에 그러했다. 나는 내가 많이 아꼈던 밤하늘 같은 눈에서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러나 부석부석하게 마른 음성으로 이었다.

“드나든 세월이 있으니 나가는 길은 알겠지. 가다 보면 할리가 있을 걸세. 나는 더 배웅하지 않겠네.”

이 말로 나는 우리가 함께 지냈던 시간을 완전히 토설한 것이다.

결국 내가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뒤통수부터 뒷목, 등허리, 오금, 발뒤꿈치까지 주르르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나는 타이를 매지 않고 단추 두 개를 풀고 있는 셔츠 사이로 목을 매만졌다. 목울대 너머가 먹먹했다. 어느 순간부터 걷는 걸음걸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걸 버티지 못해 집무실에 거의 다 왔을 때, 끝내 벽에 손을 짚고 멈췄다.

-그날, 누이가 신전 앞에서 그 사람을 돌아보는 게,

기다렸다는 듯 언젠가의 알드리히의 말이 귓전을 감쌌다.

-분명 안 그랬었는데. 분명 아니었는데.

당시 내가 느낀 황제의 절박함이 다른 형태로 변하여 지금의 날 휘감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절절한 감정이었다.

숨이 막혔다.

내가 여태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해오고 외면해왔던 게 방금 나를 완전히 잡아먹은 것 같았다. 기억을 되찾을 당시 머릿속에 울렸던 노래는 신의 힘 때문인지는 몰라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울며 하였던 생각 역시, 무의식중에 떠오른 생각이었음에도 지독히 충격적이었던지라 기억하고 있다.

정말이지, 새긴 것처럼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더 생각지 않았었다. 알드리히가 시드니를 보는 내 눈을 말하였을 때도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부정하고 부정했던 바. 그러나 방금, 잡아먹혔다. 나는 벽을 짚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가슴께의 옷을 쥐었다. 떠는 중이다.

그날. 연꽃 피어나듯 기억을 피우던 그 날, 그 새벽.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던 그 고백.

나도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던 그 고백.

……당신 말처럼 나는 살아도 되는 사람이었다며 뒤늦은 대답을 전하며 떠올렸던 그 사람.

아래턱이 떨렸다. 나도 몰랐던 진심이 수십 년을 지나 나를 이해시킨 것이다.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 아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기막힌인연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D

퇴고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65회차에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부분은 떡밥이라면 떡밥이었던......ㅇ<-< 알드리히 외전에서도 누이는 자기 마음도 모른다고 했었고....... 32회 꿈에서는 분하지만 포르타경이라면 누이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었고.......

뭐랄까, 에본느답게 자각하도록 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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