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33화 (133/157)

00133 CHAPTER 11. 애가哀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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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시드니가 일어나 인사했다.

낮 회의에서 보았던 예장이 아니라 그가 출근할 때 입는 제복 차림이었다. 그 예장을 하고 근무하기는 어려우니 당연한 일이다. 일상복차림이 아니라 제복 차림이라는 게 조금 의아할 뿐. 늦은 퇴근을 하자마자 바로 왔나. 나는 옅게 웃으며 그에게 화답했다.

“오셨군. 앉으시게.”

손을 펴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 있다가, 내가 앉은 후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앉아 그 모습을 보고 낮게 웃었다. 압박으로 통증을 버텨보고자 붕대를 칭칭 감은 복부가 조금 당겼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당혹스러운 감정에 잠기고 말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혹스럽게 그를 보다가 눈 마주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일단 시선을 거두었다. 입술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고 허벅지와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어지간히 급하지 않은 이상 소소한 사담부터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가벼운 담소의 주제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런 자리를 한두 번 가져본 것도 아닌데 머릿속이 비었다. 갑작스러웠다.

“…….”

혹 피곤해서 이러나. 미간을 좁혔다.

회의가 끝나고 귀가한 이후부터 피로와 몽롱함으로 영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몸이 무겁다. 검지로 입가를 더듬다 눈을 감았다. 여기 오기 직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안을 하였는데, 완전히 말려내지 못한 물기가 이마 위 잔머리에 남아있는 게 느껴졌다. 그 물기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한결 상쾌해지는 느낌이지만 아직 부족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희게 빈 머릿속을 더듬다가 한숨을 삼켰다.

일단, 어떠한 것이라도 생각을 하자.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 앞에 앉아있는 이가 시드니라는 점과 우리가 최종적으로 나누어야 할 대화가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턱에 기댄 엄지에 힘이 들어갔다.

불행인 건, 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 뜨기가 힘들었다. 잠시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감고 있고자 하였다. 어차피 생각도 정리해야 하고. 이유가 있으니 감고 있어도 된다. ……미쳤다. 남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그러나 어찌 되었든, 사람을 앞에 두고 완전히 잠들 정도로 정신없지는 않으므로, 슬슬 생각해야 할 주제로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부상 입은 곳은 어떠십니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대로 눈을 천천히 떴다.

뭉클하게 흩어졌던 초점이 돌아왔다. 축축하게 물기 젖은 눈을 몇 번 끔벅였다. 여전히 졸리지만, 훨씬 나아졌다. 턱을 들었다. 짧은 한숨을 푹 털어내고 입을 열었다.

“곧 낫겠지.”

아직 열려 있던 문으로 마침 킴이 들어왔다. 할리도 함께였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를 살폈다. 무언가 일부러 지은 게 분명한 미묘한 표정이라, 웃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속삭여도 시드니에게는 들릴 것이다. 문을 사이에 두고도 평범한 대화를 듣는 게 기사들.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도 그렇고, 아마 할리도.

내 유능한 보좌는 내게 속삭이지 않고 쪽지를 건넸다.

-윌리엄 용병단이 오드리나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 짧은 보고를 읽고 버릇처럼 미소했다.

여기저기 전국을 떠도는 이들이라 일단의 의뢰를 마친 후에는 그들을 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여기서 명분이라 하는 건 폭력적이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은 정당한 명분을 말한다. 나는 정당하지 않게는 얼마든지 그들의 뜻에 반해 그들을 억류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저희가 라이네와 접촉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기에.

그러나 이제 슬슬 필요할 날이 온 것 같아 그들을 찾고 있었는데, 좋은 일이다.

킴이 다과를 모두 내려놓고 물러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잠겼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가기 전에 창문 좀 닫아줘.”

“예, 각하.”

정중히 대답하고 그녀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사이 쪽지를 할리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킴이 할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갔다.

문이 닫혔다.

바깥 기척이 어느 정도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필르 발리앙은 내일 오전 중에 황궁으로 보내겠네.”

사담할 거리를 찾는 것조차 막막했던 때는 있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한두 문장만 주고받으면 되는 짧은 대화임에도 사적인 대화였기에 문제였나. 공적인 주제로 들어가니 말문을 여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졸림으로 저릿저릿한 눈도 적응이 되어 간다. 피곤치 않다는 건 아니었다. 졸림이 일부 가셨음에도, 조금만 방심해도 바로 잠들 것 같다.

이 피로는 도대체 뭔가.

의아할 정도로 몸이 통제를 잃어가는 듯했다. 팔걸이에 걸친 오른손으로 눈 사이를 주물렀다. 노곤하다. 곧 지압을 멈추고 손에서 얼굴을 물렸다.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경을…….”

뜨뜻미지근한 한숨이 둥글게 말려 나왔다. 망설임이었다. 방해했는지 도운 건지는 그의 계획에 따라 달라질 테니. 그러나 나는 내 입장에서 말해야 했다.

“……도운 것은.”

짧게나마 반응할 시간을 주었지만, 시드니는 그 단어를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흘리고 계속 말했다.

“이미 데스챔프가 확실히 대귀족 가문에서 제외된 상태에서, 발리앙 무너지고 포르타까지 흔들리면 우리가 곤란하기 때문일세.”

“…….”

“그러니 경이 또 오늘처럼 스스로 죽을 자리 찾아 들어가려 하면 나도 오늘처럼 저지할 테니 적당히 하게. 오늘 경이랑 기요트 변경 백작 때문에 당황하고 열 받은 가주들 많을 걸세.”

그리고 그들 반응까지 내가 막아주거나 제지할 수는 없다. 당연히 이 사람과 변경 백작이 대응해야 할 부분이고, 나는 그 과정에서 무엇이든 얻어내고 보상받을 입장에만 서 있고 싶었다. 더는 이 일에 그다지 연관되고 싶지 않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의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책망해야 할 것은 책망해야 했다. 같은 가주인데 다른 가주에게 훈계조로 책망 듣고 기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이 일로 시드니와 기요트 변경 백작에게 유일하게 훈계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있었다.

다른 가주와 황제 앞에서 치부를 드러내는 수치를 당해야 했고, 내 말도 일부 무시당했으며, 라이네가 상당히 모욕당했으므로.

그래도 분위기가 아주 굳어지지는 않기를 바라며 나는 평소와 같이 웃음을 선택했다. 곤란해 하는 척.

“만일 살아남을 다른 계획이 있었던 거라면 미리 우리에게 언질을 주었어야 했네. 그래야 옳게 반응을 하지. 계획이 있을 거라 확신할 수가 없으니 다른 계획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내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잖은가. 이번에 경을 도운 것으로 인해 차후 라이네가 곤란해지지 않기를 바라야겠군.”

“…….”

“이외 오늘 일에 대해 내가 할 말은 없네.”

이제 사과를 받거나 감사 인사를 받는 게 남았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은 없었다. 시드니가 어떻게 나올 것을 기대하고 그 자리에서 끼어들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입을 멈추고 찻잔을 들었다.

시드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살피는 것처럼 물끄러미 보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때에 시선을 접었다가 다시 편다. 내가 입안을 적시고 잔을 내렸을 때, 그는 물었다.

“회의에서 제가 했던 증언을 믿지 않으십니까?”

“음, 글쎄……. 그건 후작을 신문한 후에 확실하게 되니까 지금은 무어라 말 못하겠는데.”

“각하. 저는 알고도 각하께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자 시드니는 그렇게 말했다.

웃음이 지워졌다. 나는 침묵했다. 눈을 내려 아직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물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흔들렸다. 훈김이 올라 내 코끝을 축축하게 데운다.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졸음일랑 마침내 완전히 가셨다.

고요한 정적을 내가 깨트렸다. 가만히 물었다.

“그래서 내가 화내고 책망하길 원하는 건가?”

“…….”

“화가 나서 회의에서 경과 포르타를 비호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닐 테고. 날 죽이려 한 필르 발리앙도 보호하려 했는데 설마 입 다물고 있었다는 사람을 보호 못 할 이유는 없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얼 원하나. 경이 지금 내게 해야 할 것은 사과나 감사나 설명일세. 내게 무얼 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우리의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선 이유의 대부분이 내 오래전의 경험 때문이었다. 시드니는 어째서 발리앙의 살의를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 노여워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지만, 글쎄, 무어라 대답하랴. 어째서 내가 노여워할 부분을 굳이 짚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저 넘어가는 것 같으면 그대로 넘어가는 게 그에게도 좋을 것을.

나는 잠잠히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목이 탔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은, 그의 대답에 집중하여 신중하게 듣고 싶은 탓이다. 하여 이 묘한 갈증, 당장은 손쓸 수 없었다.

이 방에 고인 정적은 숨이 막힐 정도로 차가웠다. 아, 아니다. 나는 정적과 상관없이 호흡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길게 숨을 흘렸다. 자아낸 실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숨결이 뜨겁다.

잠시 후 시드니는 수십 초간의 침묵을 마무리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혹 제가 오늘 행했던 일이 각하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었습니까.”

“당연하네. ‘혹’이라 붙일 것도 없지.”

“…….”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답하는 데에 망설일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 질문을 왜 했느냐는 점이다. 일단, 오늘 회의에서 기요트 변경 백작이 나서서 내 말을 반박하였으며 시드니는 기요트 변경 백작의 증언을 보충했었다. 당연히 내 의지에 반하는 일이다.

또한, 내가 기억하는 시드니는 변명하기보다는 깔끔하게 사죄할 사람이었던 것 같아서.

그가 잔잔히 시선을 내렸다가 올렸다. 시선이 얽혔다가 떨어졌다.

“오늘 각하께서 만일 필르 발리앙을 고발하지 않기를 선택하신다면.”

나는 문득 긴장하고 말았다. 찻잔에 대고 있던 엄지가 움찔 움직였다. 그는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건 온전히 각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올렸다. 우리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저 밤.

“이번에 각하께서 상해를 입으신 일로 각하께서는 얼마든지 발리앙을 꺾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주와 황실을 제외하면 가장 상징적인 가문의 주인을 살해하려 했고, 그건 발리앙을 상당히 처참하게 잘라낼 수 있는 죄입니다.”

“…….”

“하여 각하께서 오늘 발리앙을 지키려 하신다면 그건 정치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귀에 들어와 박히는 단어들이 몇 개 있었다.

처참하게. 꺾고. 잘라내고. 그럴 수 있는. 꺾을 수 있고 잘라낼 수 있는. 내게 주어진 기회.

황제시해미수죄로 죽게 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게 처참히 죽게 만들 수 있는 죄.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강하게 주장하였더라면 처참한 죽음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죄. 내가 고발하였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전부 옳다.

나는 정치적으로 먼저 결정하였고, 이후 변명 같은 이유를 덧붙였다. 오늘은 보호하더라도 나중에 내 계획대로 하여 죽이면 될 것이라며. 내 계획대로, 그러니까,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오늘은 보호하시고, 후에 황제시해미수로 이끌고자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황제시해미수죄를 어떻게든 씌우는 것으로.

내 죽음을 알고 있는 시드니는 내 속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알고 있어. 내가 예상치 못했던 행보를 종종 보이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잠잠히 있었다. 그랬던 인내를 깨뜨리고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심지어 통보도 없이 오늘 그는 입을 열었다.

……거기서 웃긴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드니가 오늘 회의에서 베르덴을 잘라내고자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드니에게 전연 노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그에게는 나를 이해시킬 수 있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런 한결같이 미련한 믿음이다.

참, 미련한, 정이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굽혔던 허리를 도로 등받이에 기대고 어깨를 폈다.

이 두 가주가 베르덴을 누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선뜻 적극적이지 않았던 까닭. 그 자리에서도 떠올린 바 있지만, 발리앙을 보호하려 했던 건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일이었을 뿐, 내 개인적으로 진정 원했던 일이 아니기에.

치명타가 터져 죽어가려 하는 베르덴을 보며 내 감정은 어떠했나. 내 입술은 움직였나. 아니다. 나는 그 자리를 재미있어하며 내심 그를 조롱했었다. ‘친구여. 외면당하니 어떠한가.’

그리고 베르덴을 도무지 비호할 수 없을 것 같이 되었을 때, 인즉 베르덴과 시드니 중 한 사람을 구해내야 했을 때 생각을 해 보니, 황제를 죽이려 했을 때만큼이나 처참하게 매장당할 수 있겠더라.

좋았다.

그게 내 진심이었다. 죽일 수 있다면 지금 죽이고 싶었던, 절절 끓는 살의. 나는 시드니가 아까 물었던 ‘내 의지’는 정치적인 의지가 아니라 내 마음과 내 감정이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시드니는 전부 읽었을까. 앞뒤 상황도, 나도, 전부 알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인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상황이 그러하지 않았다면 시드니는 계속해서 잠잠하게 기다렸으리라 믿는다.

그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과 상관이 없이, 그와 나는 앞으로도 적당한 지인, 적당한 친구의 관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게……, 무슨 방자한 말이지? 감히 폐하의 옥체를 함부로 말하다니 내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새 반역인가?”

“그런 모양과 비슷하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경. 내가 슬슬 불쾌해지려 하네.”

“오늘 그들을 보호하셔도 각하께서 저들을 버리실 결심이시라면 결국에는 발리앙은 무너집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보호하셨습니까. 오늘이나 미래에나 무너질 것은 같습니다.”

“보호해주었더니 추궁으로 보답을 받는군.”

“베르덴, 아직도 친구로 여기셨습니까.”

“…….”

베르덴을 아직도 친구로 여기느냐는 그 간단한 질문이 내 말문을 일차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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