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2 CHAPTER 11. 애가哀歌 =========================
기요트 변경 백작은 예의상 보이는 미소도 없이 말했다.
“제게 듣고 싶으신 게 있을 듯해서.”
“친절하기도 하지. 그런데 나 외에 다른 분들도 오늘 숨넘어갈 뻔했을 텐데.”
샐샐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들이 숨넘어가도록 놀랐건 열 받았건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바로 태세 전환하여 제각각 앞으로 어찌할지 생각하고 있을 텐데, 무어. 이미 생긴 일에 미련 둔다고 없던 일이 되나.
내 농담 아닌 농담에 그는 그제야 옅은 웃음을 그렸다가 곧바로 지웠다. 사람 참. 나와 따로 만나는 일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으니 황궁 안에서 설명을 해치우겠다는 것일 텐데, 나라고 그와 있는 게 마냥 좋은 줄 아나.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계단을 가리켰다. 내려가자는 뜻이다. 내가 먼저 한 계단 내려가자 그가 바로 내 옆에 섰다. 대여섯 계단을 내려갔을 때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만 아니었으면 발리앙이 이렇게까지 몰릴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일세. 폐하 앞에서 한동안 힘 못 쓸 생각을 하면 아득하군 그래.”
“그렇긴 합니다.”
나는 그 태연한 대꾸를 듣고 피식피식 웃었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에게 한 마디 언질 없이 일을 저질렀고.”
“…….”
일 저질러 우리에게 피해를 준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각오는 했으리. 아니, 아니군. 그 각오를 한 사람이 과연 이 사람일까. 헤르조가 내게 했던 고백 그대로 증언하였던 이 사람이?
조금은 아득해졌다. 나는 옅은 한숨을 쉬었고, 그동안 백작은 호흡 흐트러지지 않고 계단만 내려갔다. 덕분에 천천히 일었던 흥분과 긴장도 푹 가라앉힐 수 있었다. 1층 복도를 밟음과 동시에 깊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물었다.
“왜 그랬나.”
백작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 건물 내의 복도는 넓지만 바깥보다는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나는 우리를 향해 인사하는 시종과 시녀에게 손을 올려 화답했다. 벙실벙실 웃고 있는 내 얼굴을 그가 잠시 보는 게 느껴졌다.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을 지나쳐 빛을 받고 나서야 백작은 입을 열었다.
“저는, 라이네가 싫습니다.”
나는 저 먼 곳 앞을 보고 있던 시선을 약간 내렸다. 가는 길에 손수건으로 보이는 게 떨어져 있었다. 밟지 않도록 보폭을 넓혔다.
치기 어린 말처럼 되고 말았으나 고심하여 고른 단어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리 대놓고 말할 줄은 생각 못 했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심지어 더 나아갔다.
“제 선친도 그러하셨고, 저도 그렇고, 제 아우들도 그렇습니다. 라이네가 실로 혐오스럽습니다.”
“충격이군.”
무심하게 대꾸했다. 나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았고, 그도 내 반응에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요트가 라이네를 불호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이유로 나도 기요트를 떨떠름하게 여기고 있고. 우리는 호의 어린 교류를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아니, 애초에, 음, 무어라 해야 하나.
가문 간 교류라 할 것 자체가 오래전에 끊겼지. 기요트가 먼저 한 차단이었다.
그러나 사실과 현실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표현은 조심해야 할 텐데.
때마침 봄바람이 불었다. 백작이 걸친 붉은 케이프가 내 오른팔에 닿았다가 도로 떠나갔다. 내 것도 마찬가지로 옆으로 나부끼다가 멈추었다.
바람이 멈추자 백작이 말을 이었다.
“……아까, 쥰 라이네경의 어미에 대해 말했던 건.”
이번에야말로 말조심하라고 말하려다 또 그만두었다. 조심성 없어 그리 말한 게 아닐 터. 웬일로 백작은 나를 믿는 것처럼 말을 솔직하게 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우리 둘이 더없이 가까운 가족인 것처럼.
봄 햇볕이 따뜻하다. 더 몽롱해지는 듯하였으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웃는 낯으로 눈을 찡그렸다. 그가 말했다.
“제가 그 여자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을 것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알고 있었고, 이해한다. 하여 예사롭게 긍정했다.
“그래.”
“작년에 각하의 선친과 그 여자가 나눈 계약서가 공표되기 전까지. 저희에게 그 여자는 스완의 자리를 차지한 여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래.”
“그리고 그 계약서가 공표된 후에는 그 여자를 완전히 혐오하게 된 것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음, 그건, 글쎄…….”
나는 혀를 차고 고개를 갸웃했다. 백작이 멈춰섰다. 한 걸음 더 나아갔던 나 역시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표정했다. 그 주변의 분위기 역시 잔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나 그래서 외려 그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악에 받쳤나.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의 기사를 보며 착잡한 한숨을 쉬었다. 계약서에는 스완 라이네가 쥰의 모친을 살렸다고 명시되어 있다.
무심코 생각하게 된다.
나도 쥰이 누굴 살리고 죽으면 이십 년이 넘도록 저런 처참한 그리움에 잠길까.
목구멍에서 턱 걸리는 한숨을 다시금 짓고 제대로 대답했다.
“당신 생명과 맞바꿔 살린 사람이지 않은가. 그분 대신이라며 애틋하게 여길 법도 한 것 같은데.”
“제게는 제 여동생을 죽게 한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리고 설령 스완이 죽어가면서까지 살린 생명이라고 애틋하게 여겼다고 해도, 그 여자는 스완이 살렸던 그 생명을 자살로 끝맺었습니다. 좋게 여길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 알겠네.”
가볍게 들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딱히 이 사람의 비참한 감정을 존중한 까닭은 아니었다.
단지 내게 새로이 악감정을 갖게 하여 좋을 일이 없기에.
내 반응이 그에게 만족스러웠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직하게 내게 고백을 계속했다.
“스완이 죽은 후 저희에게 라이네는 스완을 죽인 가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아까 쥰 라이네경의 어미에 대해 말했던 건.”
이번에는 그의 눈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 여자와 라이네를 더럽힐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대가 발리앙을 무너뜨리는 걸 돕고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우리를 더럽히고 모욕했다는 만족감 외에 말일세.”
나는 짜증을 바른 웃음을 웃으며 물었다.
더럽힐 수 있어 손댔다는 말은 일단 넘겼다. 설마 그런 감정적인 이유만으로 끼어들어 우리를 이토록 당황스럽게 했다는 말은 아니리라. 나는 제대로 된 이유를 듣기를 원했다.
이 사람이 오늘 대귀족 가문이 무얼 얼마나 잃었는지 인지를 하고 있다면, 나도 다른 가주들도 이유를 제대로 들어야 했다.
그러나 백작은 정신 나간 대답을 하였다.
“발리앙 후작이 그 여자와 그런 관계였다는 말이 나온 것만으로도 유감이 생겼었고…….”
미쳤군.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는데, 이 미친 사람은 내게서 어이 없어 할 권리를 일부 앗아갔다.
“전 발리앙 후작과 스완의 관계에 대해 추문이 나왔던 것도 유감이었습니다.”
“…….”
나는 말없이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그 추문을 퍼뜨리도록 둔 건 나였다. 그러니까, 기요트 백작을 나서게 한 것에 나도 한몫했다는 소리다. 아, 이런, 피곤해 죽을 것 같다. 돌아버릴 것 같아. 실질적으로 얻는 것 하나 없이 라이네와 발리앙에 유감이 있다는 이유로 대귀족 가문을 저렇게…….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끝나지 않았나. 눈에서 손을 내리고 시선을 들었다.
그는 망설이는 듯했다.
“각하는.”
“…….”
“그 아이가 그토록 사랑하던…….”
……이 사람이 나를 실로 미치게 한다.
이런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일은 없겠다. 바싹 마른 입안에서 피 비린 맛이 나는 듯했다. 나는 그를 보던 눈길을 조금 비꼈다. 나도 살다 보면 이토록 미친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올까. 속이 답답해졌다. 무능하게 당했던 전의 나보다 더 한심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고도 이 사람은 천연스럽게 서 있다.
나는 르네를 잃고 어찌했더라. 오늘, 아리엘을 어찌하려 했더라. 베르덴을 어찌 지키려 했고, 발리앙을 어찌 옹호하려 했더라.
내 사적인 감정은 어떻게 숨기고, 내 원수들을 어찌하려 했더라…….
사람이지만, 책임질 것들이 많으므로 사람이면 안 되는 입장일 텐데. 나도, 이 사람도.
온몸이 저릿했다. 살갗 곳곳이 예민하게 끓는 것 같았다. 입을 내가 먼저 열었다. 그가 채 끝내지 못한 말을 대신 하기 위해서였다.
“그대 누이의 자식이 살해당할 뻔했다는 것.”
“……예.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나는 입을 조금 벌려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내 단어 선택은 충분히 건조했다. 내가 살해당할 뻔하여 분노했다는 말에 감동할 것 없다.
나는 써늘하게 웃으며 정리했다.
“인즉, 그대 분노에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어울려주어야 했다는 것이로군.”
“…….”
“포르타 백작이 먼저 접근했나.”
내 이번 질문은 아마도 그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대답이 느렸다. 계산하기 위해서일 터. 잠시 기다리니 백작은 비교적 선선히 긍정했다.
“예.”
“그렇게 쉽게 의기투합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게 그렇게 되더군요.”
“그대에게는 이유가 있었다지만, 그 사람이 왜 발리앙을 흔들려 하는지 의아하지는 않았나?”
“상관없었습니다.”
“그럼 손잡는 대가로 포르타 백작과 거래한 게 있다는 건가?”
“없습니다.”
“이득도 없는데 상관이 없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 서로 배신할 일 없다는 것만 문서화 했고, 제게 그것이면 족했습니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고 약 기운도 오른 상황이라 짜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괴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백작도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가 손을 올려 직접 자기 케이프를 풀어 내렸다. 어깨에서 흘러 등 뒤로 떨어져 내리는 걸 잡은 그는, 붉은 천을 대충 팔에 걸쳤다. 나는 타이를 흔드는 것에 그쳤다.
한결 가벼워진 차림으로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각하. 스완은, 각하는 모르시겠지만, 스완 그 아이는 제 막내 여동생이었습니다. 정말 작고 여려서, 다독이는 것도 두려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그런 작은 아기였습니다.”
망아지 같았다던 블린성 총집사의 말이 떠오르다가 가라앉았다. 농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내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듣는 건 색다르다 못해 어쩐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죽어서도 사랑받는 그분, 이제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 어머니셨다. 요절하셨다 하더라도 내게는 항상 어른으로 남아계시면 좋겠는데. 여려서 지켜주고 사랑해주어야 할 분이었다는 걸 듣고 있는 내가 그분의 딸이라는 걸 상기해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배려를 해줄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이 내 외조부를 이어 가주에 오른 후에 다시 라이네와 교류 의지를 전해왔으리.
이 사람에게 있어 나는 그저 라이네다. 그의 조카가 아니라.
사랑하는 동생의 자식이니 나를 사랑스러운 조카딸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포함하여 라이네를 미워하기로 정한 것이다.
“각하께서 쥰 라이네경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저희가 스완을 사랑했던 만큼은 아닐 겁니다.”
“…….”
“그 아이는 정말 정의롭고, 정말, 작은, 제 막냇동생이었습니다.”
“…….”
“……각하께서는 그 아이를 지키지 못한 라이네 전 공작의 피가 섞였을지언정 그 아이의 여식이고.”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것 봐. 결코 ‘각하는 내 조카이고’ 따위의 말은 안 한다니까.
그가 사적인 감정에 몸을 맡기고 저지른 일. 이해하지 못해야 마땅했다. 그대는 미련한 짓을 했고 나는 그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유감을 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은, 내가 아까 시드니를…….
나는 사내의 코 즈음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의 색이 진해졌다. 오후다. 그 느낌 하나로 우리 사이에 있던 감상적인 분위기가 일순간에 흩어진 것 같았다. 백작이 얼마 안 있어 눈을 들었다. 아. 확실히 흩어졌다.
백작이 드디어 그가 해야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쳐서 달려든 감이 분명 있습니다만, 앞뒤 분별 전혀 않고 달려든 건 아닙니다. 저와 기요트는 괜찮을 겁니다. 문제는 아마도 포르타였는데…….”
“…….”
“그것도 각하께서 나서셨으니 괜찮겠지요. 다시는 사적으로 라이네와 관련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가 하고픈 말의 끝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물러선 뒤 내게 예를 갖추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말없이 푹 웃었다. 돌겠군.
뒤돌아서기 전 나도 마지막으로 경고하였다.
“그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마자 연 끊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네. 새삼 말할 필요는 없어.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땐 좌시하지 않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저지른 무례를 모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 경고와 찬 대답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 뒤돌아섰다.
기사단 건물이 있는 방향을 잠시 돌아보긴 했으나 지금 당장 다른 일을 할 몸이 아니었다.
말을 타고 귀택하자마자 한 차례 구토하고 나서, 이 약을 처방해주었던 의사를 달달 볶은 후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하여 잠들었다. 잠결에 든 생각인데, 내가 웃으며 빈정거릴 때 마음 여린 상주 의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던 것도 같았다.
선잠에서 깨어난 건 할리가 깨웠을 때였다. 시계를 보니 잠든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더라.
앓는 소리를 삼키고 무슨 일이냐 물었다. 할리는 내게 서신을 건넸다.
방문하겠다는 알림이었다.
“…….”
발리앙 저택에 기사들을 배치하느라 바쁠 사람이 보낸.
그렇지 않아도 오늘내일 중에 방문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통증이 없어질 때까지는 웬만하면 외출은 자제하라는 충고를 듣기도 했고, 내가 지독하게 피곤해서 어디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 앞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중에 오라고 짧은 답을 써서 할리에게 건넸다.
그리하여 수 시간 후 저녁 여덟 시.
시드니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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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트 가문과의 관계 떡밥:
에본느의 외가가 언급되지 않은 것, 에스메 외전에서 묘사된 '가문의 급이 맞는' 놀이 친구, 마찬가지로 에스메 외전에서 묘사된 스완 성격(특히 그녀가 누굴 구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에 에스메마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성격.), 에본느 외전 회의, 본문 한두 군데에서 에본느가 기요트 변경 백작을 보며 한 생각(예를 들면 쥰이 쓰러졌을 때).
드디어 시드니가 라이네 저택에 방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