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31화 (131/157)

00131 CHAPTER 11. 애가哀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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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끝났다.

내가 돌아서고 황제가 지원하니 베르덴은 속수무책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도, 평정을 크게 잃지도 않고 발리앙을 지키려는 모습이 마치 오래전의 나와 같았다. 여유 있는 척 받아치고는 있으나 결코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내가 그를 무심코 동정하고 비웃게 되는 것처럼 가주들도 예전에는 나를 비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베르덴은 발리앙 저택에 연금되고, 식솔들의 신문을 시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아리엘의 신문 및 심판권은 내게 있었으나 황제에게 신문을 맡기기로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리엘을 해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는 건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게 나으리라. 앞으로 발리앙 관련해서는 모든 일이 표면에 드러나게 될 텐데 적당히 관련되어야지, 적당히.

아리엘은 마법사라서, 에녹의 검과 같은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전무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신앙심은 내가 알기로 매우 얕다 못해 신을 우습게 보는 수준이지만, 말했듯, 어디까지나 ‘내가 아는 한’이다.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황제는 내게 회의가 끝나고 시간을 내주기를 원했고, 하여 나는 다른 가주가 전부 나갈 때까지 오늘의 회의를 반추했다.

특히 내가 이 자리에 앉아 급히 내려야 했던 결정 몇 개에 대해서. 계획을 완전히 뒤엎은 것과 아리엘을 잠시나마 황제에게 넘겨준 것. 그 결정들이 중요하냐 마느냐를 구태여 따질 필요도 없다. 하나하나 중요하므로 나는 반드시 최적의 선택을 해야 했다.

오늘 내가 한 게 최적의 선택, 이어야 한다.

입술이 움찔거렸다. 감은 눈으로 보이는 앞이 하얗게 색바랬다. 아찔한 감이 있었다. 팔걸이 끝을 지그시 쥐고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작게 부풀어 올랐다. 그 사이에 정적에 잠기기 시작한 넓은 방을 인지하는데, 내가 눈을 뜨는 것보다 황제가 말을 하는 게 더 빨랐다.

“뭐하자는 짓입니까.”

‘짓’?

눈떴다.

아득하게 흐려졌던 눈앞이 금세 원 형태를 되찾았다. 색색 선명한 시야, 그 세상 중 가장 선명하게 내 시선을 옥죄는 이는 황제였다.

웃음 한 점 없는 얼굴이 차가웠다.

나는 희미하게 눈웃음을 웃었다.

“폐하께서 황권을 지키려 하셨듯 저도 저희 권력을 지키려 하였던 것뿐입니다.”

“물론 그랬겠지요.”

“예.”

“그리고 사감도 있었겠지.”

다닥다닥 속눈썹이 박힌 눈시울이 시린 것 같다. 시리다. 나는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임시방편으로나마 눈물이 나와 눈알을 덮었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다시 책상이다.

알드리히는 내가 아무 반박도 변호도 하지 않은 까닭인지 하, 기막히다는 웃음을 웃었다.

“내가 미워 죽겠습니까? 수십 년 함께 다져왔던 관계는 한순간에 내팽개치고 날 적대할 만큼 그리도 미워 죽겠습니까?”

웃기는 소리.

반박해야 할 곳이 알아서 찾아왔다. 나는 몸을 떨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제게 오셔서 발리앙 후작을 움직인 분이 폐하시라는 것과 그 이유를 설명하셨을 때부터 제가 취할 행동을 예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

“제게 화살 돌리지 마십시오. 절 비난하지도 마십시오. 이번 일을 빌미로 절 쳐내려 하신 걸 제”

“누이를 위해서였습니다.”

“가…….”

황제가 동문서답했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나는 미간을 좁혔다. 나를 위해?

“저번에 말했잖아요. 포르타 백작을 반드시 쳐낼 거라고. 그 대신 발리앙을 쳐냈습니다. 안 기쁩니까?”

“…….”

“이번에 가서 누이에게 털어놓은 건, 예, 누이가 내 뜻대로 해줄지 어떨지를 본 것 맞습니다. 하지만 쳐내려 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쳐내려 하신 적은 없고, 하지만 저를 시험하려 하신 것입니까?”

그의 말을 가져와 그대로 비꼬았다.

그가 먼저 내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고, 덕분에 나도 어느 정도는 날 서게 대응할 수 있었다. 내 조롱을 들은 알드리히는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누이를 위해서 포르타 대신 발리앙을 고른 겁니다.”

“그게 어째서 저를 위해서입니까?”

“내 원대로 발리앙을 흔들게 하지 않겠다고 나를 외면한 주제에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요?”

그 말은 확실히 나를 찌르고 들어왔다. 테이블에 가린 내 손끝이 미모사처럼 움츠러들었다.

“나를 외면하고 나서 포르타경이 사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내게 엎드렸으면서. 그런 주제에.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내 앞에서?”

“…….”

“한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 누이는 자기 계획도 뒤집었을뿐더러 내내 시달려 왔다는 치부를 드러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네 공작이. 누이가. 당신이. 라이네가 최우선이고, 열세 사람이 이끄는 가문의 입김을 유지하는 게 그리도 중요하던 사람이. 한 사람 구한다고.”

“…….”

“그렇게 누이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 가만히 두었습니다. 이게 누이를 위한 일이 정녕 아닙니까?”

내용에 집중하느라, 알드리히의 목소리가 떨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감정 조절은 내가 능히 해낼 수 있듯 그도 쉬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현혹될 바 아니었다. 저 떨림이 진심이어도 내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아니고.

나는 똑바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포르타백작과 폐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새벽, 폐하께서는 포르타 백작을 쳐낸다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을 명백한 증거나 그에 상당한 무언가를 가지고 계시기에 그리 확실히 말씀하셨겠지요. 하여 여쭙겠습니다.”

“…….”

“포르타 백작 대신 발리앙이 무너진다고 그것들도 폐하의 손에서 없어지는 겁니까?”

“…….”

“아니겠지요. 이번에 발리앙이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폐하께 좋을 것이고, 후에 언제라도 포르타를 흔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번에 폐하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롯이 정치적인 이유로 행하셨던 일에 저를 이유로 대지 마십시오. 자칫 라이네를 모욕하는 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습니다.”

“…….”

라이네의 가주를 아무 데나 이유로 쓰는 건 불쾌해 마땅한 일이었다. 불쾌해하는 게 내 권리고 의무다.

오래도록 반응 없는 황제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더 말할 것 같지 않더라. 내게 시간을 내달라 했던 게 그의 뜻을 잠시나마 반했던 내 행동을 설명 듣기 위해서라면 이미 끝났다.

나는 팔걸이를 잡은 두 팔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조금 뒤로 밀렸다. 인사를 위해 손을 왼 가슴에 올렸다. 붉은 케이프 안으로 손이 들어갔다. 내 움직임을 고요하게 보던 알드리히가 말했다.

“당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폐하.”

변하지 않은 주장이었다. 이런. 나는 매우 유감이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 말하라고 제지하는 것임을 알 텐데도 그는 내게 물었다.

“내가 하지 않았으면 누이는 했을 겁니까?”

무얼. 발리앙 쌍둥이를 죽이는 걸? 당연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라이네 저택에 와서 설명한 대로라면, 그는 내가 검을 쓰지 않을 것을 확신에 가깝게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을 쓰지 않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황제에게 맡길 일이 없다는 거지, 내가 아예 손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저 사람은…….

-누이는 라이네의 가주입니다. 그리고 누이가 얼마나 철저한지 내가 알아.

내게 바비에르가의 수기를 건네주었던 그날이지.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 대화.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용과 그 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라이네와 발리앙을 경계하는 어떤 가문에서 낸 소문이라고 많은 사람이 짐작하겠지. 그런데 난 아닙니다. 누이와 진탕을 굴러 왔기에 알 수 있어요.

옳다. 이미 내가 발리앙에 대해 손쓰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을 터. 한데 ‘내가 하지 않았으면 누이는 했을 겁니까?’

나는 자리에 고쳐 서면서 고개를 살짝 내렸다가 올렸고, 그러면서 웃었다. 저 혀가 뱀과 같다. 기가 막혔다.

-내가 말했었죠, 누이. 난 누이를 안다고.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는 참 비슷하거든. 그래서 누이가 무얼 원하는지도 압니다.

비슷하다는 걸 알면 입 닥치라.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내 가슴에 시퍼런 칼이 돋았다.

어릴 적부터 겪어온 사회가 군주제 하의 사회인 데다가, 받아온 교육도 있어 나는 황제를 극진히 존중해왔다. 그러니까, 지구를 겪지 않았을 적의 나는 그랬다. 기억한다. 알드리히와는 나이 어릴 때부터 친구가 되어 자랐기 때문에 조금 격의가 없었을지언정 존중했다는 바는 변하지 않았다.

지구를 겪은 기억이 있는 지금은, 그래도 지구의 기억보다 처형당해 죽은 라이네 공작이었던 기억의 지분이 더 커서 대체로 그를 존중해왔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지구에서의 기억만 있었을 때처럼 황제를 내 속에서 낮추었다. 이 새끼가 나를 가지고 놀려 한다. 심호흡하는 모습도 보일 수 없었다. 작금 우리의 관계는 건전하지 않은 수년 전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일말의 흔들림은 보일 수 있었으므로.

유감이다.

어차피 이리 정치적이고 공적인 관계가 될 것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엮이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베르덴처럼.

아직 가슴 위에 있던 손의 첫 마디들을 구부렸다. 옷이 구겨지는 게 보여서도 아니 되고 팔에 힘 들어가는 움직임을 보여서도 아니 된다. 개중 가장 힘이 들어간 중지와 약지의 손끝이 살을 움푹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옷을 눌렀다.

네가 움직이지 않아도 내가 했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자폭할 필요는 없다.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대꾸하였다.

“폐하께서 먼저 움직이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하시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나도 누이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멀쩡하게 살아있었을 것 같습니까? 아니요. 누이를 위해 가문도 건 포르타경이 그들을 가만히 두었을 것 같습니까?”

“예.”

내 대답은 툭 터진 피고름같이 나와 흘렀다. 끈적끈적하고, 무엇보다, 아프다. 황제와의 관계가 안타깝기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이유 모를 막연한 감정으로 아팠다.

“…….”

알드리히는 무얼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멈춰 있다가 떨며 눈꺼풀을 내렸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믿을 일 없는 표현이다. 연민을 가질 일도 염려를 할 일도 없었다. 나를 제대로 보지 않는 그를 덤덤하게 잠깐 기다렸다.

그리고 적당히 시간이 흘렀을 때 입을 열었다.

“허락하신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미 인사를 하기 위한 자세는 잡혀 있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나는 문 가까운 곳에 앉아있었기에 퇴실하기 위해 알드리히를 지나치지 않아도 되었다.

저택에 돌아가면 일단 눕고 시작하자.

미처 누르지 못한 분량의 고통은 그렇다 쳐도, 묘하게 어지럽고 몽롱한 게, 쉴 필요가 있었다. 몇몇 독과 수면제에는 내성이 생긴 것과 다르게 진통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쉴 생각만으로도 이미 몸이 들뜬다. 가슴에서 털썩 내린 손을 문고리를 향해 뻗었다.

황제의 침묵이 부서졌다.

“누이. 마지막으로, 내 앞에 여인으로 서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거두며 돌아섰다.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필르 라이네일 때처럼. 소공녀였을 때처럼. 내가 황태자고 누이는 영애였을 때처럼 서봐요.”

내게 도달하기 직전, 그는 고개를 흔들고 그렇게 말했다. 내 앞에 멈춰선 후에는 또 이렇게도 말하였다.

“예전에. 라이네 저택에서 누이는 내 이름을 부르고 난 가슴 터질 것 같았던 그때처럼 서 봐요.”

환한 빛이 머리 뒤에서 쏟아지고 있던 알드리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더랬다. 그렇군. 떠오른다. 그러나 그때처럼 서는 것이 곧 그의 앞에 여인으로 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때에도 그의 앞에서 온전히 여성이지 않았으므로.

글쓴이와 등장인물이었던 적이 있고,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친구였던 적이 있고, 군신으로 마주 서고 있는 지금이 있었으나, 한 번도 여성으로 오롯이 있던 적이 없다.

알드리히는 잘못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반박하여 그를 민망하게 할 것인지는 그 후에 정하는 편이 낫겠다. 나는 묵묵히 그의 하는 행동을 눈에 담았다.

알드리히가 두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쥐었다.

천천히 그의 얼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침을 삼켰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눈을 슬쩍 찌푸렸다. 입을 진정 맞춘다면 내게는 약한 패가 하나 생기는 것이다. 쉬이 당해주었다고 타 귀족들에게 우습게 보일 여지가 있으니 쉽게 밖으로 꺼낼 패는 아니지만, 물밑에서 황제와 협상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든 쓸모가 생길 터.

마침 보는 눈도 없으니 막는 것보다는 이대로 두는 게 나았다.

멈추면 멈추는 대로, 계속한다면 계속하는 대로. 다만, 글쎄…….

그의 코끝이 내 코에 닿았다. 숨결이 내게 닿는다.

“…….”

다만, 나는 그가 내게 최종적으로는 접촉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해 내 손에 기꺼이 패를 쥐게 해 줄 황제였다면, 르네가 그따위로 끝장날 일도 없었으리.

바로 앞에서 멈춘 채로 알드리히는 긴 시간 숨 쉬었다.

그리고 그의 섬세한 속눈썹이 내려갔다.

“……이대로 입 맞추고 싶어요. 압니까?”

“…….”

“그런데…….”

알드리히의 목소리가 조금 흐려졌다.

“……언제부터 포기하기 시작했더라…….”

“…….”

“언제부터 내 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더라…….”

속삭이기를 마친 그가 코를 떼었다. 그의 눈길이 조금 내려가더니 잠시 후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알드리히는 기어이 어딘가에 입을 맞춘 뒤에야 허리를 세웠다.

그의 장갑 낀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내 얼굴 어디에도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았다. 나는 황제의 오른 손 엄지 뿌리 즈음을 힐끔 일별했다.

그대로 서 있는 나를 지나 뻗어간 손이 문을 열어주었다.

“가도 됩니다. 공작.”

“……처음부터입니다.”

문이 열리며 물러설 자리가 생겼다. 무슨 말이냐고 눈을 깜박이는 그를 보며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복도를 밟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나는 알드리히에게 정적이었다. 통상적인 놀이 친구보다는 가깝게 지내게 되어 공유한 일이 많았을 뿐, 항상 적이었다. 내가 라이네의 일원이고 그가 황실의 일원일 때부터, 그러니까,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도 알드리히도 서로에게 표 낸 적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공유한 일이 많은 친구였으므로.

황제에게 나를 향한 어떠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믿는다.

그런데, 아마도 새벽에 와서 시드니를 가지고 날 떠봤을 때였나. 저울질하고 황제를 선택하게 하였을 때. 알드리히가 내게 정치적인 결정을 요구했던 그때. 그가 고백하였던 은애보다 경계 어린 계산이 앞섰던 그때.

그때 그에게 나는 이미 공작이었다.

내가 공작 되기를 선택하고 황후를 거절했을 때부터 그는 내게서 온정을 떼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의 모든 생각이 ‘아마도’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신하인 내 입장이 있어 알드리히에게 우리는 처음부터 정적이었다고 직접 말할 수는 없으나.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가볍게 인사하였다. 피로 남은 환부가 찌르르 아파 왔다.

알드리히는 내 추가 설명 없이도 바로 내 말이 뜻한 바를 이해한 것 같았다. 내가 자리를 뜨기 전 그가 짓궂게 웃었다.

“알아.”

“…….”

“이제 아무것도 안 통하네.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통했을까. 그대한테는.”

그 웃음. 그 말. 나를 내려다보고 나를 조종하려 한 자가 할 법한 말이었다. 나는 빙긋 웃었다.

보라. 오래전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그에게 장난감이 틀림없다고 했었지. 그에 알드리히는 부정하였던 바. 내가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이 그의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그러나 조금 전 한 말만큼은 진심 여부를 상관치 않고 가볍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드리히는 저런 말을 하였고 나는 그를 들었다. 그저 그뿐으로 남겨두려 한다.

지난 수년간의 내 거듭된 거절과 오늘 있었던 반목으로 황제의 자존심은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는 황자인 그 자신, 황태자인 그 자신, 황제인 그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내가 진저리쳐왔던 누이 놀이도 이제 끝이 났다. 우리는 전보다 멀어지리. 그러나 함께 꾸미고 실행하였던 일들로 인해 그의 약점이 내게 있고 내 약점이 그에게 있었다. 알드리히가 작정하고 날 모함하지 않는 이상 우리 둘의 균형은 잘 맞춰진 채로 유지될 터.

황제가 내게서 완전히 등 돌리지 않는 한, 이 정도 거리감은 괜찮았다.

따라서 황제에 관해 염려할 시간에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게 좋다. 오늘 당장 해야 할 일도 있고. 생각에 잠겨 걷다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멈춰섰다.

난간에 한 손을 올리고 있던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저 사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변경 백.”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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