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0 CHAPTER 11. 애가哀歌 =========================
내가 설마 아리엘을 베르덴에게 넘겨주겠다고 결정하는 게 쉬웠으랴. 그들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말을 하는 게 과연 쉬웠으랴.
필요에 의해서라고 해도 참, 더는, 내가, 이 자리에, 언제까지, 왜. 언제까지, 저들을…….
극복 못 한 허탈감이 명치에 또다시 쿠웅 내려앉았다. 건물 무너지듯 내려앉고, 거대한 먼지가 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내 눈 밑 살이 자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고개를 옆으로 조금 내려, 팔걸이에 걸치고 있는 손으로 양미간, 콧대, 양 눈머리, 왼쪽 눈두덩, 왼쪽 눈꼬리까지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 와중에도 디알로 후작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만일 그대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대는 알면서도 발리앙후를 용납했다는 말인데.”
나이 들며 표정이나 목소리 같은 게 한결 유해졌다고 평을 듣는 노인은 차분했다.
나는 왼 눈가를 누르고 얼굴을 기대던 그대로 멈추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거나 눈길을 올리지는 않았다. 시야에 테이블만 들어오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베르덴은 싸늘하게 자르고 들어왔다.
“말씀, 조심하겠다고 한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았소. 정도가 있음을 모릅니까.”
“그래서 조건을 말했습니다. ‘이 사람 말이 사실이라면.’ 딱히 발리앙을 욕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다시 사과하겠소.”
“내가 여기서 디알로를 이 의혹과 엮고, 딱히 디알로를 욕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사과하면 됩니까?”
나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 뼈에 검지 끝이 걸렸다.
나와 데스챔프 공작의 공방을 듣고 있던 다른 가주들은 이런 심정이었을까. 재미있는데, 진실이 되어 터지면 대귀족이 흔들리니 불안하고, 그런데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건 내가 아니라 또 재미있고, 앞으로 내가 취해야 할 입장을 뇌리에서 계속해서 정리하고 되감느라 복잡하고, 그런데 또 재미있고.
베르덴.
너희 덕에 내가 맞서야 했던 그 자리에 네가 있다. 겪으니 어떤가. 친구라 생각했던 이에게서 외면당한 채로 겪으니 어떤가. 네 작금의 모습을 보고 내게 일말의 망설임과 짜증 섞인 슬픔이 드는데, 너는 그때,
친구여. 너는 그때 어떠했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겠군. 디알로는 발리앙과 다르게 이번 의혹에 대해 우리 중 한 사람이 증인이 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고, 지난 수년에 걸쳐 추문이 돌지도 않았거든.”
“디알로후.”
“지금 눈 가리고 아옹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거요. 한 사람만 입 열면 그대는 끝장인데. 그대야말로 말 조심 하시는 게 어떻소.”
그 한 사람, 나다.
나는 책상을 보던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 아슬아슬한 정도를 완전히 넘어서서 위험해졌다.
처음에는 내 뜻대로 입 다물 것 같이 굴었던 저 노인도 기요트 변경 백작과 궤를 함께 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증인이 나온 이상 이 자리에서 발리앙을 비호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하였나. 나는 소리 없이 뜨거운 한숨을 흘렸다.황권에 도대체 몇 걸음을 내주자는 건가…….
디알로 후작의 내심은 짐작이 간다. 차라리 발리앙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이 일을 우리 손으로 빠르게 정리해서 ‘우리는 우리 대귀족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자 빠르게, 알아서, 잘 처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이라도 챙기자는 것이리.
황제의 손에 의해 발리앙의 죄가 더 드러나는 것보다야 그 방법이 낫다, 물론.
만일 황제가 발리앙을 전부 밝혀낸다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이 힘이 약해진다. 자정 능력도 없고 결단력도 없는 썩은 물로 매도될 확률이 높았다. 황제는 대귀족의 힘을 없애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으므로.
“그럼 다시, 포르타백, 그대 말이 사실이라면 그대는 공범이라 할 수 있네.”
……그러나 발리앙을 치며 포르타도 어쩔 수 없다고 함께 제거하는 건 지나치다. 우리가 힘을 너무 많이 잃어.
시드니가 여기서 자구책을 마련해두었다면 모를까.
마련해두었으리. 그러지 않고 이런 불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들 리가 없다.
나는 그가 이 상황을 풀어나갈 것을 기다렸다.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가 그 바로 옆자리에 있는 노인에게 하는 대답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실로 멀어서.
“그런데도 증언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없습니다.”
정말. 멀어서.
이 자리에서는 이대로 함께 엮인 채로 두고 훗날 단번에 벗어날 수 있을 계획이 있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엉키고 풀렸다.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음성의 끝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숨결마저 조인다. 나는 눈가를 누르기만 하고 있던 손을 펼쳐서 두 눈을 가렸다. 충분히 장고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순간 판단을 해야 할 일들이 여태 수두룩했다.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그 판단은 어떠한 때라도 무언가를 걸어야 할 테고, 그 무언가는 내 명예, 라이네의 명예, 누군가의 명운, 존립 등이다.
항상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금 되새겼다. 분명하게 그 의미와 무게를 이해했나.
입이 벌어졌다. 흘리는 숨 안 물기가 자작하다. 나는 손바닥 아래의 눈을 천천히 떴다. 이해했다.
“폐하. 발리앙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치 않으오나, 포르타 백작이 이리 말하니 신문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럴 것 없네.”
가만히 목소리를 실어 디알로 후작을 끊었다.
손에서 얼굴을 떼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한동안 책상만 담고 있던 시야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는 후, 하며 크고 거친 한숨을 내쉬고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내 계획을 어지럽혀 둔 게 시드니인지 황제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게 누구의 뜻이었는지도 아직은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아리엘에게 혼담을 넣은 것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시드니의 뜻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나는 지금 나선다. 그때 그는 내게 어떠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일을 실행했다.
지금 나도 그리 하려 한다.
그의 계획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나는 끼어들 테니, 그는 그에 맞추어 계획을 끌어나가면 된다.
나와 가까워서 증언은 무시되었다고 했었다. 만일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나를 멀리하여 나를 살리겠다고. 그러나 이제 되었다. 그의 계획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나도 멋대로 하겠다.
나는 쓴웃음을 웃으며 차분하게 선언했다.
“그 사람에게 가만히 있으라 한 건 나야.”
황제는 시드니가 쓸려나가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게 어쩌면 황제와의 약속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그 모양을 순순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가만히 있으면 사그라질 거라 생각하였던 소문이 모여 나를 어찌 죄었는지 기억한다. 시드니에게 계획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여기서 잠잠히 입을 다무는 게 훗날 그에게 득 될지 해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 이 불안감은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논리의 결과물이다.
하여 나는 지금 내 모든 계획을 접고 누굴 지키려 하는 것이다.
베르덴과 시드니. 이 자리에서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 하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게는작금의 상황에서마저 베르덴을 보호할 생각이 없었다.
“인정하겠네. 나는 오래전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려 왔고, 그게 발리앙 쌍둥이로부터의 위협이었음을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네. 작고하신 선숙모의 사인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 처음 듣네마는.”
“그럼 알고도 여태 그냥 두셨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후계자 되기 직전까지 요양하러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기억할 걸세, 다들.”
“…….”
“그리고 그게 요양이 아니라 가출 겸 여행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여기저기 전국을 떠돌아다니면 자객들이 나를 찾아내기가 훨씬 어려워지지. 헤르조 포르타 영식에게 내 여전히 고맙네. 여행이라는 방법을 알려준 게 그 사람이거든.”
그 신나게 다닌 가출을 이렇게 포장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하며 깨닫고 있었다.
“나는 그런 소극적인 방법 외에는 따로 움직일 방도를 찾아내지 못했네. 후계자가 되기 직전까지도 이 자리를 승계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필르 발리앙은 폐하를 오래전부터 은애해왔고, 그래서 폐하께서 황공하게도 가까운 사이라 해주시는 나를 경계했네.”
“공.”
“……하여, 때가 되어 가문을 완전히 떠나 잠적하면 폐하를 내가 알현할 일도 없어지니 필르 발리앙도 살심을 버리리라 생각했어.”
“라이네공!”
베르덴이 거칠게 나를 불렀다.
그와 발리앙을 위해 이 자리에서 입을 열어서는 아니 되었던 한 사람. 나는 몽롱함과 피로로 시린 눈을 그에게 박았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들은 이해 못 할지도 모르겠지마는, 그들은 저 사람의 동생이었네.”
“…….”
“그들 자체가 내 친구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 사람, 내가 깊이 사랑하는 친구의 동생이었어.”
감상적인 말을 한다고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동요하지 않는다. 나는 감성을 위해 감상적인 말을 하는 게 애초에 아니었다. 필요에 따른 감상적인 말이다.
자기를 죽이려 하는 자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퍽이나 아무 대처도 하지 않았겠다고 의심받는 건 최대한 피해야 했다. ……이런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계획을 세운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시드니가…….
그러나, 아니, 그 탓할 것 없다. 결정한 것은 나이므로.
크게 반발하고자 하였을 베르덴은 내 이 ‘다정한’ 말로 입이 막혔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다고 어디 반박해보라. 날 찌른 아리엘을 조금 전까지 보호하였던 나를 어디 한 번 비난해보라. 그의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다.
나는 착잡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내렸다가, 알드리히를 보았다.
“이번에 입은 상해를 부정하여 송구합니다, 폐하.”
제 이득을 위하여 나에 앞서 발리앙을 흔들고자 하였던 황제.
그렇다고 그를 적대할 수는 없었다. 현실이라는 것이다. 황제와 가까이 지내는 건 내 지위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주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면에서 내게 이익이 많다.
이번 르네의 일에 대해 황제의 앞에서의 내 자존심을 이 정도면 지켰다고 나는 스스로 다독였다. 다독이고 싶지 않아도 자견해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현실이 있었다.
따로 답답해하는 한숨도 쉬지 않고 사과와 변명은 줄줄 나왔다.
“오라비를 생각하여 어서 자리를 뜨라고 조언했음에도 공격이 이어져서 어쩔 수 없이 제압했습니다만, 쌍둥이 동기를 잃은 직후이니 많이 혼란스러웠던 탓이라 이해하려 하였습니다.”
“……자칫 사망할 뻔했던 것도 마음 넓게 이해해주려 했다고?”
그 이유가 아닌 것을 서로 잘 알 텐데 기어이 짚고 넘어가겠다는 건가.
그러나 대응 못 할 바도 아니었다. 눈을 조금 찌푸리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했다.
“그런 위험을 당한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오래도록, 이십 년 가까운 세월 중 여러 번 숨질 뻔하였습니다. 여태 발리앙 후작을 생각하여 참아왔던 제가 이번 일만은 특별하게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이유가 있습니까?”
내 행동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베르덴을 이유로 더 들지 못할 까닭이 없다. 베르덴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데에 나는 거리낌이 없었다.
페레즈 백작이 다 들리도록 한숨을 쉬고 나를 잘랐다.
“그러나 이번 일은 대중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걸 그저 지나간다면 선례가 나쁘게 남습니다. 공께서 참으셨으니, 저희도 공격당하면 한 번 정도는 참아주어야 한다는 게 되면 어찌합니까.”
……이 사람도 이제 발리앙을 버리기로 결정하였나.
아, 나는 어느 정도 직감하였다.
발리앙은 이 자리에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추악한 면면이 훨씬 더 많이 드러나도록 몰리고 있으며, 그래서 자칫하면 황제를 시해하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게 매장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리 될 것이다.
버리기로 하였으니 철저하게 버려 우리의 자리를 최대한 지킬 것이다, 우리는.
아리엘을 베르덴에게 곱게 넘겨준 뒤에는 그것을 빌미로 이것저것 받아내고, 그렇게까지 친구의 방패가 되어주었던 내게는 결코 의혹의 시선이 오지 않게 처리하려 했던 생각은 이제 정말로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나서서 저들의 치죄를 주장하지 않아도 다른 가주들이 알아서 발리앙을 잘라낼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는 원했던 바를 얻고.
그리하여 내게는 아쉬워할 일도 없게 발리앙은 무너질 테고.
기요트 변경 백작의 말로부터 시작되어 시드니의 증언을 거치며 확고해진 이 분위기는 어지간해서는 뒤집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기요트 변경 백작의 뒤에…….
짧게 콧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할 것 아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고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가 할 말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에 가까운 편이기 때문에 웃음이 필요했다.
물었다.
“그런 취약한 모습을 인정하여 내게 무슨 이득이 있지?”
그들은 섣불리 반응하지 않았다. 더 설명을 바라는 것처럼 물끄러미 나를 보는 페레즈 백작을 위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라고 발리앙 쌍둥이처럼 나를 암살코자 할 유혹을 조금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있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니야.”
그 무슨 소린가. 진심으로 슬퍼진다, 그런 말을 하면.
“말이 지나치게 적나라한 건 내가 아니라 그댈세. 선례 운운한 건 그대잖아.”
유감이라며 슬픈 얼굴을 짓고 손을 들어 가볍게 손짓했다. 꽃봉오리 움트듯 오므렸던 손가락들이 편하게 펴졌다. 팔걸이에 고인 팔꿈치 끝이 조금 아픈 듯도 하였다.
“이제 죄가 밝혀지면 좋은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필르 발리앙은 좋은 모습으로 남을 수 없을 텐데. 그대, 발리앙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나?”
“라이네 공작 각하.”
건드리긴 나를 왜 건드리나.
예전, 데스챔프 공작이 나를 적극적으로 공격할 당시 페레즈 백작이 데스챔프의 역성을 들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 하긴. 그렇군. 기요트 변경 백작. 그는 그때도 나를 돕긴 했었다.
마지막 정이었을까. 아니면 라이네를 살려야 대귀족이 멀쩡하게 힘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서 나서기로 한 것이며.
눈꺼풀이 아주 약간 내려갔다. 초점마저 흐려지면 완전히 거슴츠레해질 눈을 하고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페레즈 백작의 날카로운 침묵을 맞받아치는 내 눈동자는 한 번도 옆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부동도 황제가 입을 열 때까지였다.
“……아니면.”
우리 열두 명 모두 알드리히를 보았다.
황제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니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 않겠나? 라이네 공작을 마음에 담은 사람은 처음부터 발리앙 후작일 수도 있다고.”
“…….”
“그래서 발리앙 후작은, 공작의 선숙모가 공작을 해치려는 걸 알고 그녀를 죽이고, 이번에 발리앙 영식도 라이네 공작과 관련된 모종의 이유로 죽였다든지.”
나는 페레즈 백작을 놀린 후에도 건들건들 유지되고 있던 손을 내 쪽으로 다시 구부려, 그 위에 입을 대었다. 장갑 속 손가락이 차갑다. 그 말 못할 냉기가 장갑도 뚫고 내 입술을 서늘하게 하는 듯하였다.
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백작 하나가 나와 비슷하게 몸을 기울여 이마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디알로 후작은 오른손으로 셔츠 옷깃을 다시 정리하는 것처럼 매만졌다. 당하고 있는 베르덴마저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느낀 섬뜩한 황당함을 저들도 느끼고 있을 것 같았다.
황제가 다른 중소 귀족도 아닌 소수의 대귀족 가주를 죄인으로 몰고가고 있는, 하여 지나치게 적나라한 발언이다. 그러나 저런 수위 높은 말로 베르덴을 몰 수 있는 건, 베르덴을 몸소 만나 움직이게 부추겼던 만큼 완전히 끝장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나를 방패와 그 대신 움직일 팔다리로 삼은 덕분에 수면 밑에 잠겨 있던 미친 성정이다. 알드리히는 성격이 좋았던 적이 잠시도 없었다.
내가 데스챔프와 그림자 뒤의 발리앙 쌍둥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몰리고 있을 때도 드러내지 않았던 막 나가는 성정을, 발리앙을 능히 대적하고 있을 때는 보게 되니 속이 아팠다. 내가 아까 그의 뜻에 따르지 않았기에 직접 나선 것일지도 모른다.
황제는 분위기는 개의치 않고 끝끝내 말을 마쳤다.
“발리앙 영식이 사망한 건 발리앙 후작이 라이네 공작의 청혼을 거절한 직후이지 않나.”
“…….”
“그러고 보니. 원래 라이네공과의 소문이 있었던 것도 르네 발리앙이 아니라 발리앙 후작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