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CHAPTER 베르덴. 너는 변하지 않았다 =========================
*
베르덴은 친구의 청혼을 곧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친구와의 협의 내용이 그러했던 까닭이다.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물었으나 친구는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그 이유를 막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쥰과 포르타 백작 중 더 좋은 상대가 누구냐는 이야기를 제대로 끝낸 줄 알았는데도, 에본느가 청혼서 두 개를 기어이 들이밀었을 때였다.
그는 여태 알고 있던 사실을 마침내 인식했다. 혹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의 친구는 아리엘의 악을 알게 되며 아리엘과 얽혔다. 그 말은 그 악의 피해자인 에본느와도 간접적이나마 얽혔다는 뜻이었다.
친구가 아리엘에 대해 입을 다물면 에본느는 피해를 입고, 입을 열면 에본느는 이익을 얻는다.
그냥. 그렇다. 그뿐이었다. 친구는 그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친구는 에본느에게 향하는 자객을 베르덴과 함께 막았고, 어떨 때는 홀로 차단하기도 하였다. 베르덴은 책임감 때문이라 해도 친구는 어찌하여 수고하였나. 그 수고는 과연 친구인 베르덴을 위함이었나, 아니면 함께 입 다물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나.
아니면. 에본느를 위함이었나.
기묘한 느낌을 주는 인지였다.
친구의 청혼도 결국에는 라이네에게서 온 청혼과 얽혔다.
……막연하다. 다 막연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엮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편적인 사실들을 늘어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그 막연한 느낌 속에서도, 친구의 행보가 처음부터 에본느를 위했던 것은 아니냐는 감상이 들었다.
아직은 어렴풋한 위기감이었다.
그 와중에 황제는 언제부턴가 베르덴을 통해 아리엘을 자주 불러들였다. 담소를 나누거나 정원을 산책하는 삼사십 분간의 긴 독대다. 아무래도 아리엘이 황후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시선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희망을 아리엘도 가졌는지, 아이도 근간 몹시 생기있게 피었다.
그러나 라이네의 쥰과 포르타 백작의 청혼서가 들어와 있는 중에는 황제가 더 큰 일보를 내딛는 일은 없을 터. 아리엘이 황후가 되면 발리앙에게는 큰 이득이다. 친구만 없었더라면, 친구만 아니었더라면 베르덴은 들어와 있는 두 청혼을 당장에 잘라냈을 것이다.
베르덴은 아리엘의 돌려 말하는 닦달을 물리치면서 친구와의 합의대로 시간을 끌 수 있을 때까지 끌었다.
작전지에서 돌아온 쥰 라이네가 독에 당하여 누워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는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한 동생들이 혹여나 무슨 짓을 저질렀나 하였다. 두 아이를 감시 중인 기사들에게 물었으나 따로 움직인 바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베르덴은 동생들을 향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고, 그에 따라 에본느와 쥰에게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에본느가 많이도 상심하였으리라 염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생각 끝에 에본느를 위로할 겸 그녀를 살필 겸 라이네 저택에 방문하기로 하였다.
가장 아끼는 쥰이 쓰러졌으니 혹시 에본느가 아리엘이나 르네를 의심하고 있다면 그를 보고 이성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언가 그녀의 내심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본느는 그의 방문을 허락했다.
막상 저택에 예방하자, 그녀를 부르러 갔던 보좌가 돌아와 오늘은 접견하실 수 없다고 그를 돌려보냈으나.
그녀의 보좌는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에본느에게 알리러 갔었다. 그리고 홀로 돌아왔고. 일개 소귀족도 아닌 발리앙 후작을 이런 식으로 돌려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이 저택에서 에본느의 기사, 보좌로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할리가 결코 태연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에본느에게 무슨 일이 있나.
보좌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 에본느에게 벌어진 것 같다.
발리앙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라이네 저택을 비밀리에 살피도록 하고, 에본느가 혹시 오드리나를 떠났는지의 여부도 알아보았다.
라이네 공작은 오드리나를 떠나지 않았다 하는데, 에본느가 라이네 저택을 드나드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접견을 하지 못하고 그를 돌려보낸 바에 대한 사과도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는 에본느의 몸에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래도록 독에 당해오고 자객에 당해와서 그녀의 육신은 건강하지 않았다. 자객을 경계해야 했던 탓인지 밤잠을 제대로 이룬 적이 손에 꼽고, 더 나아가 약이 없이는 잠 자체를 깊게 자지 못했다.
그가 아리엘과 르네를 지킨 탓이었다.
며칠 후 에본느에게서 자필로 사과 서신이 왔다. 만나지 못한 이유는 적히지 않았다. 베르덴은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기를 바란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때가 되면 이미 에본느는 마음을 모두 정돈하여 평온한 상태겠지만, 아예 만나보지 않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그러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의외의 곳에서 이루어졌다.
황궁.
베르덴은 친구와 에본느가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심장이 추락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저 둘을 갈라놓아야 한다. 그는 급히 걷지 않으려 애쓰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두 친구는 그를 각각의 방식, 각각 교류했던 대로 맞이했다.
간만에 만나는 에본느는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오래전과 같이 웃었다. 쥰의 일은 그녀의 속에서 전부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벼운 어조로 지나치듯 말했다.
“그 아이를 독살하고자 했던 자가 누구든, 죗값은 치러야겠지.”
그녀는 부친인 전 라이네 공작에게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호위로 있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 라이네 공작이 사망하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쥰에게만큼은 어설프게나마 애정을 퍼붓는다는 느낌이 들도록 때때로 어리숙한 표정을 짓고는 하였다.
전 공작의 소산식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그 애정은 더욱 고운 형태를 갖추고 빛났다. 보좌로 곁에 있으며 줄곧 느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이리라고 생각하였던 이유다. 사촌 동생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지고 난 뒤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에본느가 저렇게 바람에 몸 맡긴 것처럼 가볍게 말하여도, 속내는 무시무시하게 타오르게 있을 터.
그가 올바른 반응을 고민하는 짧은 사이 에본느는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하여간에, 간만에 벗끼리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건 어떤가. 회포를 풀 때도 되었지. 혼담도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의론할 때가 되었고.”
“그렇군요.”
“내일 어떤가? 아니면 오늘?”
베르덴은 질질 끌어오고 있던 청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날이 마침내 도래했음을 알았다.
친구가 듣고 있어 다행이다. 따로 연락해야 할 수고를 덜었다. 그는 아무래도 오늘은 일정이 있었으므로 내일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먼저 황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확실하게 갈라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무어라 종용하랴. 마침 폐하를 뵙고자 가는데 각하도 함께 가자고? 그는 에본느의 일정을 모르고 친구의 일정도 몰랐다.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나 다행히 에본느도 친구도 금세 따라왔다.
황제가 하사한 선물에 대한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한 명은 곧바로 떠나긴 하였으나.
황제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발리앙 후작을 접견해야 하니, 오늘의 산책은 이것으로 끝이군요.”
“아……. 즐거웠습니다, 폐하.”
“짐도 그렇습니다. 다음에 또 부르면 와줄 겁니까?”
“……예.”
아리엘은 싱그럽게 웃는 황제의 말에 어여쁘게 붉어진 눈을 접고 대답했다. 웃음은 가녀리고 고왔다. 아리엘은 베르덴이 황제를 알현하는 사이 다른 방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의 친구는 황제에게 불려온 모양이었으나, 무슨 일로 부르셨느냐며 정중하게 물은 친구에게 황제는 대답했다.
“보여줄 게 있어서 불렀네.”
웃음은 차가웠다.
어조 안에 어린 것은 필시 조롱이다. 놀라울 정도로 다른 감상이 들지 않았다. 조롱이었다.
“그리고 경은 다 봤어.”
황제는 그 말의 끝에 다정하게 명령했다. 바쁠 텐데 이만 돌아가도 좋네. 다른 가주와 그 가주의 여동생 있는 자리에서 멸시 아닌 멸시를 당한 친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가슴에 올리고 여전히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떠나갔을 따름이다.
작위는 다르지만 친구도 대귀족 가문의 가주 중 한 명이다.
친구가 이 자리에 황제에게 서임한 기사로 불려온 것만 아니었다면 베르덴은 지체치 않고 황제에게 반발하였을 것이다. 저 사람을 일개 영애 있는 자리에서 이토록 멸시하는 건 우리 대귀족 가주들을 한데 묶어 멸시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러나 친구의 입장이 묘했다.
베르덴은 주장해야 하는 모멸감과 불쾌감을 눌러 앉혔다.
그렇게 황제를 따라 도달한 곳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그대에게 보여줄 게 있어 불렀네.”
황제는 책상으로 다가가더니 그 위에 놓여있었던 것 같은 상자를 들어 뒤돌았다. 그리고 품위 없이 책상에 걸터앉듯 기대어 섰다.
품에서 꺼낸 열쇠로 자물쇠를 연 황제는 상자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베르덴에게 보여주었다.
주머니 두 개가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더럽혀져 있었다. 베르덴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들었다.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그 주머니들을 집어 베르덴에게 넘겨주고 상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베르덴은 의아해하며 주머니를 살폈고, 그 주머니에 놓인 수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서 주머니가 사라졌다. 잠깐. 방금 본 게.
눈을 쉬고 다시 내렸다.
보았던 바는 그대로 있었다.
발리앙의 문장이었다.
피로 추정되는 것이 말라붙어 있는 주머니들에 왜……?
“이번에 오드리나에 또 괴물들의 접근이 있었잖은가? 그 괴물들의 시신에서 찾아낸 걸세.”
“괴물,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럼 또 묻겠네. 발리앙이 수 놓인 이 어여쁜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
“독일세.”
독.
독.
독.
끔찍하게도 그의 주변을 맴도는 그 단어. 차라리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면 멍한 표정이라도 지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에 주춤거리다가 반응할 때를 놓치고 말았다.
베르덴은 무표정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또 묻더라.
“그럼 무슨 독일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어쨌든 이 부분은 잠깐 두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 보지.”
황제가 등진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강렬하게 하얘졌다. 그림자도 훨씬 비스듬해졌다. 햇빛이 투명한 오전과는 달랐다.
황제는 아주 조금 그림자가 스민 얼굴로 옅은 한숨을 지어 보였다.
“더 심각한 게 있어.”
“…….”
“어쩌다 보니 미로골목의 몇몇 죄인들을 체포하게 되었는데, 그자들로부터 쥰 라이네경을 독살하라고 의뢰를 받았다는 증언을 받았네.”
……정말.
정말로……, 정말 지친다.
순식간에 덮친 피로였다.
쥰 라이네의 일로 아직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는 베르덴은 오싹할 수밖에. 정수리에서부터 목을 지나 등허리까지 훑고 지나간 싸늘한 소름이 그를 순간적으로 피곤하게 하였다. 전부 놓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만 포기할까 하는 생각.
그러나 그의 이성은 부지런했다.
숨을 한순간이라도 멈춰서는 아니 된다. 동요를 보여서는 아니 돼. 시린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는 해야 할 일을 계속하였다. 평온해야 했다. 평정을 지켜야.
황제는 어깨를 들썩이는 한숨을 또 쉬었다.
“라이네경 암살을 실행하였던 그자들이 라이네 공작 역시 독살하려 했다고 하는데. 웃긴 건 그자들도 발리앙을 토설했다는 거야. 의뢰한 자를 쫓아가 보니 발리앙 저택으로 들어갔다면서.”
“…….”
일단은 발뺌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베르덴은 이 갑작스러운 자리를 면피하기 위한 결론을 내리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의 손에 있는 주머니의 수는 누구라도 조작할 수 있다. 천한 죄인들에 불과한 자들의 증언 역시 그렇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아마도 증인이 있긴 있겠다마는, 그래 보았자 죄인들.
그는 그저 이 의혹을 불쾌해하면 되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셔도 그런 근본 없는 증좌들을 근거로 발리앙을 이리 몰아붙이실 수는 없다고 불쾌해하면. 된다.
그런데 황제는 말했다.
“그런데 그 의뢰자가 딱 한 번 실수를 했는데, 아가씨라는 말을 했다더군. 의뢰하는 중에.”
덜컥. 숨이 구부러졌다.
아리엘?
왜 아리엘이 나오나.
그가 아는 한 실행자는 르네였다. 아리엘을 위하여 항상 르네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어. 어떤 단어가 나와야 한다면 도련님이다. 아가씨가 아니라.
잠잠히 듣고 있던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그런 무지렁이들이 아리엘의 생김새를 어찌 알겠습니까.”
“음. 그것도 그렇네. 거짓증언일 수도 있겠어. 아무나 되는대로 둘러댔겠지. 그게 왜 필르 발리앙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럼 아까 그 주머니에 있던 독으로 돌아가 보지.”
베르덴에게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푹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좋나. 그 주머니 안에 있던 독이, 쥰 라이네경을 독살하려 했던 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독과 같은 독이라더군.”
괴물들이 오드리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신성한 보호가 흔들려서 그렇다. 그건 2년 전 신관들이 단언하였다.
그러나 다가온 괴물들의 소지품에 발리앙과 관련된 물품이 있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그 안에 독이 있는 것도 신성한 보호가 흔들린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며, 그 독이 쥰 라이네를 살해하려 했던 자들이 쓰는 독이라는 것도 신성한 보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아가씨라는 말이 나온 것도 물론 상관이 없다.
전부 발리앙과 관련이 있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말일세. 짐이 좀 생각을 해 보았어. 의문이 들더군.”
“…….”
“‘혹시 필르 발리앙이 에본느 라이네나 쥰 라이네에 원한이 있나?’ 하는.”
============================ 작품 후기 ============================
저 주머니는 63회, 110회 참고해주세요.
챕터3끝에서 괴물들이 전 라이네 공작을 습격. 그 습격을 한 괴물들 소굴에서 자기 이름이 적혀있던 주머니를 본 에본느가, 언젠가는 사용할 일이 있으리라고 미리 발리앙을 수놓은 주머니를 만들어놓고 110회에서 결국 사용.
결론: 그 허무했던 르네의 죽음에는 에본느도 한몫했습니다.;_; 설마 그 주머니가 이렇게 사용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겠지요.
이번편으로 끝날 줄 알았던 외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저는 이만 뒷편쓰러 총총.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