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25화 (125/157)

00125 -CHAPTER 베르덴. 너는 변하지 않았다 =========================

이후로도 수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부친이 갑작스레 황제 직속 최정예 기사단의 작전을 따라가시더니,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피는 검게 쏟아졌다고 하였다. 가주나 되는 사람을 독살하려 하다니 미친 짓이다. 어떤 자가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하였느냐고 그는 격노했다.

소산식을 위하여 발리앙령에 다녀온 뒤 가주의 집무실에 있는 유서를 열고 나서야 그 범인을 알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아리엘의 악행을 알고 있었으며, 그 아리엘을 조종하는 게 르네인 것도 알고 계셨다고 했다. 모친은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하여 베르덴은 쌍둥이의 악함은 모친과 저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부친은 계속해서 써내려갔다.

베르덴이 다시 에본느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부친이 나서서 그녀를 설득했던 건 베르덴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도.

‘네 동생이 나를 중독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려 유감이다. 네가 발리앙 저택에 있을 때 내가 죽는다면 어떤 의혹이 나올지 모르고, 그 의혹을 네 동생이 어찌 이용할지 나는 예상할 수 없다.’

‘그 아이를 가까이도 두지 말고 멀리도 두지 마라. 아리엘에 이어 오드리나에 르네도 불러올린 것은 그 아이를 가까이 두고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내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 아이가 라이네에 저지른 짓은 이미 끔찍했기에. 그러나 가까이에 두니 나는 죽어가고 있구나.’

‘내가 죽을 것은 이미 확실시된 상태고, 실은 내가 가는 길에 르네도 함께 데려가는 게 옳다.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은 아마도 네 자리에 아리엘을 앉히는 것일 테니.’

‘그러나 르네의 목숨을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이어 죽는다면, 네가, 아들아, 네가 승작한 후 감당해야 할 불명예스러운 소문과 시선, 발리앙의 추락하는 위신은 나와 네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르네를 데리고 가지 않아 네 자리를 위협하게 두는 것을 용서해라. 네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만 경계하면 된다.’

그리고 중독되어 더는 돌이킬 수 없어진 육신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자진하러 간다는 내용이었다.

부친이 쓴 일의 전말은 처참하였다.

그는 승작을 위해 돌아오기 전 에본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냐던. 해 보았었다. 그러나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러하겠느냐며 넘겼더랬다.

대답하지 않는 그에게 에본느는 계속 물었었다.

-그때 그 상황에서 내가 죽거나 다쳤다면 사람들이 누굴 가장 먼저 의심했을지 생각은 해 봤나? 둘째어머니께서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일관되게 내가 위험하다면 말일세. 이번처럼.

그였다.

쥰의 모친이 살아 있을 때도 에본느의 곁에는 그가 있었고, 죽어 없던 그때도 에본느의 곁에는 그가 있었기에.

아리엘을 경계한다는 에본느는 그에게 몇 개의 질문을 던졌다. 간단하지만 아주 두려운 질문들이었다.

-경은, 발리앙을 사랑하나?

-아리엘은? 사랑해?

-르네는. 사랑하고?

그는 주춤했다.

에본느는 그의 모친은 입에 담지 않았지만, 발리앙, 부친, 아리엘에 이어 르네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는 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사랑에 도달하였을 때 가슴이 저렸다. 온몸이, 저렸다.

바로 직전 두 사람은 베르덴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는 것 같지 않냐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가문과 가족을 향한 사랑이라?

그가 아는 에본느는 결단코 천재는 아니었지만 바보도 아니었다. 가출하여 여행을 다니면서도 라이네 공작이 요구하는 후계자 수업은 모두 완료해낼 정도로 능력 있었다. 비단 이론적인 부분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실지 인간관계나 시류를 읽어내고 대응하는 실제적인 부분도 포함하여.

그저 영애일 때만 하더라도 사교계에서 또래 영애, 영식들은 꽤 수월하게 상대해냈고,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 뒤 살롱에 가서 나누는 대화나 그 언행은 놀라울 정도로 능수능란하고 냉정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짓궂은 이단아 같은 웃음을 싱글벙글 웃으며 해냈다.

그런 에본느다.

그래서 당시 그는 에본느가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느꼈다. 양심에 스스로 지레 둔통을 일으킨 것과 다름없었다.

부친의 서신을 읽은 베르덴은 다시금 생각했다.

에본느는 정말 르네를 알까.

부친의 서신대로라면 부친은 르네와 아리엘이 에본느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베르덴을 에본느에게 맡겼다. 그렇다면 에본느는 저를 죽이려 한 가문의 핏줄인 걸 알면서도 그를 친구랍시고 맡아줄 사람인가? 그리 마냥 마음 넓고 착한 사람인가?

……헤르조를 그리 내쳤던 사람이?

-자네를 보좌로 들일 때……, 발리앙 후작은 자네가 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힘주어 주장했네.

베르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 봄날, 기사인 나를 그리 매정하게 내쳤던 사람이?

아니, 애초에, 그토록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던 에본느가 발리앙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건 확실하나?

그의 손안에서 서신 끄트머리가 구겨졌다.

머릿속에서 여태 그가 겪어온 에본느가 온통 펼쳐졌다. 누덕누덕하게 기운 기억들이었다. 그녀를 특별하게 경계하기 시작한 건 그녀가 ‘아리엘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말했던 그날부터였으므로, 그 이전의 기억들은 크게 선명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고, 지나치고.

그러나 그날의 기억부터는 비교적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여 어느 날의 문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에본느가 공작이 되고 라이네령에서 돌아온 직후였던 것 같다. 그래, 그랬다. 그녀가 돌아온 다음 날.

-나는 자네에게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네.

-중요한 분입니다.

-얼마나.

-…….

-한때라도 자네 인생을 걸었을 만큼?

-……예.

-그럼 그렇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지?

베르덴은 이를 사리물었다.

-우정? 죄책감? 책임감? 무엇 때문이었나.

그 자리에서도 그는 섬뜩했었는데, 부친의 서신을 쥐고 회상해보자 그 문답은 더 간담 서늘하게 만들었다.

만일 에본느가 르네와 관련된 무언가를 알면서도 베르덴을 맡아주었던 거라면, 그녀는 정치적인 쓸모를 느꼈거나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일 텐데. 그는 서신을 놓고 부친과 에본느가 나누었던 합의서를 들었다.

아마도르 기예스 발리앙 드 레클레흐크 후작이 죽어가고 있는 것과 자진으로 생을 마감할 것을 에본느는 발설하지 않을 것. 차기 발리앙 후작이 될 현 발리앙 백작 베르덴을 에본느는 보좌로 들일 것. 베르덴이 비밀리에 후계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에본느는 최선을 다할 것.

에본느는 베르덴이 발리앙 후작을 승작할 때까지 베르덴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할 것.

에본느가 일방적인 파기를 하거나 합의 내용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에본느 라이네는 라이네의 검과 선지불된 금전 전부를 지불하며…….

그리고 이 합의를 모두 지켰을 시 그에 대한 대가로 에본느가 추가로 받아가는 것은 없으며, 선지불된 금전으로 대가는 마무리 지어진다…….

터무니없는 합의였다. 누가 읽으면 에본느가 발리앙에 죄를 지은 줄 알았으리. 이런 걸 합의라고 에본느가 동의했을 리가 없는데, 서명은 에본느의 것이다.

그녀를 알 수가 없다. 부친이 동생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충격으로 가슴은 이미 뒤집혔는데, 그가 한때나마 의지해왔던 그의 이해자가 그를 죽도록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베르덴은 상자에 신경질적으로 합의서를 다시 던져넣었다.

그때였다.

-자네가 나를 배신치 않으면 나 역시 자네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약속드리지.

에본느가 웃었다.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에.

숨 막히는 두려움이 그를 향해 웃었다.

에본느의 형상, 우정의 형상을 한 채로 웃었다.

라이네 공작이 된 에본느는 약속 하나도 섣부르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그 말. 그 약속. 그리고 베르덴이 안전하게 발리앙 후작을 이을 수 있게 하겠다는 이 합의. 에본느에게는 필요도 없던 대가.

“…….”

그에게 이런 흔들림을 주고자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게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녀는 그럴 능력과 그럴 성정이 된다.

그러나 부디 여태 겪어온 미묘한 질문들이 이십여 년 함께 나누어왔던 우정의 표현이면 좋겠다.

죄책감, 책임감 운운하며 물었던 게 단순한 질문이거나 단순한 걱정이면 좋겠고, 설령 르네에 대해 알아도 입 다물어 줄 정도의 우정이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

아예 에본느는 쌍둥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좋겠다. 그녀가 그의 동생들에게 전처럼 살뜰한 염려와 애정만을 전해오면 좋겠다.

-날 죽이고 싶을 거예요.

도대체 어찌 알았는지 모를 아리엘의 살의. 에본느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지면 좋겠다. 마침내 그런 비현실적인 바람까지 하게 되었다.

미련한 놈.

베르덴은 눈을 꽉 감았다. 그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후작이 되자마자 몰아치는 진실, 가정, 경계 등의 무게가 하나같이 묵직하다. 그래도 견뎌야 했다. 걸음걸음 걷다 보면 하나씩 돌파해 가겠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도 해내야 했다.

평범하게 후작으로서 해야 할 일들은 괜찮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에본느와 쌍둥이의 동향이다. 발리앙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

그의 부친의 독살 가능성이 소문으로 퍼졌다. 처음에는 에본느의 짓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에본느와 라이네도 당했다. 전 공작의 독살 가능성이었다.

발리앙이 당하는가 하면 라이네도 당하고, 라이네가 당하는가 하면 발리앙도 당했다. 발리앙과 라이네를 모두 노리는 자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에본느와 그의 동생들이 사이좋게 주고받고 있거나.

그러나 하나하나 터지는 추문의 여파가 퍽 셌다.

베르덴은 그 소문들을 수습하거나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며 상당히 머리 아파 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주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교육을 그렇게 받아왔다. 그의 동생들이라면 모를까, 에본느가 라이네를 이토록 진창에 빠뜨릴 리가 없다. 필요에 의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고 하여도 설마 라이네에 대한 어떠한 소문이 퍼져도 좋다는 것처럼, 하여 라이네를 조금도 돌보지 않는 것처럼 발리앙을 공격해올까.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하던 쥰이 실은 이복동생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을 소명할 정도로 에본느는 ‘쩔쩔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이전에 제안했던 아리엘과 쥰의 혼인, 르네와 그녀의 혼인도 그렇고.

과연 에본느가 아리엘을 여전히 경계하고 있는지, 르네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접히기 시작했다.

그의 오랜 친구의 부친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친구가 아리엘에게 청혼을 하겠다고 말한 게 바로 그즈음이었다.

그간 묘하게 희석되었던 친구를 향한 두려움이 불쑥 도로 선명해졌다.

십 년을 넘게 아리엘을 눈감아주던 친구가 한 첫 요구였다. 그리고 그것은 베르덴에게 협박처럼 다가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참 입을 열지 못했던 베르덴은 아리엘과 혼인하고자 하는 이유를 가까스로 물었다.

잠시 그를 응시하던 친구는 천천히 답했다.

“베르덴. 나는 지금 너를 이해시키려 하는 게 아니다.”

협박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협박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덴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친구를 보았다.

아리엘부터 혼인시켜 내보내고자 혼처를 찾아보는 중이긴 하였지만, 이 청년은 아니었다. 아리엘을 아는 이 친구는.

그래서 그는 동등한 친구가 아니라는 감정적인 두려움을 잠재우고, 현실을 입에 담았다.

“네가 입 열면 너도 추락하는 걸 알 텐데.”

친구는 그 냉정한 얼굴에 흐리고 옅은 웃음을 걸었다. 그리고 반문했다.

“정말 그럴 것 같나?”

“…….”

“네가 전전긍긍하며 네 가족을 지키는 지난 십 년, 나는 무얼 했을 거라 생각하나.”

……같이 추락하는 일 없도록 어떻게든 방도를 만들어놨었겠지…….

전전긍긍. 그 말이 옳다. 후작이 되기 전에는 에본느의 옆에 있는 것이 다였고, 후작이 된 이후로는 다른 데에 눈 돌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눈앞의 일들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그 대가로 아리엘, 그의 작고 악한 동생은 결국 이 친구에게 가게 될 것이다.

가만히 눈 뜨고 있던 베르덴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열로 인해 사레가 들린 것처럼 크게 기침했다. 얼굴이 죽은 색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친구는 절망과 피로로 인한 그 꼴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기침을 멈추고 나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입을 열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친구에게서 들었다는 말을 내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 어떠한 것도 곱게 들리지 않는 지금, 그런 뜬금없는 주제는 몹시도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그러나 약자는 그였다.

친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누군가도, 그 누군가의 친구도, 유력 가문의 가주가 될 사람들이었는데. 그 친구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은 자기 사정과 자기 입장이 허락하는 한, 너희, 그러니까 그 누군가를 포함한 자기 친구 두 사람을 믿고 지킬 거라고.”

“…….”

“적어도 네가 나를 배신치 않으면 나 역시 너를 배신치 않을 거라는 건 약속하겠다고.”

그런데 그 말.

바닥만을 향하고 있던 베르덴의 시선이 천천히, 정말 천천히 올라갔다.

친구는 또렷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눈으로 이미 그를 보고 있었다. 아, 그렇다. 밤이다. 약하지 않은 그 시선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친구는 아주 잠시간 그리운 것을 떠올린 것처럼 연하게 입꼬리를 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말했다.

“그 성정이 어디 갈 것 같지는 않아서 말하는데, 네게도 그런 다정한 감정을 가진 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베르덴은 팔걸이 바깥으로 늘어져 있던 손끝을 경련하듯 접었다.

……있다.

“네 가주로서의 입장, 가주가 해야 할 일을 모르는 게 아니야. 가문과 가족이 우선이지. 네게 친구를 우선하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나는 그저.”

있다. 그런 친구가. 그에게.

친구는 잠시 쉬었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알기를 원한다.”

무엇을 알기를 원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베르덴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 밤에 혼담에 대해 합의했다. 다음 날, 포르타 백작이 아리엘에게 청혼했다.

============================ 작품 후기 ============================

왜 베르덴 외전은 끝나지를 않는가.(깊은 의문)

감기 조심하세요, 독자님들.

저는 또 뒷편 쓰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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